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시대를 풍미…. 비와 함께 떠난 왕의 애첩

이재태의 종 이야기(14)

퐁파두르 후작부인

흔히 “마담 퐁파두르( Madame de Pompadour)”라 부르는 퐁파두르 후작부인 잔느 앙투아네트 푸아송(Jeanne-Antoinette Poisson, Marquise de Pompadour, 1721- 1764)은 프랑스의 왕 루이 15세의 정부(情婦)로서 43세의 생을 마감할 때까지 20여 년간 왕의 사랑을 독차지했던 매력적인 미모와 풍부한 학식, 예술적 재능을 두루 겸비한 능력 있는 여성이었다.

1721년 파리의 부유한 금융업자였던 투르넴의 딸로 태어난 잔느 푸아송은 평민 신분이지만, 부르주아 계층이었던 어머니의 애인 덕분에 귀족층의 자녀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그녀는 모든 분야에서 성적이 매우 우수했으며, 교육덕분에 어릴 때부터 예술을 사랑하였다. 젊은 시절부터 여러 연극의 대사를 암송했으며 클라비코드를 수준급으로 연주하고, 열정적인 정원사로 식물학에도 조예가 깊었다. 또한 그림도 자주 그렸고 보석 디자인을 하기도 했으며, 유머 감각도 뛰어나 인기가 있었다고 한다. 1741년에 그녀는 사촌인 샤를 기욤 르 노르망 데티올과 결혼하여 잔느 앙트와네트 데티올로 이름을 바꾸고, 딸 알렉상드린을 낳았으나 딸은 10세의 어린 나이에 죽었다. 1744년에 가끔 사냥을 하러오던 루이 15세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하고, 그녀의 미모에 반한 왕의 눈에 띄어 내연 관계를 맺게 되었다. 그녀에게는 후작 부인의 칭호가 주어져 귀족으로 신분이 격상되었으며, 남편과 이혼한 뒤 1745년 9월 정식으로 왕의 정부로서 인정되어 왕궁에 살게 되었다.

 

 

프랑스 국왕의 공식 애첩이 된 퐁파두르 후작 부인은 죽을 때까지 20년 동안 그녀에게 매혹된 루이 15세에게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다. 당시 연적이라 할 수 있는 왕비 마리아의 측근들조차도 “퐁파두르 후작 부인은 내가 세상에서 본 가장 아름다운 여인 중의 하나”라고 말할 정도로 외모가 뛰어났고, 사려 깊은 마음씨와 풍부한 학식과 교양은 왕의 총애를 받기에 충분했다, 어떤 대화 주제가 주어지더라도 왕과 대화를 할 수준이었으며 대화가 시들해지면 피아노를 치며 직접 노래를 부르기도 하고, 개인 극장을 만들어 자신이 직접 감독한 공연을 열기도 하였다.

그녀는 여색에 빠진 방탕한 왕을 대신하여 정치에도 참견하게 되었는데, 마지막 15년간은 막대한 권세를 누리게 된다. 퐁파두르 부인의 추천을 받아 1758년 외무대신이 된 쇼아죌은 국방대신의 직위도 겸하였고, 10년에 걸쳐 사실상 재상의 역할을 할 정도였다. 그 당시 퐁파두르 부인은 프랑스의 정치에서 숨은 그림자와 같은 실력자였으며, 그녀 스스로도 “나의 시대가 왔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그녀는 새로이 성장하던 프로이센을 견제하기 위하여 평소 앙숙관계였던 오스트리아와 손을 잡으며,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테레지아와 러시아의 엘리자베타 여제와 함께 반(反)프로이센 포위망을 구축하였다. 그러나 후일 프랑스-오스트리아-러시아는 영국과 프러시아 동맹과의 7년 전쟁에서 패배함으로써 프랑스는 북미대륙의 식민지를 영국에 잃는 등 큰 손실을 입는다. 한편 이 외교혁명으로 오스트리아 공주였던 마리 앙뚜와네트와 프랑스의 루이 16세가 정략 결혼하는 계기가 되었다.

