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아버지와도 같은 고창순 선생님

2012년 8월6일, 우리나라 의학계의 거목이신 고창순 교수님이 타계하셨다. 서울의대 명예교수인 선생님은 핵의학, 내분비학에서 대가를 이루어 많은 제자를 키우신 진정한 ‘보스’이셨고, 의료정보학, 의용생체공학, 노인병학 분야를 우리나라에 소개하고 시작한 개척자이셨다.

선생님은 넓은 시야와 사물의 핵심을 찾는 안목을 가지고 계셨다. 이 같은 능력으로 우리나라에서 의료의 새 장이 열릴 때마다 선생님이 주도하시곤 했다. 선생님은 사람 만나기를 좋아하고 진심으로 대해, 의료계 안팎에 넓은 인맥을 가지고 계셨다. 사교적인 성격으로 1978년 법인체로 출발한 서울대병원의 제1, 2부원장을 맡으면서 이 거대한 조직이 안정화되는 데 크게 기여하셨다. 문민정부에서 김영삼 대통령의 주치의를 맡으셨고, 정부가 의과학 연구를 지원하는 제도를 만들게 하였다.

무엇보다도 물심양면 전방위적으로 정성을 들여 제자를 키우셨다. 많은 제자들이 감화를 받아 선생님을 ‘학문적 아버지’로 여기면서 생활하고 있다. 12월31일 한 해를 끝내는 날 제자들과 함께 그 해를 깨끗이 보내는 의미로 같이 목욕을 하곤 했다. 새해에는 모두들 선생님 댁으로 세배를 갔다. 당시의 관습으로 모든 내과 전공의가 다 모여들었다. 100명이 넘는 제자들의 식사를 챙기느라 사모님께서 특히 고생하셨다.

개인적으로 처음 만날 때부터 선생님의 소탈한 인품을 느낄 수 있었다. 한번은 옆에서 식사하는 나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밥 잘 먹는 사람을 좋아한다’고. 잘 먹는 사람은 자연히 건강해져 일과 공부를 잘하게 되므로 좋아한다는 의미였다. 이렇게 식견과 안목이 남달랐다. 관습적인 태도나 생각에서 벗어나 사물의 핵심을 꿰뚫는 지혜와 사고능력을 가지고 계셨다.

무엇보다도 선생님은 따뜻하셨다. 항상 우리를 격려하셨고, 제자를 위해 당신이 희생하는 일을 밥먹듯 하셨다. 부원장으로서 바쁘신 가운데에도 제자들이 소원해지면 섭섭해하셨고, 진료와 연구에서의 어려움을 해결해주려고 즐겨 노력하셨다. 지도학생인 일개 의대생의 고민을 밤새 들어주며 의논해주신 적도 있다.

우리나라 초창기의 양의사이셨던 아버님을 따라 의학에 입문한 선생님은 천성적인 의사였다. 조금이라도 연줄이 있는 환자는 가족처럼 돌봐주셨다. 남을 도와주기를 즐겨 선생님 방 앞에는 항상 다급한 사람들이 줄을 서 있었다. 선생님의 생활신조가 ‘하루에 한 사람 돕기’인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나 제자 교육에는 철저하셨다. 내가 인턴 때에도 핵의학 책을 주며 공부시키고, 전공의 2년차에 신축 병원의 핵의학과가 본격적으로 가동될 때 심장핵의학, 동적 영상 분석 등에 사용하는 컴퓨터 교육을 내가 잘 받도록 여러 전문가에게 부탁하셨다. 제자들의 연구가 부진한 경우에는 집에서 이불보따리를 가져와 연구실에서 같이 동숙하면서 격려하셨다.

제자의 성공을 선생님처럼 기뻐한 교수는 없을 것이다. 신축 병원의 초대 부원장을 맡고는 진료와 연구의 대부분을 제자에게 넘겨주셨다. 그 성과나 명예도 선생님이 차지하지 않았다. 선생님은 여건과 기초를 마련하고 제자들이 마무리해 열매를 따가도록 하셨다. 덕분에 여러 제자가 서울대를 비롯한 유수 대학의 교수가 되었다.

아마 제일 혜택을 많이 받은 사람이 나일 것이다. 보잘것없는 능력을 가진 제자에게 좋은 여건을 마련해주고, 기회를 주고, 교육과 교정을 해주고, 방패가 되어 주시면서 조금이나마 업적을 이루게 했다. 그러고는 모든 영광은 나에게 주셨다. 마치 자식에게 재산을 조건 없이 넘겨주듯이.

지난 35년간 나는 은혜만 받아왔다. 제대로 보답을 못했는데 선생님은 이 세상에 안 계신다. 그러나 남을 위해 그토록 노력 봉사를 하셨기에 이제 편히 하나님과 함께 계실 것이다. 다시 만나 뵐 때까지 선생님을 본받아 생활하리라 다짐한다. 선생님의 명복을 기원합니다.

정준기 서울대병원 핵의학과 교수 / 의학역사문화원장

    코메디닷컴

    저작권ⓒ 건강을 위한 정직한 지식. 코메디닷컴 kormedi.com / 무단전재-재배포, AI학습 및 활용 금지

    댓글 0
    댓글 쓰기

    함께 볼 만한 콘텐츠

    관련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