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 영웅 손기정 스토리

김화성의 종횡무진 육상이야기 ⑩

1945년 광복 후 손기정 선생(1912~2002)은 묵묵히 마라톤 후진양성에만 매달렸다.

정치 쪽에서 유혹이 많았지만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전국의 꿈나무 20여명을 뽑아

서울 안암동 자신의 집에 밥을 먹여가며 훈련을 시켰다. 훈련은 매일 새벽 장독대의

태극기 아래에서 애국가를 부르는 것으로 시작됐다. 수시로 김구 선생, 이범석 장군

등을 모셔다가 민족정신을 북돋는 강연을 듣기도 했다.

제자 서윤복(1923~)은 “손 선생님이 우리 합숙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여기저기

뛰어다니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손 선생님은 우리들에게 쌀밥을 실컷 먹을 수 있도록

해줬기 때문에 너도나도 서로 들어가려고 했다”고 말했다.

1947년 서윤복이 보스턴마라톤에서 2시간25분39초의 세계최고기록으로 우승했다.

손 선생이 1935년 11월 도쿄에서 세운 세계최고기록(2시간26분42초)을 제자 서윤복이

경신한 것이다. 이 기록은 1952년 6월 영국의 제임스 피터스에 의해 깨졌지만 결과적으로

한국인 스승과 제자가 17년 동안 세계기록을 보유하고 있었던 셈이다.  

1950년 보스턴마라톤에선 역시 손 선생이 길러낸 함기용, 송길윤, 최윤칠이 1,2,3위를

휩쓸었다. 1952년 헬싱키올림픽에서 최윤칠이 4위, 1956년 맬버른 올림픽에선 이창훈이

4위를 기록했다. 모두 손 선생의 작품이었다.

손 선생과 황영조는 체격이나 성격에서 닮은꼴이다. 손 선생과 황영조는 가슴이

두터운데다 마라토너로서 이상적인 체격(167cm, 55kg)을 타고 났다. 발목도 가늘고

얼굴도 직사각형 모습이다. 두 사람은 성격도 활달하다. 손 선생은 농담도 잘하고

황영조는 방송 해설을 할 정도로 어디가나 화제를 뿌린다.

하지만 손 선생이 피눈물 나는 노력을 하지 않았다면 베를린올림픽마라톤 우승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다리에 모래주머니를 매달고 달리는 가하면, 베를린올림픽선수촌에서

새벽에 남몰래 일어나 별도훈련을 했다. 조금이라도 더 빨리 달리기 위해 신발 바닥을

깎아내기도 하고, 가위로 러닝셔츠를 도려내고 팬티를 잘라내기도 했다.

손선생은 달리고 도 달렸다. 학교에 오갈 때뿐만 아니라 압록강변의 뚝, 모래

벌 등 아무 곳이건 가리지 않았다. 그의 단벌옷은 늘 땀으로 절어 냄새가 코를 찔렀다.

어머니는 아들이 달리기보다는 공부에 매진하기를 바랐다. 그래서 아들에게 일부러

잘 벗겨지는 여자고무신을 신게 했다. 하지만 손기정 선생은 여자고무신 위를 새끼줄로

묶어 벗겨지지 않도록 하고 달렸다. 새끼줄에 쓸려서 발목에 피가 배어나오는데도

달리기를 그만두려하지 않았다. 손기정 선생은 “내가 달리기를 하게 된 것은 돈이

한 푼도 안 들기 때문이었어. 만약 스케이트를 살 수만 있었다면 스케이팅선수가

됐을 거야”라고 말했다. 집이 너무 가난해서 스케이트를 하고 싶었지만 돈이 안

드는 달리기를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손 선생은 늘 배가 고팠다. 그럴 땐 냉수로 배를 채우고 달렸다. 어느 땐 배가

너무 고파 도저히 달릴 수조차 없었던 적도 있었다. 생전에 손 선생은 “난 배만

부르면 반드시 1등을 했어. 그 당시 밥만 충분히 먹고 달렸다면 기록이 더 좋았을

거야. 그런데 요즘 후배들은 거꾸로야. 조금만 배가 부르면 달리지 않으려고 한단

말이야. 1등 해본 사람도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야 1등을 할 수 있는 법인데…”라며

탄식을 했다.

