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공 부하에… 도망병 등엔 처참한 형벌

 

장정호의 충무공 톺아보기(6)

신상필벌의 원칙

(1)신상

임진왜란이 끝나고 공신을 정할 때, 크게 선무공신(宣武 功臣)과 호성공신(扈聖功臣)으로 나뉜다. 여기서 호성공신은 선조의 피난길 동행 등 그 고생을 함께한 선조 측근들의 고생에 대한 보답으로 이루어진 포상이라면, 선무공신은 그야말로 임란 때 전투로써 공을 세운 사람들이다.

임란이후 선무공신 18명이 정해지는데 다음과 같다.

1등 공신 : 이순신, 권율, 원균

2등 공신 : 김시민, 신점, 군응수, 이정복, 이억기

3등 공신 : 정기원, 권협, 유산원, 고언백, 이광악, 조경, 권준, 이순신, 기효근, 이운룡

이중에서 1등 공신 이순신, 2등 공신 이억기, 3등 공신 권준, 이순신(이순신과 한글이름은 같지만 한자는 다른 이순신의 참모였던 사람), 이운룡, 그리고 원균과 기효근까지 이순신의 삼도수군 통제사 시절 그의 지휘를 받아 공을 세운 것을 보면 이순신과 연관된 공신이 18명 중에 7명이 된다. 1/3이 넘는다.

이순신의 보고서인 전투 후 장계를 살펴보자.

‘.. (전략)좌부장인 낙안 군수 신호는 왜적의 큰 배 1척을 쳐부수고 머리 하나를 베었는데 배 안에 있던 칼, 갑옷, 의관 등은 모두 왜장의 물건인 듯 했습니다. 우부장인 보성 군수 김득광은 왜적의 큰 배 1척을 쳐부수고 우리나라 포로 1명을 도로 빼앗아 왔으며, 전부장인 흥양현감 어영담은 왜적의 중간 배 2척과 작은 배 2척을 쳐부수었고, 중위장인 방답 첨사 이순신은 왜적의 큰 배 1척을 쳐부수었고, 우척후장인 사도 첨사 김완은 왜적의 큰 배 1척을 쳐부수었고,…(중략).. 신의 군관 급제 최대성은 왜적의 큰 배 1척을 쳐부수었고, 참퇴장인 신의 군관 급제 배응록은 왜적의 큰 배 1척을 쳐부수었고, 돌격장인 신의 군관 이언량은 왜적의 큰 배 1척을 쳐부수었고, 신이 데리고 부리는 군관 훈련 봉사 변존서, 전 봉사 김효성 등이 힘을 합쳐 왜적의 큰 배 1척을 쳐부수었고, 경상도 여러 장수들이 힘을 합쳐 왜적의 배 5척과 우리나라 포로 3명을 도로 빼앗아 왔습니다. …( 옥포 파왜병장)

‘…(전략) 우후 이몽구가 왜의 큰 배 1척을 바다 가운데서 완전히 잡아 적의 머리 7개를 베고 또 1척은 육지로 끌어내어 불살라 버렸으며, 사도 첨사 김완은 왜의 큰 배 1척을 바다 가운데서 완전히 잡아 적의 머리 20개를 베었으며, 녹도 만호 정운은 왜의 큰 배 1척을 바다 가운데서 완전히 잡아 적의 머리 9개를 베었으며, 광양 현감 어영담과 가리포 첨사 구사직은 협력하여 왜의 큰 배 1척이 상륙하려 할 때 쫓아가서 불살랐고, 구사직은 적의 머리 2개를 베었습니다. 여도 군관 김인영은 적의 머리 하나를 베었고, 소비포 권관 이영남은 작은 배를 타고 뚫고 쫓아 들어가 활을 쏘아 죽인 후 적의 머리 2개를 베고 나머지 빈 배 1척은 바다 가운데서 불살랐는데….(당포 파왜병장)

이순신은 일일이 부하들의 전공을 기술하는 보고를 조정에 꼬박꼬박 하여 그들의 노고와 공로를 꼭 보상받도록 하였다.

앞의 인용 글 중에 왜선의 큰 배 4척을 깨트린 공은 어찌보면 이순신 자신의 공으로 할 법도 한데 모두 ‘신의 군관’, 다시 말하면 자신의 직속 부하의 이름을 열거하며 그들의 공로를 일일이 말하고 있다.

또한 이러한 전공과 보상의 관계에 있어 이순신은 기존의 전공 기준이 적의 머리를 벤 수, 혹은 베어온 적의 머리수가 기준이 되는 것에 대해 새로운 평가 방식을 제시하였다.

단순히 베어온 머리수로 하면 전투가 끝난 후 왜병의 머리 사냥을 하거나, 혹은 조선 포로들, 혹은 조선인이지만 적의 포로가 되어 적진에 있던 무고한 사람의 머리도 베어져서 거짓 보고가 되는 병폐가 있기도 하였다. 그래서 이순신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장계에서 말하고 있다.

