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자에게 꺼낼 첫마디를 고민하는 의사

성균관대 삼성서울병원 호흡기내과 권오정 교수(56)는 인상이 온화하다. 환자뿐 아니라 동료 의사나 제자들에게도 늘 친절하다. 그는 환자들에게 진료결과에 대해 어떻게 말할지 늘 신경 쓴다. 암이 아니면 우선 “다행히 암이 아닙니다”라고 말문을 열고 다른 이야기를 덧붙인다. 후배와 제자 의사들은 권 교수가 환자들을 대하는 행동 하나하나, 말 하나하나를 메모하면서 배운다.

주위의 의사들은 권 교수에게서 그가 아버지처럼 모셨던 스승, 고 한용철 박사의 체취가 느껴진다고 말한다. 한용철 박사는 우리나라 호흡기내과학의 태두로 대통령주치의. 서울대병원장, 삼성의료원장 등을 역임한 의료인이다.

1989년 한 박사는 당시 전임의 1년차인 권 교수를 조용히 불렀다. 스승은 “네가 들으면 섭섭할지 모르겠지만 나를 따라서 삼성의료원에 가야겠다”고 말했다. 권 교수는 경기고를 수석졸업하고 서울대 의대에 입학해서 우수한 성적으로 내과 전공의 과정을 거쳤다. 군의관도 최고 핵심 보직에서 지내고 나서 서울대병원으로 돌아왔기 때문에 주위에서는 ‘가문의 영광’인 서울대 교수가 될 것으로 예상했다. 당시 서울대 교수와 신설 대학병원 교수의 명예에는 큰 차이가 있었지만, 권 교수는 ‘존경하는 스승의 뜻’을 한 치 머뭇거림 없이 따랐다.

그는 허허벌판이었던 서울 강남구 일원동 병원 터로 향했다. 병원 건설현장의 삼성 임원에게 이력서를 제출하고 면접도 없이 ‘합격’했다. 그리고 스승의 명에 따라 영국 왕립 브롬톤 병원으로 향했다. 심장과 폐 분야의 세계적 병원에서 ‘최고의 수준’을 몸에 배 오라는 것이었다.

권 교수는 브롬톤 병원의 피터 반스 교수로부터 연구 과제를 받았다. 미국의 제이 A 나델이 호흡기질환에 영향을 미치는 효소에 대해서 논문을 냈는데, 이 분야에 대해서 좀 더 깊이 파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델의 실험은 재연이 안됐다. 넉 달 사이 76㎏인 몸무게가 63㎏으로 빠졌지만 실마리가 보이지 않았다. 마침 같은 병원 소아심장내과 교수로 내정된 선배, 이흥재 교수가 방문했다. 선배는 후배의 ‘자연 다이어트’가 안쓰러워 이유를 묻더니 조용히 웃었다.

“그런 것 때문에 고민했구나. 다른 것은 할 것이 없나? 미국이나 유럽에서는 제자가 스승이 시킨 것보다 더 좋은 아이디어를 연구하겠다고 하면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문화가 있다.”

권 교수는 반스 교수에게 면담신청을 하고 “기도 상피세포의 사이토카인에 대해 연구하고 싶다”고 조심스럽게 마음을 털어놓았다. 반스는 몇 초 동안 권 교수를 바라보더니 입을 열었다. “Good Idea!”

권 교수는 기도세포 배양이 잘 안되자 인근 제약회사 연구원에게까지 도움을 받아 문제를 해결했다. 사람의 기도조직을 얻기 위해 흉부외과 의사를 졸랐다. 일주일에 한 두 번은 연구실에서 잤다. 토, 일요일에도 실험실을 지켰다. 어느덧 연구실에 기도 상피세포 배양 및 사이토카인 연구 시스템을 구축했다. 2년 반 동안 주저 논문 4편을 비롯해서 17편의 논문을 국제학술지에 발표하고 ‘특급 연구자’가 돼 귀국할 수가 있었다.

