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V 환자 보호에 의료진 안전은 뒷전?

HIV 환자 보호 규정 때문에 의료진의 안전이 위협받는 상황이 벌어질 수 있어 논란이 일고 있다.

최근 한 의사가 HIV 바이러스 감염이 의심되는 환자의 정보를 다른 의사에게 전파했다가 법원의 유죄 판결을 받았다.

이와 관련 의사들은 해당 법 규정이 의료현실과 괴리가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의료인에 한해 HIV 감염 정보를 알릴 수 있도록 법을 개정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반면, HIV 관련 단체와 질병관리본부는 현행법이 의료현장과 괴리된 부분이 있지만 잘못된 인식에서 발생하는 HIV 감염인 피해를 막기 위해 현행법을 유지해야 한다는 견해를 보였다.

■타 병원에 HIV 감염 의심 알린 의사 유죄 선고

서울중앙지법 형사31단독 양석용 판사는 9일 후천성면역결핍증 예방법 위반 혐의로 기소된 한 개인병원 원장 A씨에게 벌금 20만원의 형을 선고유예했다.

양 판사는 판결문에서 “HIV에 대한 이해 부족과 그릇된 태도 탓에 여전히 감염인에 대한 사회적 편견이 있다”며 “의료인에 대한 전파 가능성 차단과 피해자가 감염인인 사실이 알려져 받을 수 있는 사회적 고립 등의 피해 사이에 법의 균형성이 인정된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시했다.

선고유예는 유죄는 인정하지만, 죄가 가벼워 형의 선고를 미루는 것이다. 법원에서도 의료진의 처지를 반영한 판결을 내린 것으로 볼 수 있지만, 현행법이 유지된다면 앞으로 유사한 사례가 다시 발생할 수 있는 상황이다.

병원장 A씨는 지난해 다른 질병 치료를 위해 찾아온 환자 B씨의 수술에 앞서 진행한 혈액검사에서 B씨의 HIV 수치가 높다는 것을 알게 됐다. 이에 병원장 A씨는 애초 B씨에 대한 진료의뢰서를 발부했던 다른 병원 의사에게 B씨의 HIV 수치가 높게 나온 점을 알린 혐의로 기소됐다.

현행 후천성면역결핍증 예방법상으로는 HIV 감염인을 진단하거나 진료·간호한 사람은 재직 중은 물론 퇴직 후에도 감염인의 정보를 누설할 경우 3년 이하의 징역이나 1000만원 이하의 벌금형에 처하게 돼 있다.

그러나 HIV 감염 사실을 모르고 수술 등의 과정에서 HIV 감염 피해가 발생할 수도 있다는 점에서 대책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이와 관련 대한의사협회 노환규 회장은 11일 자신의 소셜네트워크 사이트에 해당 사건을 언급하고, 의협 차원에서 소송을 감당해야 할 사건이라고 지적했다.

노 회장은 “환자정보를 공유한 이유는 환자의 수술을 맡게 될 병원의 의료진과 환자를 보호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라면서 “의사의 신원이 파악되는 대로 협회에서 추후 소송을 감당해야 할 사건으로 생각한다”고 게시글을 올렸다.

현재 노환규 회장의 게시글에는 “의사가 (사실을) 알리지 않고 다른 감염자가 생겼을 때 책임은 누구한테 지울까” “의사, 간호사는 에이즈에 걸려도 상관없다는 건가” “HIV 감염도 진단 아닌가. 약국에 보내는 처방전에는 진단명을 쓰라면서 의사 간 의뢰에는 진단명을 빼라니” “그럼 이제는 진료 의뢰서에 아무 의료 정보 없이 보내야 하나. 처방전에 진단명 들어가도록 한 것도 빼고” 등의 댓글이 올라와 있다.

■의료현실과 동떨어진 법 개정해야

의사들은 이번 사례를 두고 후천성면역결핍증 예방에 관한 법이 일선 의료현장과 동떨어졌다는 점을 지적한다.

의협은 현재 이번 사건의 당사자인 해당 의사의 소송을 진행한 법무법인을 파악하고, 해당 의사에게 의협 차원의 소송 지원을 제안한 상황이다. 현재 후천성면역결핍증 예방법과 일선 의료현장과의 괴리가 크다는 이유다.

의협 송형곤 대변인은 “일선 개인병원에서 진행하는 HIV 감염 검사는 양성과 음성만 판별할 수 있고, 양성이라 하더라도 큰 병원에서 진행하는 정밀검사에서 위양성(가짜 양성)으로 판정되는 경우도 있다”면서 “보통 일선 개인병원에서는 HIV 검사에서 양성이 나오더라도 환자를 큰 병원에 보내면서 진료소견서에 HIV 양성 여부를 적거나 환자에게 알리는 경우는 별로 없다”고 지적했다.

HIV에 대한 일반인들의 두려움과 공포가 크고 양성이었더라도 정밀검사에서 음성으로 판정될 수 있는 위양성의 가능성 때문에 이를 알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만, 환자가 찾아갈 병원의 의료인에게는 전화 등의 방법으로 해당 사실을 알려 준비를 할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이 송 대변인의 설명이다.

송 대변인은 “사회적으로 HIV를 대하는 정서상, 완벽하지 않은 검사에서 양성 판정을 받은 환자에게 정밀검사를 받기 전에 ‘양성’ 사실을 알리는 것은 환자에게도 의사에게도 곤혹스럽다”면서 “다만, 만일에 대비해 환자가 찾아갈 병원에 알려 진료 장비를 특별히 준비하도록 하고 의사, 간호사, 환자 등의 접촉을 주의할 수 있도록 하는 등의 조치를 취하는 것이 일반적”이라고 말했다.

송 대변인은 이어 “이번 사례도 법리적으로는 타당하지만, 일선 의료현장의 실태를 파악하지 못한 사례”라면서 “의협 차원에서도 그동안 간과했던 이런 부분을 개선하기 위해 앞으로 법 개정과 관련한 활동을 벌일 예정”이라고 강조했다.

■현실과 괴리 있지만… 홍보 강화 방침

질병관리본부는 현행법이 현실과 괴리가 있는 점도 있지만, HIV에 관한 사회통념이 잘못된 점이 있는 만큼 의료인에 대한 교육을 강화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고 있다.

질병관리본부 관계자는 “호흡기 감염과 같은 전염병은 호흡을 통해 전파되지만, HIV는 수술과 같은 침습적인 행위나 수혈로 전파가 되기 때문에 의료현장에서도 이에 관한 정보를 알리지 않는 것이 규정”이라고 말했다.

일상적인 접촉에서 감염 확률이 낮은 질병인 만큼 환자 정보의 공개를 권장하지 않는다는 설명이다. 침습적인 처치를 해야 할 경우에는 시술 전에 검진하게 돼 있는 만큼, HIV 감염 정보를 굳이 알리지 않는 것이 환자 권리를 보호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이 관계자는 또 “일상적인 접촉으로 감염되지 않는 HIV에 대해 의료인들이 이처럼 정보를 교환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HIV에 대한 공포와 편견이라는 것이 HIV에 관한 세계적 추세나 HIV 관련 단체의 견해”라면서 “현행법이 의료현실과 맞지 않는 부분이 있기는 하지만, 일반인이나 의료인들이 HIV에 대한 편견과 공포로 HIV 감염인을 피하지 않을 수 있도록 하는 홍보를 강화하자는 게 HIV 관련 단체와 질병관리본부의 방향”이라고 전했다.

    박진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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