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뽀] “도박하느라 아버지 임종도 못지켜봤어요”

신정환 사건 계기로 찾아본 단도박 모임

“추석 연휴에는 회사 일을 핑계대고 고향에 내려가지 못했습니다. 빚 독촉으로

가족까지 피해를 보는 마당에 차마 얼굴을 내밀 용기가 없었습니다. 계속 거짓말을

해야 하는 제 자신이 너무 힘듭니다”

“도박에 미쳐 돌아가신 아버지의 임종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장례 마지막 날에

겨우 나타나 장례를 치르긴 했습니다. 좀 정신을 차리는 줄 알았는데 장례 치른지

일주일 만에 또 카드를 쥐고 밤을 새는 내 자신을 발견하고 소름이 돋았습니다”

“도박에 중독되면 돈을 잃어도 문제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내일 한 방이면 끝난다는 생각부터 드니까요. 도박의 끝은 가정파탄이 아니라 죽음밖에

없습니다”

추석 연휴가 지난 직후인 28일 저녁 8시. 서울 도심 한복판에 있는 00사회복지관

2층에서 열린 ‘한국 단도박 00지구 모임’에 참석해 그들의 얘기를 들어봤다.

도박중독자들이라고 특별히 다른 외모를 가진 것은 아니다. 단도박 모임을 찾기

전 도박중독자들은 눈이 매섭거나 뭔가 공격적인 성향을 보일 것이라는 걱정이 들기도

했으나 선입견에 불과했다. 이날 모임에 참석한 13명은 20대에서 70대까지 다양한

연령층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길에서 쉽게 마주칠만한 매우 평범한 얼굴을 하고 있어

이들을 도박중독환자로 불러도 되는 것인지 의문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기질상의 특징은 있다고 한다. 이날의 모임을 주관한 00동 오 선생은 “누구나

도박의 늪에 빠질 가능성은 있지만 특히 승부욕이 강하거나 집안에 알코올 중독자가

있는 사람이 더 취약하다”며 “어린 시절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었던 사람들도 도박에

손을 대기 쉽다”고 말했다.

죽음까지 생각한 결심도 작심삼일  

도박은 한 번 빠지면 빠져나오기 힘들다. 한 번쯤 판돈보다 수십 배의 돈을 따본

사람이라면 그 희열을 뇌에서 지울 수 없다. 한양대병원 신경정신과 김석현 교수는

“도박에 빠지는 이유는 도박에서 느낄 수 있는 짜릿한 흥분을 잊을 수 없어서다”라며

“이는 마치 마약중독처럼 계속 그것만을 생각하게 되는 심각한 정신질환이라고 말할

수 있다”고 말했다.

최근 방송인 신정환 씨 사건을 계기로 도박중독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높아졌다.

신정환 씨에 대한 루머 중 무엇 하나 정확히 밝혀진 것은 없지만 8월말 필리핀 세부에서

원정도박을 했다더라, 도박도시 마카오에 친지와 함께 나타났다더라, 이달 중순에는

귀국한다더라 등등 미확인 보도가 꼬리를 물었다. 잘 나가던 연예인이 외국에 나가서

제작진과 상의 없이 고정출연하던 방송을 펑크 내고 결국 출연 중이던 모든 프로그램에서

퇴출될 정도로 도박의 중독성은 무서운 것일까?

도박중독자들의 경험을 듣는 과정에서 도박의 파괴력에 실로 엄청남 공포감이

느껴졌다. 단지 개인과 가족의 파괴에서 끝나지 않는다. 도박은 사회 전체를 파멸로

이끌 수 있는 무서운 병이다.

“사채를 쓰는 것은 기본입니다. 돈이 되는 것은 무엇이든지 팔았습니다. 나중에는

이렇게 가다가 나뿐만 아니라 우리 가족까지 죽을 것 같아 나만 없어지면 된다는

생각에 손목을 긋기도 했습니다” (00동 최 선생)

00동 전 선생은 “그만 두겠다고 수십 번도 더 결심해보았지만 언제나 작심삼일이었습니다.

