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잊어야 잘 기억한다

뇌는 기억 끈임없이 지우는 하드디스크?

“나한테 잘해 줄 필요 없어. 나 다 까먹을 텐데….”

(영화 ‘내 머리 속의 지우개’ 중 손예진의 대사)

영화 속에서 알츠하이머병에 걸린 손예진만큼은 아니지만, 우리의 기억도 시간이

지나며 흐릿해진다. 그리고 많은 이들이 이를 아쉬워한다. 그러나 잠깐. 기억을 잃는다는

게 과연 나쁘기만 한 걸까.

그렇지 않다는 대답이 나왔다. 컴퓨터가 빨리 돌아가려면 하드 디스크에 빈 공간이

많아야 하듯, 인간의 뇌도 별 필요 없는 기억을 지워내야 새로운 정보를 저장할 수

있다는 것. 신경정신학자들은 잊지 않는다면, 평생 주어지는 엄청난 정보의 바다

속에 빠져 허우적거리게 된다고 설명한다.

서울아산병원 신경과 김종성 교수는 “뇌는 기억하는 만큼 잊어버려야 한다”면서

“어릴 때는 학습을 위해 많은 것을 기억하도록 뇌가 발달하지만 뇌의 기억 창고가

무한히 큰 것이 아니기 때문에, 나이가 들면서 필요 없는 기억을 지우는 것도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지난 여름 ‘잊지 못하는 여자(The Woman Who Can’t Forget)’라는 책을 펴낸

질 프라이스는 14살 때부터의 매일매일을 거의 모두 기억한다. 그러나 그녀는 너무

많은 기억이 떠오르기 때문에 정신적으로 쉽게 피곤해지는 ‘기억의 고문’에 시달리고

있다.

캘리포니아주립대 얼바인 캠퍼스의 연구진들은 프라이스처럼 모든 걸 기억하는

‘자서전스러운 기억’을 지녔다고 주장하는 사람 200명을 인터뷰했다. 정말로 모든

걸 기억하는지 측정하기 위해서였다. 그 결과 정말로 거의 모든 일을 기억하는 사람은

프라이스 말고도 3명이 더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경희의료원 신경정신과 백종우 교수는 “잊고 싶어도 잊지 못하는 기억을 가진

경우 새로운 내용을 습득하지 못하거나 현재 상황에 집중하지 못하는 장애가 나타난다”고

소개했다. 외상후 스트레스장애나 우울증 환자의 경우 고통스러운 과거의 기억을

‘지우지 못해’ 고통을 겪는 증상들이다.

신경과학자들은 망각이 기억과 학습, 적응에 필수적이라고 말한다. 중요하지 않은

기억은 빨리 잊어야 새로운 기억을 효과적으로 해낼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 스탠퍼드대 기억연구소의 앤소니 와그너 박사는 기억들이 서로 경쟁을 덜

벌일수록, 뇌는 특정 정보를 기억해내기 쉽다는 연구 결과를 지난해 발표했다. 그는

“망각은 뇌의 능률을 높인다”고 말했다.

예컨대 컴퓨터와 인터넷 사용에 필수인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보자. 과거의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모두 기억할 필요는 없다. 모두 기억한다면 오히려 현재의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떠올리는 데 방해만 된다.

뇌는 빛의 속도로 지운다

망각의 메커니즘에 대한 베일이 점차 벗겨지고 있다. 우리는 ‘잊혀진다’며 망각이

자동적으로 일어나는 것으로 여기지만, 실제로 망각은 무의식적 차원에서 일어나지만

뇌의 능동적인 작용에 속한다.

뉴욕의 신경정신학자로 기억 전문가인 가야트리 데비 박사는 “뇌는 빛의 속도로

정보를 평가하고 분류하며, 필요 없는 내용은 지워버린다”고 설명했다.

인간은 한 가지에 집중하면 다른 상황에 대한 감각을 꺼버리는 특징이 있다. 피실험자들에게

농구 게임 비디오를 보며 주면서 농구공이 몇 번 패스되는지 세라고 했더니, 농구장

옆으로 고릴라가 지나가는 데도 이를 알아챈 피실험자는 절반에 불과했다는 유명한

실험 결과도 있다. 이렇게 잊으며 집중하는 현상은 ‘주의맹(change blindness)’으로

불린다.

망각은 정보홍수 시대에 민첩하게 움직이려는 뇌의 허허실실(비워야 채워지는)

전법이다. 잊기가 싫다면 뇌를 괴롭힐 것이 아니라 종이나 컴퓨터 하드디스크를 이용하면

된다. 일기나 메모, 사진, 비디오 같은 기록 매체를 이용하는 것이다. 그래서 “남는

건 사진”이라고 하는 걸까.

    이수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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