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항과 투쟁의 아이리쉬 달래준 푸른 상징

이재태의 종 이야기(21)

아일랜드…패트릭 성인과 레프러콘의 나라

아일랜드의 상징은 패트릭 성인(성 패트릭, St. Patrick)과 작은 요정인 레프러콘이다. 패트릭 성인의 기일(忌日)인 3월 17일은 성 패트릭의 날로써, 이날은 아일랜드와 전 세계의 아일랜드계 사람들이 거리를 녹색 물결로 채우는 축하행진과 그를 기리는 축제를 한다.

패트릭 성인(385∼461)은 아일랜드에 기독교를 전파하고 로마 글자를 처음 전한 수도승이다. 그는 로마계 영국인으로서 영국의 웨일스 서부 해안에서 살았는데, 열여섯 살 때 해적들에게 잡혀갔고, 6년 동안 노예가 되어 아일랜드의 산비탈에서 양을 치며 살았다. 전설에 의하면 기독교를 신봉하던 그는 하늘에 구원을 청하는 기도를 끊임없이 올렸고, 22세 때 꿈에 나타난 천사의 인도를 받아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고 한다. 이후 프랑스로 가서 수도사 생활을 하던 중, 과거 노예 생활을 했던 아일랜드로 가서 켈트 다신교를 믿는 그 들에게 기독교를 전파하기로 결심했다.

아일랜드에서의 그의 선교활동에 좋은 도구가 된 것은 아일랜드 들판에 지천으로 깔려 있던 토끼풀(샴록 클로버, shamrock)이었는데,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하나라는 기독교의 ‘삼위일체론(Trinity)’을 설명하기 위해 그는 잎이 셋 달린 토끼풀을 들어보였다고 한다. 그의 포교 활동은 성공하였기에 아르마그 대성당을 건립할 수 있었고, 마침내 아일랜드 전체를 기독교로 선교할 수 있었다.

461년 3월 17일에 사망한 뒤, 그가 포교를 위해 들어보이던 토끼풀은 아일랜드의 상징이 되었다. 원래 아일랜드를 상징하던 색은 파란색이었으나, 이후 그를 기리기 위하여 토끼풀의 녹색으로 바뀐 것 이다. 아일랜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십자가는 가운데에 동그라미가 있는 것이 특이하다. 이를 켈트 십자가(Celtic Cross)라 하는데 패트릭 성인이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아일랜드 인들이 쉽게 적응할 수 있도록 그들이 전부터 숭배하던 태양과 달의 형상을 그리스도교 십자가에 포함시켜, 가로 세로가 교차하는 지점에 원이 있는 십자가의 모양을 만들었다는 전설이 있다.

성 패트릭 날이 되면 아일랜드인은 강물에 초록색 염료를 띠우며 초록색의 옷을 입고 축제를 즐겼다. 이날에는 잘 말린 클로버 잎을 책장 사이에 끼워 서로에게 선물을 한다. 또한 미국의 아일랜드계 후손들이 뉴욕, 시카고 등 대도시에서 초록색 옷을 입고 성 패트릭데이 행진을 벌이는 것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축제이다. 매년 이 행진 참가자들이 소개하는 특별한 주제들은 곧 바로 세상의 관심을 모을 정도로 진취적이고 세계인의 이목이 집중되는 행사가 된 것이다.

1973년의 행진에서는 아일랜드 무장단체가 일으킨 ‘피의 일요일’ 참변을 추도하기 위해 14개의 관(棺)을 들고 거리에 나섰고, 1991년에는 아일랜드 동성애자들이 처음으로 독자적인 행진을 펼쳤다. 

아일랜드에는 삼각모자를 쓰고, 어린아이보다 키가 작은 난쟁이 요정인 레프러콘(Leprechaun)도 유명하다. 레프러콘의 어원은 아일랜드의 고유한 고대 게이릭 언어로 ‘작은 몸체’라는 뜻이다. 이들은 언제나 가죽 앞치마를 두르고 구두를 만들고 있으며, 턱수염이 더부룩하게 난 할아버지 요정이다. 이들은 오직 한쪽 신발만을 만들며, 무지개 끝에 항아리를 묻어두고 금을 모으는 고상한 취미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착하기만 한 이들이 어쩌다가 인간에게 잡히면, 자신을 풀어주는 대가로 반드시 세 가지의 소원을 들어준다고 알려져 있으므로 사람들은 꿈에서라도 레프러콘을 만나고 싶어 한다. 그러므로 아일랜드계 사람 뿐 만 아니라, 많은 미국인 가정에도 소원을 잘 들어주는 앙증맞은 요정 레프러콘 인형을 지니고 있다.

레프러콘은 그림형제의 동화인 ‘백설공주와 일곱난쟁이’에 나오는 일곱 난쟁이 요정의 모델이 됐고, 디즈니사에서 만든 만화영화에서도 흰 턱수염의 레프러콘 난쟁이 요정이 소개돼 전 세계 어린이들의 사랑을 받게 됐다. 여기에서 소개한 70년대에 만들어진 5개의 레프러콘 인형 도자기 종도 그런 연유로 미국 가정으로 판매가 됐을 것이다. 조용한 밤이면 집집마다 레프러콘을 잡고는 각자의 소원을 말하고 있는 아이들의 모습을 상상하는 것도 유쾌한 일이다.

