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 ‘백혈병 사과’ 산재 시스템 변화 부를까

 

지난 14일 삼성전자 권오현 대표이사(부회장)는 서울 서초동 사옥에서 깊이 고개를 숙였다. 반도체 공장의 백혈병 피해 직원과 가족들을 향해 처음으로 공식 사과한 것이다. 권 부회장은 “저희 사업장에서 일하던 직원들이 백혈병 등 난치병에 걸려 투병하고 있고 그분들 중 일부는 세상을 떠나셨다. 삼성전자가 성장하기까지 수많은 직원들의 노고와 헌신이 있었고 그 과정에서 고통을 겪으신 분들이 계셨다. 정말 안타깝고 가슴 아픈 일이다”고 말했다.

이어 “이분들과 가족의 아픔·어려움에 대해 저희가 소홀함이 있었다. 진작 이 문제를 해결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점을 마음 아프게 생각하며 이 자리를 빌려 진심으로 사과드린다”며 공식 사과했다. 삼성은 관련 소송에서도 손을 떼고, 시민단체와 정치권의 중재 제안을 수용해, 재발방지책도 마련하겠다고 밝혔다. 지난 2005년 삼성전자 기흥 반도체 공장 직원 황유미 씨가 급성 백혈병에 걸려 2년 투병 끝에 숨진 지 7년만이다. 반도체 라인 근무자들은 백혈병, 암 발생 원인을 공장 유해물질로 지목해 산업재해를 신청했다. 삼성전자 측은 “이번 입장 발표가 반도체 제조 공정과 백혈병 발병 사이의 인과관계를 인정하는 건 아니다”라고 말했다.

이를 계기로 국내 산업재해 의료시스템에도 적잖은 변화가 뒤따를지 관심이 모아진다. 직업병에 대한 의료계의 관심과 산업안전보건에 대한 정부 차원의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탄력을 받고 있다.

직업병 공론화한 15살 송면이의 죽음
환자 직업력, 여전히 의사들 관심 밖

우리나라에서 직업병이 사회문제로 공론화된 것은 불과 20여년 전이다. 지난 1988년 온도계와 압력계를 만드는 공장에서 일하던 15살 문송면 군의 죽음이 세상에 알려진 뒤부터다. 공장에서 신나 작업과 수은 주입작업을 하던 문군은 불면증, 두통, 식욕감퇴 등에 시달리다 수은중독으로 사망했다. 직업병에 대한 인식 자체가 없던 때라 문군은 오진 속에 여러 병원을 전전해야만 했다. 마지막으로 찾은 서울대병원의 주치의였던 박희순 교수가 직업력을 물어본 것이 병을 밝힌 단초가 됐다. 박 교수가 평소 지인을 통해 산업재해를 이해한 덕분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환자의 직업력을 묻는 의사들은 그리 많지 않다. 하루에 5명꼴로 산재 사망자가 발생하고 있지만, 직업력은 대부분 의사들의 관심 밖이다. 직업환경의학과 전문의로 삼성전자 백혈병 문제를 제기한 인권단체 반올림의 공유정옥 활동가는 이러한 실태를 꾸준히 지적해왔다. 그는 “의료인이 산재 인정의 중요한 기준이 되는 직업력에 관심을 가져야 발병 원인을 밝혀내기 수월하다”고 강조한다. 환자 직업력이 진료 과정이나 결과에 도움이 된다는 이야기다.

직업병 인정 범위 점차 확대
입증책임은 여전히 환자 몫

다행히 직업병 인정 범위는 점차 확대되고 있다. 고용노동부는 작년 7월부터 산재보상보험법 시행령을 고쳐 직업성 암 등 직업병 유해요인 35종, 직업성 암 종류 12종을 추가했다. 직업성 암에는 난소암, 위암, 대장암, 유방암 등이 더해졌다. 만성폐쇄성폐질환과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도 산재 인정 기준에 포함됐다. 고용노동부는 “과거보다 복잡해진 산업구조와 작업환경의 변화 속에서 새로 제기되고 있는 유해요인과 질병을 고려해 산재 인정 범위를 대폭 늘렸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직업병 입증책임이 환자에게 있다는 것이 관건이다. 인과관계를 쉽게 확인할 수 있는 외상과 달리 직업병은 산재로 승인받기가 까다롭다. 유해요인에 노출돼 발병하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걸리고 인과관계를 입증하기도 곤란하기 때문이다. 산재 전문 변호사들에 따르면 직업병 산재 승인률은 신청 건수의 10%에도 못 미치는 것으로 알려졌다. 근로복지공단 산하 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 위원의 80% 가량이 의사다보니 의학적으로 인과관계를 엄밀하게 따져 기각률이 높은 것으로 풀이된다.