‘신은 당초에 여러 장수와 군사들에게 약속하기를, 전공을 세워 이익을 얻으려고 탐을 내어 적의 머리를 서로 먼저 베려고 다투다가는 자칫하면 도리어 해를 입어 죽거나 다치는 자가 많이 생기니, 쏘아서 죽인 뒤 비록 목을 베지 못하더라도, 논공을 할 때 힘껏 싸운 자를 으뜸으로 할 것이라고 거듭 지시했기 때문에, 이제까지 네 번 맞붙어 싸울 때 활에 맞아 죽은 왜적들이 매우 많았지만, 목을 벤 숫자는 많지 않습니다. ..(당포파왜병장)

한 CEO는 ‘충무공에게서 배워야 할 10가지’를 나열하면서 그 열 번째로 이렇게 이야기했다.

⑩공을 탐하지 말라-충무공은 모든 공을 부하에게 돌렸고 장계의 맨 끝에 이렇게 썼을 뿐이다. “신도 싸웠습니다.(臣亦戰)”

열심히 싸우면 싸운 만큼 공을 알아주는 장수 아래에서 부하는 마음껏 싸울 수 있었을 것이다.

(2)필벌

이순신은 상을 줄 때도 그 믿음을 지키며 동시에 벌을 줄 때도 추상같이 엄격했다. 마치 신상필벌의 표본을 보는 것 같다.

그의 군령은 추상과 같다. 체제를 세우고 훈련은 실전을 가정하여 실시하였다. 그는 수군의 체력, 사기를 끊임없이 고려하여 자신의 수군을 운용하였다.

신상필벌에는 지휘고하, 인맥, 학연을 무시하고 공평무사하게 적용하였다. 사상자와 부상자는 충분한 예우를 다하였다.

’16일 정축 맑음 … 방답의 병선 군관과 색리들이 병선을 수리하지 않았기에 곤장을 쳤다. 우후와 가수(가수: 임시관리)도 역시 단속하지 않아 이 지경까지 이른 것이니 해괴하기 짝이 없다. 자기 한 몸 살찌울 일만 하고 이와 같이 돌보지 않으니, 앞날 일도 짐작할만하다. 성 밑에 사는 토병 박몽세는 석수랍시고 선생원에서 쇠사슬 박을 돌 뜨는 곳에 갔다가 이웃집 개에게까지 피해를 끼쳤으므로, 곤장 80대를 쳤다.’ (임진일기)

‘초6일 병인 맑음, 아침 식사 뒤 나가 앉아 군기물을 점검했는데, 활, 갑옷, 투구, 화살통, 환도 등이 깨지고 헐어서 제대로 되지 않은 것이 매우 많았기 때문에 색리, 궁장, 감고(각 관청의 재정 출납 및 물품을 관리하는 사람.) 등의 죄를 따졌다.’(임진일기)

‘초 3일 임신, 가랑비가 아침 내내 내렸다. …. 이날 여도 수군 황옥천이 왜적의 소식을 듣고 집으로 도망갔는데, 잡아다가 목을 베어 군중 앞에 내다 걸었다.‘(임진일기 5월, 난중일기)

‘계사 2월 초3일 무자 맑음….. 이 날 경상도에서 옮겨온 귀화인 김호걸과 나장 김수남 등이 명부에 오른 격군 80여명이 도망갔다고 보고는 하면서도, 뇌물을 많이 받고 붙잡아 오지 않았다. 그런 까닭에 군관 이봉수, 정사립 등을 몰래 파견하여 70여명을 찾아서 잡아다가 각 배에 나눠주고, 김호걸, 김수남 등을 그날로 처형했다. …‘(계사일기)

‘3일 임술 비가 계속 내렸다. …. 아침에 고을 사람들의 밥을 얻어먹었다고 하는 말을 들었기에 종들을 매질하고 밥쌀을 도로 갚아 주었다.‘(정유일기)

’30일 정해 맑으나 동풍이 불고 비 올 기세가 많았다. … 적에게 붙었던 해남의 정은부와 김신웅의 부인 등과 왜놈에게 지시하여 우리나라 사람을 죽인 자 2명과 사족(士族)의 처녀를 강간한 김애남을 모두 효시하였다. 저녁에 양밀이 도양장의 벌레 먹은 곡식을 멋대로 나누어 준 일로 곤장 60대를 쳤다.‘ (정유일기)

이순신이 잘못된 부하를 처벌하는 과정은 생각보다 냉정했다. 그는 백성과 군을 엄격히 구분하였으며, 군(혹은 관)이 백성을 괴롭히는 일을 가장 싫어했다. 그가 가장 엄격한 잣대를 적용한 두 가지는 군기에 관한 것과 백성에게 피해를 주는 두 가지였다. 특히 군기 중에 도망병에 대해서는 용서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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