화투판에서 돈 다 잃고 집에 오는 택시 안에서 뛰어 내려 본 적도 있지요”라고 말했다.

도박에 미쳐있는 동안 ‘책임감’이라는 단어는 그들의 머릿속에서 멸종한 단어였다.

감당할 수 없을 만큼의 사채 이자로 힘겨워 하다 잠적을 하는 중독자들도 있다. 가족이

당할 수모나 피해는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도박의 늪은 아주 자연스럽고 달콤하게 시작된다. 오 선생은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은 금전적으로 가장 풍족한 시기 아닙니까. 친구 따라 재미로 간 경륜장에서

그야말로 신세계를 만났지요”라며 “5천원으로 십 몇 만원을 따니까 그 뒤에는 자꾸

계산이 되면서 나도 모르게 발길이 그쪽으로 가더라구요”라고 말했다.

오 선생에게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이후 경마, 카지노, 포커, 경정, 전자도박

등 할 수 있는 도박은 모두 손대게 됐다. 결혼을 약속한 여자친구는 떠났고 회사

공금에 손을 대 교도소까지 갔다 왔다. 그래도 끊을 수 없었다.

단도박 모임의 ‘끊을 단(斷)’자는 잘못 사용한 것일 수도 있다고 모임 참석자들은

말했다. 도박은 끊는 것이 아니라 평생 참는 것이 맞다는 것이다.

치료는 ‘중독자라는 것 시인’에서부터 출발

“00동에 사는 00입니다. 저는 도박중독자임을 시인합니다. 제가 한 도박은 포커,

카지노, 경마입니다. 처음 단도박 모임에 참석한 날은 00년 0월 0일입니다. 제가

마지막으로 도박을 한 날은 00년 0월 0일입니다. 지난 일주일동안 힘들게 지내왔습니다”

단도박 모임은 자기가 도박중독자라는 것을 ‘인정’하면서부터 시작한다. 대부분의

중독자들이 계속 도박에 손을 대는 가장 큰 이유가 자신이 도박중독자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단도박 모임은 그래서 매번 자신이 중독자임을 깨닫게 하는 과정을

반복한다.

모임의 법칙은 철저한 ‘익명성 보장’이다. 모두 ‘00동에 사는 0선생’으로

부르고 불린다. 심지어 몇 년 모임을 같이 한 사람들도 서로의 이름이나 구체적인

신상 정보를 묻지도 않고 알고 싶어 하지도 않는다. 다만 도박중독을 끊기 위한 정보만

교환할 뿐이다. 단도박 모임은 영어로 GA(Gamblers Anonymous)로 ‘익명의 도박자들’이라는

뜻이다. 즉 서로의 신분을 밝혀서는 안 된다.

참석자들은 모임 자체가 익명을 보장한다는 원칙하에 진행되기에 기사에 개인의

신분이 노출될만한 어떤 정보도 담지 않아야 한다고 신신 당부했다.

가족에게조차 대접을 받지 못하는 도박중독자들이 위로를 받을 수 있는 곳이 함께

도박을 끊기 위해 참석한 단도박 모임이다. 그들은 다시는 도박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기 위해 치열한 한 주를 살아가겠다고 마음속으로 다짐하며 식사를 하러 밤 9시

30분경 함께 자리를 떴다.

단도박 모임 숫자나 규모는 알려지지 않았다. 하지만 전국적으로 거의 매일 모임을

갖고 있다고 한 관계자가 전했다. 도박을 끊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모임에

참가할 수 있다.

단도박 모임은 홈페이지(www.dandobak.co.kr)를 운영하고 있다. 궁금한 사항은

홈페이지나 전화로 도움을 받을 수 있다. (02-8888-320)

손인규 기자 ikson@kormed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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