시민단체인 노동건강권연대에서 활동하고 있는 임준 가천의대 예방의학과 교수는 “건강보험처럼 산재보험 청구를 병원에서 하고 산재 입증은 근로복지공단이 책임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안철수 새정치민주연합 공동대표도 무소속 대선후보이던 지난 2012년 삼성전자 뇌종양 피해 직원인 한혜경씨를 만나 이러한 주장에 공감을 표했다.

산재 전문 의료시스템 확충 시급
신종 직업병 임상연구 시스템 전무

산재 전문 의료시스템의 확충도 시급하다. 국내에서 해마다 9만명 넘게 산재를 당하지만, 진료는 대부분 민간병원에 의존하고 있다. 산재전문 병원도 재활과 진폐합병증, 중증 장기요양환자 중심으로 운영되고 있다. 직업성 암 등 신종 직업병의 진단과 치료를 위한 임상연구 시스템은 전무한 실정이다. 이재갑 근로복지공단 이사장은 14일 언론과 인터뷰에서 “산업구조 변화에 따른 직업성 암 등 난치성 질환에 대한 치료나 예방기법을 개발하고 보급하는 데 한계가 있다”고 털어놓았다. 이를 위해 고용노동부는 오는 2017년까지 울산에 전국의 산재병원을 총괄 관리할 국립 산재모(母)병원 건립을 추진 중이다.

상황이 이렇자 산업보건안전에 대한 정부 차원의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는 목소리는 각계에서 점점 불거지고 있다. 삼성전자에 사과와 보상 등을 위한 중재안을 제시한 심상정 정의당 원내대표는 기업과 정부를 동시에 압박하고 있다. 전문성과 독립성을 갖춘 제3기관을 통해 화학물질 취급과 안전보건관리 현황을 종합 진단해 결과를 제시하라고 삼성전자를 옥죄고 있다. 정부를 향해서는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에 대한 집단유해성조사와 뇌종양 피해에 대한 집단역학조사를 실시할 것을 촉구했다. 심의원은 이러한 내용을 담은 삼성반도체 직업병 피해자 구제 결의안을 지난 달 국회에서 발의했다.

政.法.醫, “산업보건 관련 제도 강화”
산업보건 규제완화 신중해야

아쉽게도 법에는 허점이 있기 마련이다. 노동부는 산업안전보건법에 따라 장관 명으로 직업병에 대한 역학조사를 할 수 있다. 하지만 화학물질의 수입량과 위해 정도가 적거나 영업비밀로 보호가치가 인정되면 공개하지 않을 수 있다는 조항 또한 숨어있다. 법조계 일각에서는 산재 예방을 위한 투자를 비용 정도로 여기는 대기업의 안이한 사고방식에 경종을 울려야 한다는 의견이 나오고 있다. 국가가 나서 산업보건안전을 위한 관련 기준을 강화하고, 제도적으로 강제해야 한다는 것이다.

법률사무소 ‘온’의 조상호 변호사는 “국가계약법 시행규칙을 보면 산업재해로 근로자가 동시에 사망한 기업은 부정당업자로 지정돼 조달청 입찰 자격이 6개월에서 1년 6개월까지 제한되는 피해를 입게 된다”며 “법원이 산재 판정을 과감하게 내려줘야 기업이 피해자 개별 보상이 아닌 근본적인 근로 환경 개선에 나서게 된다”고 말했다.

의료계에서도 산업보건의 부활 등 관련 제도에 강제성을 부여할 필요가 있다는 입장이다. 근로자의 건강상태를 상시 점검하기 위해 마련된 산업보건의 제도는 지난 IMF 이후 유명무실해졌다. 기업 활동 규제를 풀어주는 특별법이 만들어지면서 기업주 자율에 맡겨졌기 때문이다.

민경복 아주대 직업환경의학교실 교수는 지난 2010년 학술지인 미국공중보건저널에 게재된 논문에서 IMF 외환위기를 분기점으로 국내 근로자가 직업병에 걸리는 비율은 외환위기 이전보다 4배 이상 증가했다고 밝혔다. 민교수는 이를 무분별하게 산업보건 규제가 풀리면서 나타난 결과로 분석했다. 그는 “이제 무분별한 산업보건 규제완화가 사회경제적으로 끼칠 수 있는 손해에 대해 새롭게 인식하고, 규제완화의 득실을 판단해 규제개혁을 추진하는 현명한 정책운용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한국산업안전보건공단에 따르면 산재로 인한 직간접적인 경제적 손실 추정액은 18조원에 이른다.

    배민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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