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 닥터]‘나는 나의 능력을 믿었다’는 ‘코리안 특급’ 박찬호

지난주 스포츠계 최대의 화제는 ‘코리안 특급’ 박찬호의 은퇴였다. 17년간의 메이저리그와 1년간의 일본프로야구 생활을 끝내고 올 초 고향 팀 한화에 입단한 박찬호는 40세가 되는 내년에도 선수 생활을 지속할 듯 보였으나 결국 은퇴를 선언하고 말았다.

그동안 박찬호는 몇 년 간 더 선수생활을 할 뜻이 있음을 수시로 내비쳤다. 하지만 하위권 탈출을 위해 코칭스태프를 전면 개편하는 등 구단의 쇄신 분위기 속에서 박수 받으며 떠날 수 있는 때를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 사실 많은 팬들은 박찬호가 뛰는 모습을 더 보고 싶었을 것이다.

박찬호야말로 IMF 경제위기 때 ‘골프여왕’ 박세리와 함께 국민에게 희망과 꿈을 주었던 스포츠스타로 경기장에서 그의 움직임 하나하나가 관심의 대상이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나의 능력을 믿으며 어떠한 어려움이나 고난도 이길 것이다.’ 박찬호의 홈페이지 메인화면에는 최근까지 이런 글이 올라 있었다.

그의 이런 다짐처럼 성실한 자세와 꾸준한 노력으로 그는 최고의 스타가 됐다. 최선을 다한 그에게는 행운도 함께 했다. 1994년 박찬호는 마이너리그를 거치지 않고 메이저리그로 곧바로 진출했다. 마이너리그를 거치지 않고 메이저리그로 직행하는 일은 그야말로 운이 따르지 않고는 힘든 일이다.

박찬호는 1965년 메이저리그 신인 드래프트가 생긴 이후 마이너리그를 거치지 않고 메이저리그에 곧바로 진출한 18번째 선수로 1994년 LA 다저스 유니폼을 입었다. 미국인도 아닌 그가 이렇게 메이저리그 유니폼을 바로 입을 수 있었던 것은 당시 LA 다저스의 구단주였던 메이저리그의 거물 피터 오말리의 눈에 들었던 행운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LA 다저스에서 시작해 텍사스, 샌디에이고, 필라델피아, 뉴욕 양키스, 피츠버그 등 여러 팀을 거치면서도 큰 부상을 입지 않고 꾸준히 활약해 메이저리그 동양인 투수 최다 기록인 124승을 거둔 것도 운이 뒤따랐던 덕분이다. 불운이 행운으로 바뀐 경우도 있었다. 1991년 공주고 3학년생이던 박찬호는 연고지 프로팀으로부터 ‘와도 그만 안와도 그만인 선수’로 낮은 평가를 받았다.

당시 박찬호에 대한 지명권은 한화의 전신인 빙그레 이글스가 갖고 있었다. 하지만 빙그레 관계자들에게 박찬호는 그리 매력적인 스카우트 대상이 아니었다. 151㎞까지 던지는 강속구 투수였지만, 제구력이 안 좋아 들쭉날쭉한 플레이를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박찬호가 3학년이 되자 한양대가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고, 크게 필요하지는 않았지만 연고지 선수를 대학 팀에 빼앗기기 싫었던 빙그레 측에서는 다시 그에게 접근했다. 빙그레 측에서 박찬호에게 계약금으로 제시한 금액은 2000여만 원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고교 졸업 선수 중 대어급들에게는 억대의 스카우트 비가 제시되는 상황이었으니 빙그레의 제안이 박찬호의 눈에 차지 않았다. 결국 아버지와 상의한 박찬호는 대학 행을 택했고, 1993년 세계 대학생들의 스포츠축제인 유니버시아드대회에서 그의 가능성을 눈여겨 본 LA 다저스에 스카우트 돼 한양대 2학년을 마치고 메이저리그에 입성하게 됐다.

다저스 유니폼을 입을 때 120만 달러(약 13억원)를 받았던 박찬호는 8년 후 2002년 텍사스 레인저스에 입단할 때는 5년간 6500만 달러(약 704억원)에 계약했다. 2000여만 원에 불과했던 그의 몸값이 무려 3000배 이상 뛴 것이다.

박찬호가 고교생 때 빙그레의 제의를 받아들여 국내 프로무대에서 뛰었다면 오늘과 같은 대스타가 될 수 있었을까. 자신의 능력을 믿으며 고난과 시련에 맞선 박찬호는 그의 운명까지 바꿔가며 ‘코리안 특급’으로 한국 야구사에 이름을 남기게 됐다.

    권순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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