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장실서 용쓰다, 상가에서 곡하다가도 ‘꽝…’

공포의 뇌혈관질환…베스트닥터 허승곤 교수

창자가 꼬이는듯했다. 초등 4학년의 인내력으로는 참을 수가 없었다. 배를 부여잡고 방바닥을 잡고 뒹굴었다. 어머니는 아들을 업고 통행금지도 아랑곳 않고 500m를 한달음에 달렸다. 어머니는 “하나님, 우리 승곤이를…”이라고 기도했고, 아들도 덩달아 무의식중에 “하나님…”을 중얼거렸다. 어머니는 닫힌 내과의원의 문을 두드렸고, 잠결에 나온 50대 의사가 처방한 대로 주사를 맞고 약을 먹었더니 잠시 후 언제 그랬느냐는 듯, 씻은 듯 통증이 사라졌다.

초등 4학년생은 감동을 받았다. 부모에게 “의사가 되고 싶다”고 이야기했고, 틈만 나면 기도를 드려 마침내 의사가 됐다. 연세대 의대 세브란스병원 허승곤 교수(62)는 이렇게 의사가 되고 나서도 매일 기도 속에 산다.

“하나님, 부디 꽃다운 나이에 쓰러져 반신불수가 된 이 여학생을 일어나게 해주십시오.”

2013년 4월 어느 날 허 교수는 부인 권영주 씨(61), 간호사 등과 함께 손을 잡고 기도했다. 환자 김 모 씨(22. 당시 대학 3년 휴학)는 태어날 때부터 뇌혈관이 기형이었지만 모르고 있다가 갑자기 터져 몸 한쪽이 마비된 상태. 수술이 성공해도 일어날지를 장담하지 못할 정도였다.

허 교수는 부인에게 딸 같은 환자를 위해 기도를 해달라고 부탁했고, 권 씨는 집 근처 교회에서 기도하다가 정성을 얹기 위해 병원으로 달려왔다. 기도의 힘 덕분이었을까, 김 씨는 기적처럼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가을학기에 복학해 좁은 캠퍼스를 뛰어다니고 있다.

허 교수는 수술할 사람의 이름을 부인에게 전해서 집이나 교회에서 기도하게끔 한다. 부인은 병실에 가서 집적 환자의 손을 맞잡고 애로사항을 경청해서 남편에게 전하곤 한다. 허 교수는 아내의 의견을 경청해서 환자의 응어리를 풀어준다.

허 교수는 집안은 독실한 기독교 가문이다. 증조할머니는 경남 고성군의 고향에서 ‘예수쟁이’로 조리돌림을 당하다 충북 영동에 이사해 과수원을 일군 돈으로 영동제일교회를 세웠다. 3대째 목사를 4명 배출했고 허 교수의 선친 역시 목사다. 허 교수의 외동딸도 미국 사우스웨스턴 침례교신학대학원에서 목회자 공부를 할 정도로 신앙심이 깊은 기독교 가문이다.

허 교수는 오지에서 봉사활동을 하는 ‘선교 의사’가 꿈이었지만 하늘은 우선 그를 다른 용도로 썼다.

그는 1978년 의대를 졸업하자마자 선교사이자 두경부암 수술의 전문의였던 데이비드 실 박사가 운영하는 전주예수병원에서 수련생활을 했다. 당시에는 전주예수병원이 연세의료원에 편입될 계획이었던 데다가 병원에서도 신앙심 깊은 의사를 원했기 때문.

허 교수는 전문의 시험을 준비하던 때 어머니가 머리뼈에 암에 걸렸다는 날벼락 같은 소식을 들었다. 어머니는 1965년 은평구 응암동에서 고아원 ‘선덕원’을 설립해서 평생 봉사활동을 하다가 미처 자신의 몸을 챙기지 못했다. 어머니는 모교의 이규창 교수(75·현 명지병원 신경외과)가 세 차례에 걸쳐 수술했지만 결국 하늘의 부름에 응해야 했다. 허 교수는 전문의 시험을 준비하면서도 어머니의 간호에 신경 썼고, 부인 권 씨는 석 달 동안 지극히 시어머니를 병간호했다.