손 선생이 태극기를 난생 처음 본 것은 베를린올림픽에서 우승한 바로 직후였다.

당시 두부공장을 하며 베를린에 살던 안중근선생 사촌동생 안봉근이 손 선생과 3위를

차지한 남승룡 선생(1912~2001)을 은밀히 집으로 부른 것이다. 안봉근은 그들을 다짜고짜

서재로 데려가더니 “이것이 태극기다. 우리 조국의 국기다.”라며 벽에 걸린 ‘아름다운

무늬’를 가리켰다. 손 선생은 “그때 뜨거운 피가 끓어오르며 한순간 숨이 멎는

것 같았다”고  말했다. 그 말할 수 없는 감격에 온몸이 감전됐고 우리민족은

저 태극기처럼 면면히 살아 결코 죽지 않을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는 것이다.

1932년 손 선생은 신의주에 있는 동익상회 점원으로 일하며 하루도 빠짐없이 압록강변을

달렸다. 그러다 그해 봄 제2회 동아마라톤에 참가하기 위해 서울에 올라왔다. 숙소는

동익상회 주인인 공정규씨의 배려로 마침 그의 저택이 있는 광화문 부근에 잡았다.

공정규씨는 공안과원장과 한글타이프라이터 발명가로 유명한 공병우박사의 부친이다.

당시 대회는 광화문 동아일보사 앞을 출발해 영등포를 돌아오는 14.5마일(약 23.6km)

코스에서 펼쳐졌다.    

대회 하루 전, 손 선생은 혼자 코스답사에 나섰다가 그만 길을 잃었다. 마포와

영등포를 잘 구분하지 못해 끝내 반환점이 어디인지 찾지도 못한 채, 밤늦게 간신히

공 박사 댁에 돌아올 수 있었다. 결국 그것이 문제가 됐다. 대회가 열린 3월21일,

손 선생은 삼각지까지 기세 좋게 선두로 달렸다. 그러나 막상 삼각지에 이르자 그곳

여러 갈래 길 중에서 도무지 어디로 가야할지 알 수가 없었다. 엉거주춤 제자리에서

망설이고 있는 사이 뒤따라온 변용환이 앞서나갔다. 도리 없이 그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결국 손 선생은 영등포 반환점까지 그렇게 변용환선수를 앞세우고 갔다. 변용환

1시간21분54초로 대회 신기록 우승. 손기정 1시간25분25초 준우승. 그러나 손 선생은

그 이듬해 제3회동아마라톤(광화문~청량리~망우리~광화문 15마일)에선 1시간24분03초로

당시 1인자 유해붕을 27초차로 제치고 우승을 차지했다.

손기정은 1912년 8월29(음력)일 한반도의 서북쪽 끝, 옛 만주에 접해 있는 신의주에서

아버지 손인석(1875~1935)과 어머니 김복녀(?~1941) 사이의 3남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잡화점을 운영했지만 보잘 것이 없었다. 어머니가 머리에 일용 잡화를

이고 행상을 해야만 겨우 먹고 살수 있었다. 어린 손기정도 방과 후에는 참외, 옥수수

행상을 하거나 겨울에는 군밤을 구워 팔며 약죽보통학교 수업료(50전)와 학용품 값을

벌었다. 심지어 손기정이 털실을 사다가 직접 장갑 양말 등을 뜨개질해 팔기도 했다.

한 때 일본에 건너가 날품팔이로 살아보기도 했다.  

손기정은 1932년 제2회동아마라톤 2위 입상을 계기로 그해 봄 스무 살의 나이에

육상명문 서울의 양정고보(현 양정고)에 입학할 수 있었다. 이후부터 손기정은 그의

타고난 달리기 재능을 마음껏 꽃 피웠다. 양정고보 4학년 때인 1935년 3월 도쿄 메이지신궁대회에서

2시간26분14초로 비공인 세계최고기록을 세우더니 곧이어 4월 조선육상경기대회에선

2시간25분14초의 비공인 세계최고기록으로 우승했다. 결국 11월 도쿄에서 열렸던

제8회 메이지신궁대회에서 2시간26분42초의 공인 세계최고기록으로 우승해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손기정은 “이때는 달렸다하면 세계최고기록을 세웠다”며 “그

누구도 겁나지 않았다”고 말했다.