퐁파두르 후작 부인은 아름다운 외모에, 매우 지성적이었고, 예술 전반에 걸쳐 높은 안목을 가지고 있었다. 계몽철학에도 지대한 관심을 가져 디드로와 달랑베르가 공동으로 편찬한 <백과사전>의 발간을 지원하였으며, 로코코 양식의 확립과 프랑스의 예술 문화 발전에 많은 기여를 하였다. 그녀의 살롱에는 볼테르와 몽테스키외 등의 계몽주의 사상가들이 자주 드나들었는데 그녀의 다양한 예술적 취미는 프랑스의 문예진흥에 큰 힘이 되었다. 극장이나 소극장의 건립은 물론 당대의 예술가들도 모두 퐁파두르 후작 부인의 후원을 받았다. 그녀는 가구나 도자기, 그릇, 의상, 보석, 그림, 책 등 많은 수집품을 모았는데, 그녀가 갑작스럽게 죽은 뒤 그녀의 유품을 정리하는데 1년이나 걸렸을 정도였다고 한다. ‘우아한 부인은 당대의 모든 미술에 영향을 미쳤다’는 당시의 기록에서 알 수 있듯이, 그녀의 활발한 수집열은 후일 프랑스의 유산이 된 미술품을 생산하게 하였다. 이처럼 퐁파두르 후작 부인의 입김이 여러 곳에 미치자 자연스레 그녀의 취향은 당시 유행의 기준으로 통용되었다. 퐁파두르 후작 부인의 시대는 프랑스를 중심으로 우아한 로코코 양식이 최고로 발달하던 시대가 되었다. 하지만 오랜 세월에 걸친 사치스런 생활과 국가 재정 낭비는 훗날 프랑스 혁명을 유발한 원인 중의 하나라는 평가가 있다. 그녀는 문화 예술에 돈을 많이 쓰고, 여러 곳에 저택과 성곽을 건설하였는데 현재 프랑스 대통령 관저로 사용되고 있는 엘리제 궁전도 그녀의 저택 중의 하나였다.

 

 

퐁파두르 후작 부인은 베르사유 궁전 안에 녹원을 조성해 전국 각지에서 데려온 젊고 아름다운 미녀들을 모아놓고 루이 15세에게 고르게 하였다고 한다. 퐁파두르 부인은 두 번의 유산을 하였는데, 30살을 넘었을 무렵부터 루이 15세와는 더 이상 같은 침실을 쓰지 않고 스스로 왕에게 미녀를 받치는 뚜쟁이 역할 만을 했다고 한다. 그녀는 냉증이 심해서 뒷물을 자주 하였는데, 왕에게서 성병에 감염된 것으로 추측하기도 한다. 그녀를 위하여 비데가 새로 고안되어 사용되었는데, 지금과 같은 분수식이 아니라 뒷물용 대야에 청결 소독제와 향수를 넣어서 사용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녀는 비데의 창시자 중 한 명이기도 하다. 어느 악평가는 그녀가 죽은 후에 쓸 묘비 문구를 다음과 같이 적어 놓았다고 한다. “20년은 처녀로, 15년은 창녀로, 7년간은 ‘뚜쟁이’ 였던 여인. 여기에 잠들다.” 퐁파두르 부인은 변비와 기침으로 고생하다가 43살에 폐결핵으로 죽었다. (문국진. 명화와 의학의 만남)

 

 

퐁파두르 후작 부인이 죽은 1764년 4월 15일은 비가 내리는 날이었다. 루이 15세는 그녀가 정식부인이 아니어서 장례식에는 참석할 수 없게 되자 외투와 모자도 쓰지 않은 채로 “후작 부인이 떠나기엔 좋지 않은 날씨군…”이라며, 비를 맞으며 눈물을 흘렸으며, 퐁파두르 부인이 죽은 뒤에도 루이 15세는 계속 그리워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그녀가 생전에 친구에게 쓴 편지에는 “나는 그를 사랑했다. 19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진심으로 그를 사랑했다. 그의 옆에 있기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못할 게 없었다. 그러나 그가 왕이 아니었다면 나는 그를 절대로 사랑하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적었다.

퐁파두르 부인은 예술과 프랑스의 자존심을 높인 인물이라고 평가되고 있으나, 한편으로는 역사를 움직인 역대 왕의 정부 가운데 가장 뛰어난 인물이었다. 유럽인들에게 관심의 대상이던 퐁파두르 부인은 황동종으로도 제작이 되었는데, 여기에 소개하는 퐁파두르 부인 종(Madame Pompadour Bell)은 특유의 위로 빗어올린 헤어스타일에 오른 손에는 부채를 들고있는 다소 침울해 보이는 인상이다. 1900년경 벨기에와 네덜란드에서 주로 주조되었고, 벨기에의 부르즈 지방을 여행하였던 관광객들에게는 기념품으로 인기가 있었다. 3인치, 5 인치, 6인치의 다양한 크기로 만들어졌다.

 

 

※ 이재태의 종 이야기 이전 시리즈

(1) 세상을 깨우고 귀신 쫓고…신묘한 종들의 사연

(2) 무시무시한 검은 전사가 당장 튀어 나올 듯

(3) 적군기 녹여 종으로…승전의 환희-눈물 생생

(4) 천재 화가 ‘달리의 나라’에서 부활한 앨리스

(5) 딸의 작전에 넘어가 맞은 ‘그녀’… 종도 20개나

(6) 성모 마리아와 고문기구, 이 지독한 부조리

(7) 여왕의 꼿꼿한 자태에 서린 독립 열망과 분노

(8) 부리부리한 눈빛… 아직도 통독 황제의 위엄이

(9) “프랑스가 발 아래” 프로이센 한때의 자부심 충만

(10) 지옥같은 참호전투…전쟁 부산물 예술로 부활

(11) 전에 없던 부르조아풍 의상, 근대화 상징물로

(12) “그대에게 행운이…” 미첼레 성인의 사랑 가득

(13) 다양한 감정 실린 종소리…나에겐 한때 ‘공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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