술값은 팍팍 쓰면서 대리운전비 깎는 이유

 

배지수의 병원 경영

필자가 진료를 보는 병원은 요양병원입니다. 요양병원은 입원 환자를 주로 보는 병원인데, 추가적인 서비스를 개발하면 좋겠다는 생각에 외래 진료를 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런데 최근 문제 하나가 생겼었습니다. 외래로 오신 한 환자분이 진료를 받고 나서 너무 화를 내신 것이었습니다. 다른 병원보다 왜 이 병원은 비싸냐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결제를 안 하시고 그냥 가버리셨습니다.

내과 의원에서 진료를 받으면 자기부담금이 30%로 2900원 정도 나오는데, 저희 병원은 요양병원인 관계로 자기부담금이 40%를 적용 받아, 4000원 가량 나오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자기부담금을 깎아주고 싶지만 그것은 불법 행위라 그렇게 할 수도 없었습니다. 내과 외래를 계속 유지하다가는 고객들로부터 바가지 씌우는 병원이라는 이미지를 줄 수 있겠다 싶어 결국 외래 진료를 접기로 결정했습니다.

애완견 치료비는 안 아깝고, 동네 병원비는 아깝다?

사람들은 반려 동물이 아플 때 동물병원에 가서는 수십 만원을 쉽게 쓰면서 왜 병원에 와서는 1천원 정도 더 나오는 것에 예민하게 반응할까요? 이는 심적 회계 (Mental Accounting)라는 이론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가상의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어떤 친구가 저에게 돈을 빌려 달라고 했습니다. 이번 달 식료품비가 떨어졌다고 했습니다. 불쌍한 나머지 돈을 빌려주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그 친구 집에 놀러 갔다가 황당하게 느꼈습니다. 그 친구의 책상에는 여러 개의 통이 있었습니다. 그 통들에는 교통비, 사무용품비, 공과금, 자녀교육비, 식료품비 등의 라벨이 각각 붙어있었습니다. 그리고 식료품비라고 씌어 있는 통은 비어있었지만, 나머지 통들은 돈이 가득 들어있었습니다. 돈이 많이 있는 것 같은데 왜 나에게 돈을 빌리려 하는가 물어보니, 식료품비 통이 비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처럼 사람들의 머릿속에 작은 지갑들이 여러 개 있어서, 돈을 용도에 맞게 따로 관리합니다. 돈이면 다 똑같은 돈인데 막상 사람들은 돈에 라벨이 붙어 있는 것처럼 행동하는 것입니다.

다른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아파트 대출로 빚을 수억 원 지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성실하고 알뜰한 사람입니다. 월급을 아껴 쓰고 차곡차곡 모아 빚을 갚아나갔습니다. 그런 성실한 사람이 해외 여행 중 재미 삼아 카지노에 놀러 갔다가, 수천 만원을 얻게 되었습니다. 평소 같으면 돈이 생기면 빚을 갚는데 썼는데, 카지노에서 돈을 따자 다시 도박을 하거나 아니면 좋은 레스토랑, 명품 등을 사면서 쉽게 써버렸습니다. 도박으로 딴 돈이나 아껴 쓰면서 알뜰하게 모은 돈이나 똑같은 돈이지만 심리적으로 다르게 가치를 느끼는 것입니다.

라디오 재무 상담을 하는 프로그램에서 돈을 아껴 쓰려면 통장을 따로 관리하는 것이 효과적이라는 조언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생활비, 공과금비 등등 항목에 따라 통장을 따로 만들고 그 예산 내에서 지출하면, 더 규모 있게 쓸 수 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이 역시 돈에 라벨을 붙여두고 항목별로 관리하라는 의미로 보입니다. 심적 회계를 활용하라는 뜻이겠지요.