손기정은 1936년 10월8일 프로펠러기를 타고 금의환향했지만 환영행사는 일체

금지됐다. 조선총독부는 서울여의도비행장 출입구를 봉쇄하고 군중들과의 접촉을

막았다. 또한 양정고보 졸업반이었던 그에게 더 이상 학교에 안가도 졸업을 시켜주겠다며

나가지 말라고 했다. 조선체육회의 ‘손기정 마라톤 제패기념 체육관건립모금운동’도

중지됐다.

손기정 뒤엔 늘 사복형사가 따라 붙었다. 손기정은 숨이 막혀 더 이상 살 수가

없었다. 손기정은 마침내 ‘우승 같은 것을 다시는 하고 싶지 않다. 이제 다시는

마라톤을 하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손기정은 1937년 3월 양정고보 졸업하고 보성전문(普成專門·현 고려대)

상과에 입학(1937년) 했지만 형사들의 감시가 계속되자 1937년 1학년 2학기 때 자퇴를

하고 ‘다시는 육상을 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일본 메이지대학에 들어갔다.

”난 달릴 때 뒤돌아 본 일이 한번도 없었어. 누가 따라오건 말건 앞만 보고 죽어라

달렸지. 또 배만 부르면 반드시 1등을 했어. 그 때 밥을 맘껏 먹고 달렸다면 더 좋은

기록이 나왔을 거야. 요즘 어린이들이 이런걸 알기나 할까? 정신력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손기정은 97년부터 바깥출입이 자유스럽지 못했다. 왼쪽 다리 동맥 경화증 때문에

지팡이에 의지하고도 100m를 20분이나 걸려서 갈 정도였다. 기자가 찾아가면 “밖에

나가 만나고 싶은 사람도 많고 얘기하고 싶은 것도 많은데 이렇게 꼼짝을 못하니…”라며

바깥 세상소식을 물었다. “너무 걱정하지 말아…이렇게 살다가 가는 거지. 그나저나

마라톤보다 인생마라톤이 훨씬 힘든 것 같아”라며 말년의 외로움을 털어놓기도 했다.

손기정은 가정적으로 불행했다. 1939년 단거리 육상선수였던 평양출신 강복신(姜福信)과

결혼했지만 그녀는 1944년 간염으로 세상을 떠났다. 1935년 60세의 나이에  타계한

그의 아버지와 1941년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난 그의 어머니의 임종도 볼 수 없었다.

“고향 신의주에 가서 냉면이나 한 그릇 먹어봤으면 원이 없겠어. 사람들이 잘

몰라서 그렇지 평양냉면이나 함흥냉면은 근처에도 못 간다고. 개장국은 또 어떻고….

내가 그 힘으로 뛰었어.”

손기정은 늘 북녘 고향을 그리워했다. 그러나 가고 싶어도 갈수가 없었다. 말년의

손기정은 “통일원에 방북신청을 해도 허락이 떨어지지 않는다.”고 말하곤 했다.

아무래도 북한 측에서 자신의 고향방문을 달가워하지 않는 것 같다는 것. 1946년

평안북도체육회 창립 당시 북측은 그에게 끈질기게 참가를 요구했지만 손기정은 이를

뿌리치고 서울로 탈출해버렸다. 아마 이것이 괘씸죄에 걸렸을 것이다. 손기정은 “1936년

일장기를 가슴에 달고 베를린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한 것도 그들 눈에 곱게 보일

리 없었을 것”이라고도 말했다.

손기정은 그렇게 그리워하던 고향 땅을 끝내 밟아보지 못하고  2002년 11월15일

0시40분 서울삼성병원에서 폐렴으로 인한 호흡부전으로 눈을 감았다. 향년 90세.