게르만 계통의 켈트족이 기원전 청동기 시대부터 살아왔던 아일랜드는 우리에게도 친숙하고 정감이 가는 나라이다. 시인 예이츠의 “이니스프리 섬으로 돌아가리“와 “Oh, Danny Boy(아, 목동아)”라는 노래에 나타나 있듯이 아일랜드 인들은 모이면 노래하며 시끌벅적한 면이 있으며, 친절하고 감성적이다. 아일랜드의 민요가 슬픈 이유는 영국의 식민통치와 대기근이라는 비극적인 아일랜드 역사에 기인한다고 한다. 그 이미지가 우리나라와 비슷한 지, 아일랜드에는 한국인들을 “동양의 아이리쉬”라고도 소개하고 있다. 가톨릭 국가인 이 나라에서 많은 신부 수녀들이 50-70년대에 우리나라로 파송이 돼 전쟁 후 어려웠던 고아들의 구호활동과 국민들의 경제 자립에도 도움을 주었다. 제주도의 이시돌 목장은 이때 아일랜드 수도승들이 개척하고 만들어준 아일랜드 형 목축 시설이다.

척박한 땅 아일랜드에 살던 사람들은 영국의 탄압과 기근으로 아일랜드를 떠난 사람들이 많다. 특히 미국으로 이주했던 아이리쉬들은 이탈리아 이민자들인 마피아가 뉴욕을 주름잡기 전까지 강인한 생존력으로 밀주나 불법사업을 독점해 미국 동북부의 도시의 암흑가를 주물렀다고 한다. 전 세계에 펴져있는 아이리쉬들은 1800만명 정도로 추측되고, 각 분야에서 사회를 이끄는 주류가 되었다.

미국의 대통령 중 20명이 이들의 혈통 배경을 가지고 있다는데, 잘 알려진 케네디 대통령, 로날드 레이건이 이들의 후손이며 우리가 미처 알지 못하는 사람들도 많다. 권투선수 무하메드 알리,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증-고조 할아버지가 미국으로 이민 온 아이리쉬라고 한다. 알리(원이름: 캐시어스 클레어)는 그의 선조들이 아일랜드의 클레어 주에서 살다가 19세기에 미국으로 이주했고, 이후 흑인들의 피가 섞였다. 케냐 출신인 아버지를 둔 흑인 오바마도 백인 어머니의 할아버지가 아일랜드에서 이주했다. 남미의 혁명 풍운아 “체 게바라”도 아이리쉬 혈통이다.

아일랜드에는 450-600만 명의 인구를 유지하고 있는데, 기네스맥주, 워터포트 유리공장 같은 회사들이 아일랜드의 토종기업이다. 아일랜드는 20세기 후반기에 국제 금융의 허브로 두각을 나타내면서 급속한 경제발전을 구가해, 세계가 경이롭게 바라보았던 ‘아시아의 네 마리의 용(四龍)’에 빗대어 세상을 향해 포효하는 셀틱 호랑이(Celtic Tiger)라고 불리어 졌었다. 최근에는 부실 금융으로 인해 나라경제 전체가 된서리를 맞고 부동산 경기가 활성을 잃어 부풀어 오르기만 하던 섬이 이제는 거의 잠수하는 섬이 됐다고 자조하고 있다. 그러나 항상 역경을 이겨온 그들의 잠재력과 단결력은 이를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유사 이래 아일랜드인은 척박한 환경에서 목축으로 어렵게 살고 있었다. 684년 최초로 잉글랜드가 아일랜드를 침공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물러갔고, 12세기 전까지는 잉글랜드의 침공을 받지 않았다. 그러나 6-7세기부터 11세기 초까지의 아일랜드는 바이킹들의 천국이었다. 그들은 롱쉽(long ship)이라는 배를 타고 시도 때도 없이 약탈을 감행했다. 로마가 지배하던 영국 시대에 이미 전파됐던 기독교의 사원과 수도원은 비교적 많은 재산, 금은과 같은 부를 축적하고 있었기에 쉽게 이들의 표적이 됐다.

바이킹들은 아일랜드 해안에 겨울을 나기위한 둥근 기둥 또는 수직의 돌성을 쌓아 그들의 근거지를 만들었다. 바이킹 정착지 중 유명한 곳이 더블린인데, 852년 바이킹은 더블린 만에 상륙하여 요새를 건축했고, 수세기 후 이들은 아일랜드인과 섞이게 된다. 그 당시, 아일랜드를 분할하여 통치하던 여러 왕국의 국왕들이 완강히 저항하여 많은 전쟁이 일어났고, 바이킹은 아일랜드 전역을 지배할 수는 없었다. 결국 바이킹은 1014년 클론타프 전투에서 패퇴했지만 이후에도 바이킹이 건설한 항구들은 아일랜드의 주요 교역 통로로 남아있다.

