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종플루 대책, 말만 있고 내용이 없다

‘1만 병상 확보’ 등 구호 불과…지역사회 실질대책 거의 없어

세계보건기구(WHO)가 11일 신종플루에 대한 경보 수준을 최고 수준인 6단계(대유행

단계)로 올린 뒤 보건복지가족부는 11일 밤 관계부처 관계자와 전문가가 참여하는

‘위기평가회의’를 열었지만 현 단계인 ‘주의’를 계속 유지하기로 결정했다.

WHO가 전염병 경보를 6단계로 올린 것은 1968년 홍콩독감 이후 51년 만이지만,

아직 국내에선 56명 발병에 사망자는 없기 때문에 정부의 이런 결정에 무리는 없다.

그러나 정부가 12일 현 수준을 유지한다면서 밝힌 “대량환자 발생에 대비해 전국에

1만 병상의 격리 병상을 지정했고, 신종플루 백신의 대량생산을 독려해 비축할 계획”이기

때문에 “국민들께서는 과도하게 불안해 할 필요가 없다”는 부분은 검토가 필요하다.

이 말을 곧이곧대로 믿으면 이미 충분한 격리 병상이 마련됐고 백신도 곧 대량생산될

예정이니 국민들은 마음 놓고 월드컵 축구나 구경하면 될 것 같다. 과연 그럴까?

우선 병상 문제를 보자. 질병관리본부는 전국에 1만개, 서울시에만 2000개의 격리

병상을 마련하라고 지시했다. 이에 따라 서울시는 각 구청별로 병상 수를 할당했다.

서류 상으로는 ‘병상 확보’ 공문이 오갔겠지만 실제로 병원에 확인해 보면 확보된

격리 병상은 없다.

“없는 병상을 어떻게 확보하라고…”

서울의 한 대학병원 관계자는 “느닷없이 격리 병상 150개를 마련하라고 연락이

왔는데 어떻게 마련합니까? 중환자실을 비우나요, 아니면 입원환자를 내쫓고 그 자리에

격리 병동을 만드나요?”라고 되물었다. 이 관계자는 당국의 ‘1만 병상 확보 선언’을

“탁상공론”이라고 지적했다.

368개 격리 병상을 마련하라는 지시를 받은 대전시도 마찬가지다. 시는 몇몇 관내

종합병원에 100병상씩을 마련하라고 지시했지만 지시는 지시일 뿐이다. 시 관계자는

“병원에 공문은 보냈지만 격리 병상을 그 정도로 확보할 병원이 어디 있나요?”라면서

“전국에 1만 병상을 확보했다는 것은 선언적 의미”라고 말했다.

참고로 격리가 가능한 병상은 현재 국내에 197개에 불과하다. 이 중 공기의 압력

차이를 이용해 밖으로 바이러스가 나가지 못하도록 막는 음압 격리 병상은 38개뿐이다.

현실의 197개가 선언 속의 1만개로 탈바꿈한 셈이다.

당국은 백신 문제도 “걱정 놓으라”고 했다. 질병관리본부는 이미 확보된 추경예산

182억 원으로 백신 130만명 분을 빠른 시간 안에 확보하겠다고 밝혔다. 제약회사

녹십자도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로부터 종바이러스주를 받아 7월 중 시제품을 생산하겠다고

나섰다. 그러나 이 업체는 그 동안 외국에서 만들어진 인플루엔자 백신을 수입해

판매한 적은 있어도 직접 만든 경험은 없다.

서울대병원 감염내과 오명돈 교수는 “백신을 만들 때 불필요한 단백질을 분리해내는

정제 과정이 가장 중요한데 제약사마다 기술이 달라 차이가 발생할 수 있다”며 “미국에서

종바이러스주가 공급됐다고 해서 동일한 품질의 백신이 생산된다는 보장은 없다”고

지적했다.

서둘러 백신을 만들고 접종했다가 애꿎은 사람을 숨지게 한 사건은 1976년 미국

포트 딕스 군 기지에서 일어났다. 당시 군부대에서 돼지독감이 발생해 200여명이

감염되고 1명이 사망하자 정부가 예산을 투입해 급히 백신을 생산하고 주민들에게

맞췄지만 대유행은 찾아오지 않고 되려 백신의 부작용으로 길랑바레증후군이란 신경마비

증상이 발생하면서 최소한 25명이 사망한 사건이다.

신종플루 대책은 ‘언론 발표용’이 되어서는 안 된다. 방역 당국은 매일 반복되는

신종플루 브리핑에서 뭔가를 내놓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떨쳐내야 한다. 대신 수많은

사람이 공항과 항만을 통해 드나드는 시대에 정말로 대유행이 닥칠 때를 대비해 진짜

준비를 해야 한다.

신종플루

최고경보…한국 준비됐나?

    이용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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