그의 유해는 대전국립묘지에 안장됐다. 유족으로는 딸 문영(文英·1940~)과

아들 정인(正寅·1943~) 1남1녀. 정인씨는 일본 한국인 단체인 재일거류민단에서

일하고 있다.  

손 선생은 말년에 바깥출입이 자유스럽지 못했다. 왼쪽 다리 동맥 경화증 때문에

지팡이에 의지하고도 100m를 20분이나 걸려서 갈 정도였다. “밖에 나가 만나고 싶은

사람도 많고 얘기하고 싶은 것도 많은데 이렇게 꼼짝을 못하니…”라며 “그나저나

마라톤인생보다 인생마라톤이 훨씬 힘든 것 같구먼”이라고 쓸쓸하게 말했다.

일장기 말소사건

손기정 선생이 베를린올림픽에서 우승한 16일 후인 1936년 8월25일 동아일보의

일장기말살사건이 터졌다.

손기정 우승은 당시 일제 식민지였던 한반도 땅을 열광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거의 한달 내내 전국이 ‘기쁨의 눈물바다’였다. 하지만 조선 사람이면 누구나 손기정의

가슴에 달린 일장기를 지워버리고 싶어 했다. 동아일보는 베를린올림픽 마라톤시상식

사진에서 손기정 가슴의 일장기를 지워버리고 내보내 한국인들의 아픔과 분노를 표시했다.

이 사건으로 동아일보 체육기자 이길용, 사회부장 현진건 등이 투옥됐다. 동아일보는

조선총독부로부터 무기정간처분을 받았다.

배편 귀국길의 싱가포르에서 이 사건 전말을 전해들은 손기정은 “나의 심경을

대변해 준 동아일보에 감사한다. 고초를 겪고 있는 기자들을 생각하니 가슴이 아프다”고

말했다.

해방 후 동아일보에 복직된 이길용은 “운동기자 생활 16년! 이처럼 흥분되고

기꺼운 때가 또 언제 있었으랴. 이러든 나는 이 나라의 아들인 손 선수를 왜놈에게

빼앗기는 것 같은 느낌이, 그 유니폼 일장마크에서 엄숙하게도 충격을 받았다.”고

말했다. 그는 “동아지(東亞紙)의 일장기 말살이란 항다반(恒茶飯)으로 부지기수다.

사내의 사시(社是)라고 할까, 전통이라고 할까, 방침이 일장기를 되도록은 아니 실었다.

우리는 도무지 실지 않을 속셈이었던 것이다”라며 그 당시 꼿꼿했던 동아일보 사내

분위기를 말했다.

3 스타디움 장내 중계방송에서 손기정을 ‘한국인대학생’이라고 표현

“그 한국 대학생은 세계의 건각들을 가볍게 물리쳤습니다. 그 한국인은 마라톤

구간 내내 아시아의 힘과 에너지로 뛰었습니다. 타는 듯한 태양을 뚫고, 거리의 딱딱한

돌 위를 지나 뛰었습니다. 이제 그가 엄청난 막판 스퍼트로 질주하며 들어오고 있습니다.

트랙의 마지막 직선코스를 달리고 있습니다. 1936년 올림픽 우승자 ‘손’이 막 결승선을

통과하고 있습니다.”

1936년 8월9일 베를린올림픽 남자마라톤 우승자 고 손기정 선생이 당시 베를린올림픽조직위원회로부터

‘일본인’이 아닌 ‘한국인’으로 공식 지칭됐다.

독일역사박물관 독일방송기록보관실 자료에 따르면 당시 베를린올림픽 스타디움에서

12만 관중을 상대로 한 남자마라톤 생중계내용 중 결승선에 골인하는 손기정 선생을

‘한국 대학생(실제 양정고 5학년)’ ‘한국인’으로 표현 한 것.

“다섯 개의 그룹 중 일본팀은 첫 번째 그룹에 있습니다. 그들은 이번 올림픽을

위해 특별히 선발되었고 한번도 올림픽에서 뛰어보지 않은 신예들로 이름은 남(Nam),

시오아쿠(Chiwagu·염전 인부 출신), 손(Son)입니다. 일본팀 감독의 말로는

‘손’을 이기려면 태양이 작열하든, 비가 오든, 자갈밭이든, 풀밭이든 초인적으로

뛸 수 있어야 한답니다. ‘손’이 결국 우승할 것이라는 말입니다.”