일원동에서는 병원 건물이 거의 완성돼 있었다. 권 교수는 채수웅 삼성서울병원 개원준비실장 과 함께 병원 개원을 준비했고 병원의 호흡기내과 과장, 진료의뢰센터장, 적정진료운영실장, 기획실장을 거치며 삼성서울병원이 ‘친절한 새 병원문화’를 퍼뜨리며 세계적 병원으로 성장하는 데 기여했다. 성균관대 의대 학장으로 연구와 교육 수준을 올리는 데에도 힘을 보탰다. 그는 지난해 말 심영목, 이경수, 박근칠, 안용찬 교수 등과 함께 세계적 수준의 폐암 진료 성과를 인정받아 삼성의료원에서는 처음으로 ‘자랑스러운 삼성인상’을 받았다.

권 교수는 폐암의 조기발견과 다재내성결핵 및 광범위내성결핵 치료에서 국내 최고로 꼽힌다. 결핵의 이웃사촌인 ‘비결핵성 항산균’ 연구에서 세계적으로 권위를 인정받고 있다. 지금까지 358편의 논문을 발표했고 절반 이상이 국제학술지에 게재됐다.

권 교수는 1999년 국내 처음으로 저선량 컴퓨터단층촬영(CT)으로 폐암을 조기 진단하는 방법을 도입해 수술이 가능한 조기진단율을 10여 년 전의 20%에서 30~40%까지 끌어올린 주인공이다. 그는 폐암뿐 아니라 난치성 결핵의 치료에서 세계적 성과를 내고 있다. 항생제가 잘 듣지 않는 다제내성결핵의 치료율은 83%로 외국 유명 병원의 60%대보다 훨씬 높다. 그는 또 재작년 결핵의 사촌 격인 ‘비결핵성 항산균’ 중 마이코 박테리움 압세수스라는 세균에게서 특정 항생제에 내성이 생기는 메커니즘을 세계 최초로 밝히는 등 비결핵성 항산균의 연구와 치료에서 국제적으로 인정을 받고 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최고라는 사실에 손사래를 짓는다. 서울대 한성구, 김영환 교수와 한림대 정기석 교수, 서울아산병원 고윤석, 이상도, 심태선 교수 등에 비해 뛰어나지 않으며 비결핵성 항산균 연구도 같은 병원의 고원중 교수 덕분에 가능하였고 같은 병원의 김호중, 정만표, 서지영 교수의 도움이 커다란 힘이 되었다고 말한다.

권 교수는 인문학적 소양이 몸에 밴 의사이기도 하다. 매일 논조가 전혀 다른 두 신문을 보고 출근하며 책장에는 인문학 서적이 빼곡히 꽂혀 있다. 장모는 고 박완서 작가이고, 형은 권오곤 유고슬라비아 국제형사재판소 상임재판관이다.

권 교수는 대학 시절 의대 연극반 활동이 자신이 ‘이과 범생’을 벗어나는 데 도움이 된 것으로 믿고 있다. 그는 의대 동기생인 한준구, 김상윤, 조재원 등 친구들과 미팅을 가려다가 남는 시간에 연극반 동아리에 갔다가 덜컥 연극반원이 됐다. 예과 2학년 때 ‘세일즈맨의 죽음’의 주인공 윌리 로만 역을 맡아 남산드라마센터에서 공연하기도 했다.

“연극인은 연극을 한 편 끝날 때마다 인생을 한 편 더 산다는 말이 있지요. 게다가 연극반에는 독특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이런 경험이 다양한 종류의 환자를 돌보는 데 도움이 되는 듯합니다. 물론 연극에 너무 빠져 혈액학 공부를 제대로 안 해서 지금도 이 분야에서 쩔쩔 매지만….”

연극은 삶의 중요한 한 축(軸)도 바꿔 놓았다. ‘세일즈맨의 죽음’에서 주연을 맡았을 때 소품을 담당하던 여학생과 역할의 중요성에 대해 격론을 벌였다. 당사자가 바로 박완서 작가의 셋째 딸이자 평생 친구, 학문의 동지인 부인 호원경 서울대 의대 생리학과 교수다.<캐리커처=미디어카툰 최민>

 

● 어떻게 뽑았나

● [웹툰] 권오정 교수의 결핵이야기 

● 권오정 교수에게 묻다

 

    이성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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