 

바이킹족의 세력이 약해질 무렵인 1172년, 또 다시 헨리 2세의 잉글랜드 군이 침략했다. 수도인 더블린이 함락되면서, 아일랜드는 잉글랜드의 식민지가 되었으나 켈트족은 끈질기게 저항하여 잉글랜드 세력을 서서히 몰아낼 수 있었다. 하지만 1534년, 헨리 8세가 대대적으로 아일랜드를 침략, 이로 인해 아일랜드는 1937년 정식 독립될 때까지 약 400년을 잉글랜드의 식민지 통치를 받았다. 이들은 헨리 2세의 침입이후 20세기 초 독립이 될 때 까지, 영국과 끊임없이 싸운 800년 이상을 ‘저항의 역사’라고 부른다.

 

16세기 중엽에서 17세기에 걸쳐 잉글랜드는 ‘아일랜드 플랜테이션’이라 불리는 식민지화 정책을 실시한다. 이에 따라 영국에서 아일랜드로 건너온 장로교회 정착민들이 잉글랜드의 아일랜드 통치를 떠받치는 기반이 됐다. 잉글랜드는 아일랜드에 대한 지배를 공고히 하기 위해 성공회 신자가 아니면 공직에 임명하지 않는 법을 반포하고 아일랜드 성공회를 설립하기도 했다. 특히, 청교도혁명으로 권력을 잡은 영국의 호국경 크롬웰은 1649년부터 4년에 걸쳐 아일랜드를 정복하고, 가톨릭 구교도인 아일랜드인을 무자비하게 탄압한다. 정복 전쟁의 결과는 참혹했고 아일랜드인의 삼분의 일이 전쟁의 와중에 죽거나 추방당했다.

크롬웰은 아일랜드 로마 가톨릭 지주의 토지 대부분을 몰수해 잉글랜드에서 이민한 장로교회 정착민에게 주었다. 크롬웰군은 성당에 1000명이 넘는 아일랜드 국민을 가두고 불을 지르기도 했으며, 중부를 가르는 새넌 강을 기준으로 “죽지 않으려면 강을 건너 서쪽으로 건너가라”라고 명령을 했다. 이후에도 종교 탄압을 피해 영국에서 많은 구교도들이 아일랜드로 넘어왔으나, 경작이 불가능한 황무지인 강 서쪽으로 추방되고 아일랜드 인은 계속해서 공직 진출이 금지됐다.

아일랜드인은 ‘게이릭어’라는 토속어를 쓰고, 감자농사, 목축을 주로 하며 살았다. 감자를 주식으로 하던 이들은 감자에 병이 들면 먹을 식량이 없었다. 18세기에 이어 1845-49년에 감자 잎마름병으로 다시 대기근이 발생하자 8백만이었던 아일랜드 인구는 1911년이 되자 절반인 440만 명으로 감소했는데 200만 명은 굶어 죽었고, 200만 명은 먹고살기 위해 유럽이나 신대륙 미국으로 떠났다.

아일랜드는 이후 20세기 초까지도 영국의 국토로 남았으나 민족적 종교적 이질성으로 영국과 하나가 될 수 없었으므로 끊임없이 독립 투쟁을 한다. 이들은 1916년 부활절 봉기와 영국-아일랜드 전쟁을 거쳐 마침내 1919년 독립을 선언했다. 이에 따라 이루어진 1921년의 영국-아일랜드 조약은 아일랜드 자유국을 영연방의 일원으로 해 자치를 보장하는 것이다. 이 조약의 내용은 독립운동 세력을 분열시켰으며 결국 아일랜드 내전으로 이어졌다.

내전의 결과 아일랜드는 남과 북으로 분단되어 북아일랜드는 영국에 잔류하고 32개 주 중에서 남부 26주로 구성된 아일랜드 자유국이 출범한다. 1949년에 아일랜드는 영국 연방에서 탈퇴한 후 아일랜드 공화국으로 완전 독립했다. 영국의 영토로 남게 된 북아일랜드에서의 갈등은 18세기 스코틀랜드 장로교도들이 영국의 식민지 아일랜드에 이주하면서 시작되었다.

북아일랜드의 얼스터에 이주한 이들 장로교도들은 가톨릭교도들을 밀어내고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했으며, 이들의 후손들은 지금도 정치, 사회, 문화 모든 영역에서 기득권을 갖고 있다. 이들은 남쪽과 전쟁을 벌였고, 독립을 반대한 것이다. 북 아일랜드인은 수 백 년 동안 영국에서 온 개신교인들에게 차별과 억압을 받았으므로, 이들의 불만은 IRA와 같은 무장투쟁으로 폭발했다. 지금은 평화 협정으로 안정 상태를 유지하고 있으나, 북아일랜드의 수도 벨파스트 주민들 간의 갈등은 현재 진행형이다.

 

 

코메디닷컴 관리자 kormedi@kormed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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