강력한 우승후보이던 자바라는 반환점을 1시간11분9초로 가장 먼저 돌았고 2위

그룹인 손기정과 영국의 하퍼는 그보다 1분10초 늦었다.

하지만 초반 오버 페이스한 자바라는 점점 발이 느려졌다. 손기정은 아포스 자동차도로부터

하펠 호숫가 코스로 접어드는 29km 지점에서 자바라를 제치고 선두에 나서 결승선까지

단 한번도 뒤돌아보지 않고 단독 질주 했다.

“자바라가 속도가 느려지고 불안정해집니다. 급기야 자바라의  반짝이는

옷 색깔이 선두진영에서 사라집니다. 이번 마라톤의 유망주였던 카를로스 자바라는

우리 눈으로 보기에 이제 선두에서 200m 뒤처져 있습니다.”

결승선을 100~200m 앞에서의 질주 모습을 아나운서는 “막판 엄청난 스퍼트로

질주했다”며 혀를 내둘렀다.

1936년 베를린올림픽 마라톤 코스는 거의 편평하다. 더구나 13~30km지점은 직선인

고속도로. 아푸스아우토반 중간에 있는 반환점을 돌아오는 코스다. 1~13km와 30~42.195km

지점은 10만평의 그루네 발트(‘녹색 숲’이라는 뜻) 공원을 달리는 숲속 길. 하벨

강변을 따라 나있는 코스 주변엔 지금도 2,3백년이 넘는 아름드리나무가 빽빽하다.

다람쥐, 고라니, 멧돼지, 토끼, 여우 등이 살 정도.

소위 ‘빌헬름황제 언덕(35km)’이나 ’비스마르크 언덕(40km)’은 없다. 그 지점은

표고 2m정도의 약간 오르막 부분일 뿐이다. 황영조 감독은 “고속도로 부분은  약간

덥고 지루했겠지만 달리는 데 큰 어려움은 없었을 것”이라며 “40km지점의 페르스트라야

철교 아래 S자 오르막이 좀 걸리지만 2위 하퍼를 2분 거리로 떨어뜨린 상황에선 큰

문제가 안 된다”고 말했다.

출발은 오후 3시2분. 스타디움 트랙을 한바퀴 4분의1(500m)을 돌고 빠져나갔다.

56명중 22번째. 강력한 우승후보 아르헨티나의 자바라(1932년 LA올림픽 우승자)가

2위와 150m 거리를 두고 선두로 뛰쳐나갔다. 약간 기온이 높았지만(섭씨 21~22.3도)

바람이 거의 없는 맑고 건조한 날씨라 숲 속에 들어서면 오히려 쾌적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손기정 선생은 10km지점 5위(34분10초), 25km지점 3위(1시간24분49초)로 가다가

마침내 28km지점에서(1시간35분29초) 선두 자바라를 32초차로 따라붙었다. 거리로는

약 150m. 손 선생은 내친김에 29km지점에서 자바라를 제쳤고(자바라 31km지점에서

기권) 31km지점에선 끈질기게 따라붙던 영국의 하퍼를 16초차(75m)로 제치고 단독

선두에 나섰다. 31km 지점은 따가운 아스팔트길인 아푸스 아우토반이 끝나고 다시

그루네발트의 숲 속으로 접어든 곳.

황 감독은 “손선생은 계속 이어지는 시원한 숲속 길에선 하퍼를 제치기가 힘들다고

판단해 아스팔트길이 끝나는 이 지점에서 스퍼트를 했을 것”이라며 “바르셀로나에서

29km지점부터 일본의 모리시타를 떨어뜨리려고 10여번 쯤 스퍼트를 했는데 그 때마다

이 친구가 물귀신처럼 달라붙어 혼났다”고 말했다. 결국 40km 몬주익 언덕에서 죽을힘을

다해 마지막 스퍼트를 했는데 “그 때 모리시타가 또 따라붙었다면 아마 내가 먼저

포기했을 것”이라고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그 후 황 감독은 모리시타를 만나

이 얘기를 했더니 모리시타는 “설마 거기서 치고나갈 줄은 몰랐다. 난 마지막 트랙에서

승부를 보려고 했었다. 지금도 내가 이기는 레이스였다고 생각한다.”마며 한스러워

하더라고 말했다.