당시 이 모습을 잊지 않아서일까? 이 교수는 3년 뒤 허 교수가 군 복무를 마쳤다는 소식을 듣고 “나와 뇌혈관 수술을 맡아야겠다”고 전화를 걸어왔다.

이 교수는 뇌동맥의 벽이 약해져 꽈리처럼 부풀어올라 언제 터질지 모른 상태이거나 터진 병인 ‘뇌동맥류’의 수술에서 ‘전설의 대가’다. 이 교수는 1975년 국내 처음으로 현미경을 이용, 뇌동맥류를 클립으로 짚어 동맥 파열을 막는 수술에 성공했고 미국 교과서에서 ‘세계에서 수술 성적이 가장 뛰어나다’고 소개됐다. 허 교수를 비롯해서 강남세브란스병원 주진양, 인하대병원 박현선, 서울성모병원 신용삼 교수 등의 뛰어난 제자를 길렀다.

허 교수는 이 교수의 수제자로 함께 수술방에 들어가며 생존율 96%, 정상 회복률 84%라는 세계적인 치료성과를 내는 데 일등공신이 됐다.

허 교수는 지금까지 뇌동맥류 환자 2500명, 뇌정맥기형 500명을 수술하며 스승의 명성을 잇고 있다. 허 교수는 ‘수술 뒤 환자의 부작용이 있으면 안된다’는 스승의 가르침에 따라 자신의 이름을 내세우기 위해 수술을 남발하는 것을 경계하고 있다.

그는 스승처럼 일요일에도 아침에 회진을 돈다. 상당수 의사들이 아침에 1번 회진을 돌지만 허 교수는 저녁에도 회진을 돈다. 뇌출혈 환자는 언제 어떤 상황이 올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는 제자들에게 “생명에 대한 겸허함이 없는 의술은 기술에 지나지 않는다. 의사의 작은 실수, 잠깐의 방심이 곧바로 환자의 생명을 위험에 빠뜨릴 수가 있기 때문에 늘 긴장을 늦춰서는 안 된다”고 가르친다. 그는 “의사가 늘 스트레스를 받지만 환자와 가족의 불안감에 비할 수가 없다”면서 환자의 작은 부분에도 신경을 쓴다. 예를 들어 허 교수 환자의 진료 차트에는 환자의 거주 지역이 적혀 있는데 멀리 지방에서 올라온 환자에게 두 번 발걸음 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다.

허 교수는 뇌수술로 환자를 살리면서 ‘선교의사’의 꿈은 미뤘지만, 아예 접은 것은 아니다. 1996년부터 한 동안 매년 여름휴가 때에 우선 2~3일은 무의촌 의료봉사를 했다.

2009년에는 앙골라에서 안식월 3개월 중 2개월을 의료봉사와 선교활동을 하면서 보냈다. 전해에 세계보건기구(WHO) 이종욱 펀드를 받아 허 교수 밑에서 공부를 한 앙골라 의사 메얀다 이노센트가 “우리나라에 의술을 전해달라”고 요청하자 기꺼이 응한 것. 그는 부인과 이민가방 10여 개에 칫솔, 치약, 비누 등 생필품과 의약품을 채워 앙골라로 향했다가 공항에서 ‘보따리 장사’로 오해받아 3시간 동안 억류당하기도 했다. 이후 허 교수 부부가 다니는 우리들교회의 의사 출신 박행렬 목사(63), 장부영 사모(61)는 앙골라에 고아원을 지었다. 허 교수는 루마니아, 우크라이나, 몽골 등에서 우리들교회 식구들과 선교활동을 펼쳤으며 은퇴 후에는 평생의 벗인 박 목사 부부와 함께 ‘선교 의사’로서의 제2의 삶을 펼칠 계획이다.

뇌혈관질환 수술 베스트닥터에 허승곤 교수

허승곤 교수에게 물어본다

    권순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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