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자에 세심한 배려…감동 주는 7순의 ‘고수’

“학교와 병원의 내규를 고치느라 이제야 말씀드립니다.” 2008년 11월 연세의료원 박창일 원장(67)은 이듬해 봄 정년퇴임할 예정이었던, ‘갑상선 수술의 개척자’ 박정수 교수(70·외과)에게 계속 수술을 맡아달라고 간청했다. 영동세브란스병원에서 이름을 바꿔 새 출발하는 강남세브란스병원에서 계속 메스를 잡아달라는 것. 박 교수에게는 K, C병원 등에서 거액의 스카우트 제안이 와 있는 상태였다.

박 교수는 “갑상선 암환자를 위한 방사선동위원소 치료실 6개를 만들 수 있느냐?”고 물었고, 박 원장은 “당장 지시하겠다”며 전화기를 들었다. 박 교수는 연세의료원 128년 역사상 처음으로 정년퇴임과 동시에 재임용됐다.

박 교수가 강남세브란스병원에서 둥지를 틀자 전국에서 갑상선암 환자가 몰려왔다. 2008년 648건이었던 수술이 2010년에는 2201건으로 늘었다. 지금은 한 해 3000명 가까이 수술하는데 전국의 한 해 수술 3만 건의 10%에 해당한다.

박 교수는 “세브란스병원은 오로지 가난을 벗어나는 것이 꿈이었던 내게 의사의 가치를 알게 해 준 곳”이라면서 “기쁘게 제안에 응했다”고 돌이켰다. 박 교수는 고희를 넘긴 나이지만 얼핏 보면 50대처럼 보인다. 일밖에 모르는 열정이 가난의 흔적을 덮어 동안의 얼굴이지만 박 교수는 20대 중반까지 먹는 것, 자는 것을 걱정하며 하루하루를 보내야만 했다.

박 교수는 1943년 일본 오사카에서 태어났다. 부모는 일거리를 찾아 현해탄을 건너와 막일을 했다. 가족은 해방과 6·25 전쟁을 거치고 나서 부산 영도구에서 생활용품 장사를 하면서 정착했다. 그러나 박 교수가 초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집안이 쫄딱 망해서 빚쟁이를 벗어나 시골로 향해야만 했다. 그러나 박 교수는 떠나지 않았다. “어린 나이에 부모님과 형, 여덟 동생과 함께 가면 가난 때문에 내 삶이 끝장이라고 생각했든가 봅니다.”

박 교수는 친구의 집에서 기거하면서 친구의 공부를 돕는 방식으로 주거와 식사 문제를 해결했다. 중2때부터는 입주과외를 시작했다. 눈칫밥은 사치였다. 생존만이 중요했다. ‘고아 아닌 고아 생활’을 하면서도 학생회장, 교지 기자 등을 활발히 수행해서 박 교수의 형편이 어려운줄 모르는 사람이 많았다. 그는 ‘씩씩하게’ 벌면서 공부해서 명문 경남고를 졸업하고 연세대 의대에 입학했다. 고교 때 입주과외를 했던 집의 주인이 등록금과 1년 생활비를 대줬다.

박 교수는 의대 졸업 후 군복무를 마치고 ‘가난한 기억의 땅’을 떠나 ‘기회의 땅’ 미국으로 가려고 꿈꿨다. 당시 연세대 의대 졸업생 3명 중 2명이 미국으로 떠나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군대에 들어가던 해 북한 특수부대가 청와대를 습격하려고 기도한 ‘1·21 사태’가 터져 한반도가 일촉즉발의 비상상태에 돌입했다. 지금의 부인인 여자친구가 “1년 인턴을 끝나고 상황을 봐서 군대에 가면 어떻겠느냐”고 졸랐고, 그 소원에 따라 인턴을 먼저 했다.

“인턴도 천국이었습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숙식과 학비 걱정에서 해결됐습니다. 많지는 않지만 자유롭게 쓸 수 있는 7000~8000원의 월급도 받았지요.” 박 교수는 인턴을 마치고 군대에 입대하려고 했지만 스승 김춘규 교수(전 세브란스병원장·작고)의 ‘협박’에 이끌려 외과 전공의로 들어갔다. 박 교수는 한때 대장항문 질환, 소아외과 등을 놓고 평생 진로에 대해서 고민했지만 미국 MD앤더슨 암센터와 슬론캐터링 암센터에 연수를 다녀 온 뒤 “갑상선암만 보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갑상선 수술을 전공한 스승이 없었다. 그는 독학을 하다가 국제학회에서 책에 나오는 유명한 의사를 보면 무조건 ‘또르르’ 달려가 ‘꾸벅’ 인사하고 궁금한 점을 물었다. 특히 세계 최초의 갑상선전문병원인 노구치병원의 노구치 박사와 일본 도쿄여자의대 후지모도 교수는 박 교수를 제자처럼 여기고 수시로 논문을 보내줬다. 박 교수는 미국, 일본, 대만, 유럽에 ‘수술고수’가 있다면 몇 달을 벼러 수술방을 찾아가 ‘눈동냥’을 하며 수술법을 익혔다.