손기정 선생의 1936년 베를린올림픽 마라톤 우승기록은 2시간29분19초. 100m 평균

21.23초의 빠르기다. 당시 역대올림픽 사상 최고기록이자 2시간30분벽을 처음으로

깬 대단한 기록이었다. 하지만 56년 뒤 후배 황영조의 19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마라톤

우승기록 2시간13분23초(100m 평균 약 18.97초)보다 15분56초 느리다. 현재 에티오피아의

하일레 게브르셀라시에가 보유하고 있는 세계 최고기록(2시간3분59초)보다는 무려

25분20초 늦다. 손 선생의 우승기록은  영국의 파울라 래드클리프의 여자 세계최고기록

2시간15분25초보다도 13분54초 느리다. 래드클리프는 100m를 평균 19.25초에 달려

손 선생보다 1.98초 빠르다. 요즘은 웬만한 아마추어 남자마라토너들의 우승기록이

2시간20분대에 이른다. 그만큼 세계마라톤 기록은 70년 동안 엄청나게 단축돼 왔다.

식이요법 신발개발 등의 과학적 훈련과 평탄한 코스 개발 등이 그 원인이다. 현재

한국마라톤 최고기록은 이봉주의 2시간7분20초(100m 평균 18.10초, 시속 19.872km).

손 선생의 우승기록은 2시간29분19초. 역대올림픽 사상 최고기록이자 2시간30분벽을

처음으로 깬 것. 하지만 이것은 올림픽최고기록이지 세계최고기록은 아니다. 당시

세계최고기록은 손 선생이 1935년 11월 일본도쿄 메이지신궁대회에서 세운 2시간26분42초.

이 기록은 12년 뒤인 1947년 4월 손 선생의 제자 서윤복이 보스턴마라톤에서 2시간25분39초로

우승하며 갈아 치웠다. 한국인이 세운 남자마라톤 세계최고기록을 같은 한국인이며

제자인 서윤복이 넘어선 것이다.

손기정 선생은 폭염 속에서 달리지 않았다. 1936년 8월9일 오후 3~6시 베를린은

섭씨 21~22.3도, 습도 20%의 맑고 건조한 날씨. 마라톤 최적 기온(섭씨 9도 안팎,

습도 30%)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일부에서 말하듯 30도가 넘는 찜통더위는 아니었다.

더구나 1~13km와 30~42.195km 구간은 10만평의 그뤼네 발트(‘녹색 숲’이라는 뜻)

공원을 달리는 숲 속 길. 지금도 200~300년이 넘는 아름드리나무가 빽빽해 햇볕이

잘 들지 않는다. 다만 13~30km지점의 직선 고속도로(아푸스아우토반)를 달릴 때 약간

더웠으리라 생각된다. 바르셀로나올림픽 땐 섭씨 28도에 습도 80%의 한증막 날씨.

1936년 베를린올림픽에서 손기정 선생은 왜 마지막 100m를 그렇게 빨리 달렸을까?

손기정 선생은 왜 결승선을 100m 앞두고 그렇게 필사적으로 달렸을까. 당시 외국의

한 감독은 “수동시계로 재본 결과 마지막 100m는 15초정도에 통과했다”고 말했다.

이는 손 선생의 100m 평균 21.23초(우승기록은 2시간29분19초)보다 6.23초 빠르게

달린 것. 생전 손 선생은 “10만관중의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에 고무되기도 했고,

누가 등 뒤에서 따라오는 것 같기도 하고…당시엔 뒤를 돌아보면 실격은 아니지만

정당하지 못하다고 손가락질 받아서 달리면서 뒤를 돌아볼 수가 없었어”라고 말했다.