사람 머리 속에는 의료비 지갑과 유흥비 지갑이 따로 있다

제가 아는 한 원장님은 강남에서 수면클리닉을 열었는데, 병원이 잘 되자 확장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우리나라 최고 수준의 유명 호텔에 입점을 했습니다. 그 호텔에 놀러 갔다가 수면클리닉이 있는 것을 보고 그 원장님의 사업수완이 대단하다고 느낀 적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호텔에 놀러 왔다가 수면검사도 하고 일석 이조의 효과를 누릴 수 있을 듯 했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 호텔에 입점한 그 수면클리닉이 문닫았다는 소식이 전해져 왔습니다.

마케팅적으로 여러 가지 이유를 찾을 수 있겠지만 제가 보는 실패 원인은 사람들의 심적 회계를 고려하지 못했다는 점에 있습니다. 사람들의 머릿속에 있는 지갑은 놀러 갈 때 쓰는 돈과 병원 갈 때 쓰는 돈이 나뉘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호텔은 놀러 가기 위한 것이고 병원은 치료하기 위해 가는 곳인데, 그 둘을 합쳐서 일석 이조로 이용하기는 쉽지 않았던 것입니다. 생각해 보니, 저 역시 가족들과 호텔 놀러 가면서 이런 저런 장치 달고 자고 싶지 않았을 것 같았습니다.

요양병원을 운영하다 보면 건설업자들로부터 여러 가지 사업 제안이 들어옵니다. 제주도나 송도에 큰 땅을 개발해서, 거기다 골프장도 짓고, 실버타운도 만들고, 요양병원도 지으면 좋겠다고 제안을 합니다. 얼핏 들으면 참 좋을 것 같았습니다. 실버타운에 사시는 분들이 골프장도 이용하고, 또 아프시면 요양병원에서 진료도 받을 수 있습니다. 또 자식들이 요양병원에 입원해 계시는 부모님을 뵈러 놀러 왔다가 골프도 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시너지가 날 요소들이 곳곳에 있어 보였습니다.

그럼에도 필자는 이를 좀처럼 잘 되기 어려운 사업이라고 여겼습니다. 요양병원에 입원하신 부모님을 뵈러 갈 때와 골프 치러 갈 때는 서로 다른 시간을 할애할 것 같기 때문입니다. 또 실버타운에 계신 어른들이 아프면 근처 요양병원을 가기 보다는 보다 전문적인 대학병원으로 가지 않을까요?

심적회계에 따라 사람들은 머리 속에 의료를 위한 지갑과 오락을 위한 지갑을 따로 관리하기 하는데, 의료와 오락을 동시에 이용하는 것이 쉽지 않을 것 같다고 판단했습니다. 술값을 수 십 만원 계산하고 나와서 대리 운전비 아깝다고 손수 운전을 하다가 신세 망치는 경우도 나름 심적회계가 원인으로 작용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을 진료하는데 가치를 못 받는 사실 안타까워

미국의 어느 유명 경영대학의 교수는 심적 회계를 활용해서 행복하게 사는 법을 제안했다고 합니다. 연초에 200만원 정도를 복지 재단에 기부를 하기로 하고 비축했다가, 교통 범칙금 등 생각지 않은 지출이 생기면 기부금에서 까 나가는 방법입니다. 그리고 남은 돈을 연말에 복지 재단에 전달하는 방식입니다. 교통 범칙금을 내면서 어차피 나가기로 한 돈에서 나가는 것이니 덜 아까워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돈이 많다고 병원 와서 넉넉하게 돈을 쓰지는 않는 듯 합니다. 왜냐하면 부자건 서민이건 병원에서 진료받을 때는 3천원이라는 기준이 정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기준보다 1천원 정도 비싸면, 그냥 1천원 비싼 것이 아니라, 3천원 대비 1천원, 즉 30%나 비싸다고 느끼는 듯 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동물병원에 가면 수십 만원 써야 한다는 기준도 정해져 있는 듯 합니다. 그래서 동물병원에서 원래 30만원인데 2만원 깎아준다고 하면 싸다고 느끼나 봅니다. 동물보다 사람을 진료하는데 가치를 너무 인정 못 받는다는 사실이 안타깝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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