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학적 부검으로 자살자의 말문을 연다

美서 30년대 시작…자살원인 제공자 처벌 사례도

정부가 23일 도입을 예고한 ‘심리학적 부검(Psychological Autopsy)’은 객관적

기준에 따라 자살의 원인을 규명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자살자에 대한 심리학적 부검을 누가 어떻게 하는지에 대해서는 정해진 기준은

없다. 그러나 대개 전문가들이 자살자 주변의 주요 인물들, 즉 부모, 친구, 배우자,

연인, 직장동료, 자녀, 의사 등을 상대로 체계적인 질문 조사를 함으로써 자살의

원인을 밝혀내는 과정을 밟는다.

또한 자살자가 남긴 각종 기록들, 경찰 조사 기록, 병원에 보관된 병력, 검시관의

진술 등이 수집된다.

가족 등 주변 인물 협조가 중요

죽은 몸을 대상으로 하는 조사가 ‘부검’이며, 흔히 부검을 통해 ‘죽은 자가

말한다’고 한다. 심리학적 부검도 똑 같은 효과를 목표로 한다. 자살에 이르기까지의

정황을 여러 경로로 조사해 정리함으로써 가족이나 사회가 자살에 이르기까지의 원인과

경과를 분명히 알도록 하는 것이 그 첫 번째 목적이다.

미국의 경우 어린이 자살자에 대한 심리학적 부검을 통해 어머니의 학대 사실이

발견돼 기소된 적도 있다.

심리학적 부검이 이처럼 자살자 주변 주요 인물에 대한 인터뷰를 통해 진행되기

때문에 심리학적 부검이 제대로 이뤄지려면 유가족 등 주변 인물의 협조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한국에서 특히 사례가 잦은 청소년 자살의 경우 부모나 학교가 ‘자살을 방조했다’는

비난을 두려워해 중요한 정보를 숨기려는 경향이 있었지만, 앞으로 정부 차원에서

심리학적 부검이 체계적으로 이뤄지면 이러한 협조가 보다 잘 이뤄질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조사 또는 법적 목적으로 심리학적 부검 실시

미국에서 심리학적 부검은 크게 두 가지 목적으로 실시된다. 하나는 조사 목적이며,

다른 하나는 법적인 차원에서다.

조사 목적의 심리학적 부검은 자살의 원인을 조사하고 이를 사회적으로 공유함으로써

유사한 자살의 재발을 막는 효과를 거두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법적인 차원의 심리학적 부검은 특정인의 자살 이유에 초점을 맞춰 조사함으로써

법적인 문제에 참고 자료로 활용된다. 유산 다툼이 벌어질 때 그 해결을 위해 심리학적

부검이 진행되는 경우도 있다. 유명한 사례로는 1976년 미국의 거부 하워드 휴즈(실업가,

영화 제작자, 비행가) 사망 뒤 진행된 심리학적 부검이 있다.

심리학적 부검의 자료가 축적되면, 자살 예방에 기여하는 효과를 거둘 수 있다.

상담 등을 통해 특정인의 자살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드러나면, 예방적 차원에서

치료 또는 보호시설 수용을 위한 기초 자료로 사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30년대 뉴욕 경찰 연속 자살 때 첫 탄생

미국에서 최초로 심리학적 부검이 행해진 것은 1934~1940년 사이 뉴욕 경찰 93명이

연속적으로 자살하면서 그 원인 규명을 위해 전문가들이 소환된 경우다.

이어 1958년에는 로스앤젤레스 검시과의 수석 검시관이 사망 원인이 명확하지

않은 사망 사고에대해 자살 여부를 밝혀 달라고 로스앤젤레스 자살예방협회의 전문가들에게

조사를 의뢰한 적이 있다.

당시 조사 의뢰를 받은 정신분석학자 에드윈 쉬나이드먼이 ‘심리학적 부검’이란

용어를 처음 사용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심리학적 부검 등의 자살 예방책은 이미 선진국에서 자살을 줄이는 효과를 거둔

것으로 평가된다. 90년대만 해도 한국의 자살률은 인구 10만 명당 13~14명 수준이었고,

당시 일본이 20명, 미국이 19명 수준이었다.

일본과 미국은 자살에 대한 사회적인 경각심을 높이고 예방 정책을 추진한 결과

현재 일본은 10만 명당 18명 수준, 미국은 14~15명 수준으로 낮추는 성과를 거뒀다.

미국이 좋은 효과를 본 반면, 일본은 큰 효과를 못본 경우다.

한국적 심리학적 부검 모델 만들어야

한국 자살예방협회 회장인 분당 서울대병원 정신과 홍강의 교수는 “미국 등 서구사회에서는

가족 중 자살한 사람이 생기면 가족들이 심리학적 부검의 절차에 잘 응하지만 일본에선

가족 구성원이 자살하면 덮으려고만 하는 경향이 있어 심리학적 부검에 어려움이

많다”고 소개했다.

홍 교수는 “이렇게 나라마다 사정이 다르기 때문에 한국 현실에 맞는 심리학적

부검 모델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며 “경찰, 심리학자, 정신의학자, 사회복지사

등 다양한 전문가로 구성된 팀을 짜는 접근법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심리학적 부검에 대해 연구를 진행 중인 서울대병원 신경정신과 조맹제 교수는

이번 정부 대책 발표에 대해 “자살은 사회적으로도 큰 손실인 만큼 정부에서 자살자에

관심을 갖는다는 측면에서 긍정적으로 생각한다”며 “심리학적 부검은 연구자 혼자

진행할 수 없고 복지부, 경찰 등 관련 기관의 협조가 절대적이다”고 밝혔다.

복지부가 23일 발표한 자살예방 종합대책에는 심리학적 부검 이외에도 112와 119를

연계해 24시간 현장 출동이 가능한 자살위기 대응시스템의 구축과 확대, 자살 미수자

관리, 자살 예방 교육, 자살 유해정보 모니터링, 유독성 물질 불법유통 검색 강화,

지하철 스크린 도어 확대 등이 포함됐다.

 

경희대 의대 정신과 백종우 교수는 “최근 우울증으로 인한 자살이 늘고 있지만

대부분 자살의 원인을 우울증으로 단순화하기에는 무리가 있다”며 “유서나 주변

사람들을 통해 정확한 사실을 아는 과정이 자살의 확대를 막기 위해 필요하다”고

말했다.

복지부는 이 같은 정책으로 2013년까지 자살로 인한 사망률을 현재보다 20% 정도

낮출 계획이라고 밝혔다.

한국의 자살자 숫자는 작년 1만2174명으로, 10만 명당 24.8명을 기록했다. 사망원인

중 자살은 암, 뇌혈관질환, 심장질환에 이어 4위를 차지하고 있다.

    권병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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