손 선생은 레이스 내내 25km지점에서 딱 한번만 물을 마셨다. 40km지점에서 독일

간호사가 물을 컵에 담아 줬지만 입을 한번 헹군 뒤 뱉었고 나머진 머리에 쏟아 부었다.

왜 그랬을까. 그것은 당시 물을 마시면 배가 출렁거리거나, 배가 아파 달리지 못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당시 대부분의 다른 선수들도 거의 물을 마시지 않고 달렸다.

매 5km마다 물을 마시며 달리는 요즘 선수들과 좋은 비교가 된다.

손기정 선생이 달리는 모습을 찍은 당시 기록영화 중 일부분은 나중에 연출된

것이다. 손 선생은 우승한 다음날 당시 베를린올림픽 기록영화를 총지휘하던 레니

리펜슈탈 감독에게 불려가 하루 종일 달리는 모습을 다시 찍어야 했다. 생전에 손

선생은 “그렇지 않아도 피곤해 죽겠는데 자꾸 달리라고 해서 나중엔 러닝셔츠를

뒤집어 입고 뛰었는데 그 모습이 기록영화에 잠깐 나오더구먼”이라고 말했다. 등

뒤쪽 셔츠 하단에 ‘732’라는 번호 숫자가 뒤집혀서 언뜻 스치듯이 나온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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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마라톤대회는 어디일까? 전문가들은 주저 없이 ‘5대 마라톤

대회’를 꼽는다. 1897년에 시작된 세계 최고권위대회인 보스턴 마라톤 대회, 뉴욕시민들이

만들어낸 뉴욕마라톤, 상금이 가장 많아 ‘마라톤 세계 톱10’ 선수들이 즐겨 찾는

런던마라톤, 코스가 평탄하고 좋아 기록이 잘 나오는 베를린마라톤과 시카고 마라톤이

바로 그런 대회다.

미국에 3개 대회가 있고 유럽에 2개 대회가 있다. 보스턴대회는 ‘죽음의 코스’로

유명하다. 하지만 1회이래 단 한번도 코스를 바꾼 적이 없다. 그런 힘든 코스야말로

마라톤 정신을 가장 잘 반영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2003년 9월28일 세계최고 기록(폴 터갓 2시간4분55초)이 나온 베를린마라톤 코스는

런던, 시카고와 함께 `세계 3대 세계기록 산실’로 불려 지는 곳이다. 모두 표고 차

20m이하의 평탄하고 굴곡이 적은 쉬운 코스다. 베를린 시내를 돌아 브란덴부르크

문으로 들어오는 베를린 순환코스에서는 브라질의 호나우두 다 코스타(2시간6분5초,

98년 당시 세계최고기록)와 일본 다카하시 나오코(2시간19분46초, 2001년 당시 여자

세계최고기록) 게브르셀라시에(2007년, 2008년) 등 4개의 남녀 세계최고기록이 쏟아졌다.

런던 코스는 바닥이 돌로 된 부분이 많고, 시내 곳곳을 구불구불 도는 곳이 많다는

약점이 있다. 돌바닥은 그만큼 무릎에 충격을 많이 준다. 또한 굴곡이 많으면 아무래도

전속력으로 달리지 못한다. 대신 런던대회엔 세계 톱스타들이 비싼 돈을 받고 대부분

오기 때문에 경쟁이 치열하다.

역대 남자세계기록 톱10 가운데 베를린코스에서 1,2,3위 기록을 포함해 5개(여자

포함 6개)의 세계기록이 나왔다. 이밖에 시카고 코스 3개, 런던코스 2개이다.

‘세계 4대 극한마라톤대회’도 있다. ①이집트 사하라사막 마라톤(250km) ②

중국 고비사막마라톤(250km) ③칠레 아카타마사막 마라톤(250km) ④남극마라톤(250km)가

바로 그것이다. 여기서 남극마라톤은 ‘사하라-고비-아카타마사막 마라톤’을 완주한

사람에게만 참가 자격이 주어진다. 2007년 1월에 열린 남극대회에는 한국인 1명을

포함해, 전 세계에서 19명만이 참가할 수 있었다. 참가비용만 1만5000달러나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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