박 교수는 이렇게 배운 수술법을 독자적 연구로 발전시키며 지금까지 2만 여명을 살렸다. 복장뼈(흉골)에서 2㎝ 위를 목주름에 따라 절개해서 수술한 다음, 원하는 환자에게는 레이저를 쏘아 수술 흉터가 거의 보이지 않는 수술법을 개발했다. 지금까지 무려 500여 편의 논문을 썼고 이 가운데 200여 편을 국제 권위지에 발표했다.

그는 대한갑상선학회, 대한갑상선내분비외과학회 등을 만들었고 아시아내분비학회 회장, 대한외과학회의 이사장 등을 맡았다. 세계내분비외과학회, 미국외과학술원, 미국두경부외과학회 등에서 정회원으로 활약하고 있기도 하다.

박 교수는 매일 오전 4시 무렵 일어나서 음악을 감상하고 인터넷 논문을 체크한다. 박 교수에게는 음악이 유일한 취미다. 대학 시절 당구장 한 번 못가 봤고 미팅 한 번 못해봤지만 라디오에서 나오는 음악은 무료였기에 붙은 취미다. 그는 수술실에서도 아늑한 음악을 틀러놓은 뒤 환자에게 “걱정 말고 푹 자라”고 다독거리곤 칼을 잡는다. 아침에 체크한 논문 리스트는 전문의에게 전한다. 외과뿐 아니라 영상의학과, 내분비내과, 방사선종양학과 등의 의사들도 이 논문을 돌려 읽는다. 최근에는 다른 병원 의사들에게도 ‘박정수의 논문 뉴스’는 화제다.

박 교수는 최근 글을 쓰느라 밤을 지새우곤 한다. 2011년 그의 환자들이 함께 만든 온라인 카페 ‘거북이 가족’에 올릴 글들이다. 카페 이름은 갑상선암 중 대부분을 차지하는 유두암이 천천히 진행된다고 해서 붙었다. 박 교수는 의료진이 환자의 고민을, 환자가 의료진의 고충을 좀 더 알게 되기를 꿈꾸며 글을 쓴다. 정성 들여 고른 음악 동영상도 올린다. 박 교수가 좋아하는 차이코프스키, 라흐마니노프, 비발디, 쇼팽, 브람스 등의 음악에서부터 루도비코 에이나우디, 아스토르 피아소야 등 현대 작곡가의 음악, 최백호의 가요까지 경계가 없다. 카페 운영을 돕는 간호사가 환자의 질문에 “교수님, 이 질문은 제가 답할 수가 없습니다”라고 전하면 꼼꼼하게 응답 글을 써서 올린다. 5500명을 넘은 회원 가운데에는 다른 병원 의사와 환자들도 적지 않다.

거북이 가족에는 박 교수와 함께 일하는 간호사들이 함께 쓴 글도 올라와 있다. 이 글에 따르면 박 교수는 세심하기까지 하다. 박 교수는 진료 책상 위의 바구니에 사탕을 가득 채워 놓으라고 지시한다. 처음 온 간호사는 박 교수가 70대에 단 것을 좋아해서 그런 줄 착각한다. 그러나 갑상선암에 걸린 여성 환자가 데리고 온 아이에게 주기 위한 것이다. 간호사들에 따르면 박 교수는 아이들이 진료에 방해가 될 정도로 떠들어도 싫은 내색을 전혀 하지 않는다.

어떨 때에는 박 교수가 밀려든 환자 때문에 진료가 늦게 끝날 때 먼저 문을 닫으려는 초음파실에 직접 뛰어나서 검사를 직접 부탁하기도 한다. 한 간호사는 “환자가 VIP나 지인인 줄 알았는데 지방에서 올라온 환자들이 두 번 오지 않게 하도록 배려한 것을 알고 코끝이 찡했다”고 말했다. 간호사들의 눈에 박 교수는 하루 25시간을 무쇠 팔, 무쇠 다리로 일하는 ‘마징가 Z’로 비친다. 박 교수가 갑상선암 환자들이 몸에 암세포를 지닌 채 불안해하는 것을 하루라도 빨리 풀어주려고 뛰어다니기 때문에 주위의 사람들은 박 교수를 ‘거북이암을 고치는 토끼 의사’라고 부른다. 

’갑상선 수술’ 베스트닥터에 박정수 교수

박정수 교수에게 물어본다

    이성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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