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대높이뛰기 선수의 고독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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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출발(도움닫기)

더 빨리 달릴수록 더 높이 뛰어 오를 수 있다. 도움닫기 스피드가 빠를수록 장대를 더 높은 데서 잡을 수 있고 장대를 높이 잡을수록 더 큰 상승에너지를 탈 수 있다. 깨달음을 얻으려면 용맹 정진해야 한다.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고 ,나한을 만나면 나한을 죽여야 한다. 그래야만 부처가 될 수 있다. 해탈에 이를 수 있다. 오직 화두만을 붙들고 똑바로 나가야 된다. 항상 앉아 있을 뿐 눕지 않고(長坐不臥), 더러운 누더기 조각으로 만든 분소의(糞掃衣)를 입고, 하루에 한 끼만을 먹으며, 문 없는 무문관(無門關)에서 화두와 피터지게 싸워야 한다.

그러나 아무리 화두를 붙들고 매달려도 망상은 틈을 비집고 집요하게 피어오른다. 잠은 천근만근의 무게로 쏟아지고, 세상에 대한 그리움은 파도처럼 끝없이 밀려온다. 장대높이뛰기도 그렇다.

힘차게 달려온 수평 운동에너지가 하나도 빠짐없이 장대에 모두 실리는 것은 아니다. 일부 운동에너지는 어쩔 수 없이 손실될 수밖에 없다. 봉을 봉 박스에 꽂을 때의 충격, 구름발이 지면에 가하는 힘, 장대가 휘어질 때 등 운동에너지의 일부는 사라진다. 체중과 장대 잡는 손잡이 높이, 스피드가 조화가 돼야 에너지 손실을 최소화 할 수 있다. 손잡이 높이를 높이는 데는 오직 스피드만이 해결한다.

세계 남자 톱 클래스 선수들의 봉 잡는 높이는 4m80cm 정도. 선수들은 최대한 속도와 거리를 늘리면서 최대속도(32~34km/h)에 도달하도록 속도를 낸다. 세계적인 선수들은 초속 7m92cm~8m22cm의 스피드로 달린다. 세계적인 단거리 선수들 속도(초속 10m97cm~11m27cm)에 비해 약 3m 정도 느리다.

5m40cm 이상을 뛰어 넘는 남자선수들은 통상 100m를 10초8 이내, 50m는 5.5~5.7초의 빠르기를 가지고 있다. 도움닫기 거리는 제한이 없지만 보통 40m는 넘어야 좋은 기록이 나온다. 선수의 개성과 능력에 따라 다르다. 주법은 무릎을 많이 올리고 탄력 있게 달리고 마지막에는 발바닥 전체로 트랙을 밟고 보폭은 좁힌다.

② 장대 꽂기

화두는 바람이다. 잡았다고 생각한 순간 사라진다. 망상은 바람꽃이다. 틈만 나면 화두를 지운다. 수레가 나가지 않을 때 수레를 다그치면 안 된다. 소를 채찍질해야 한다. 망상에 의지해 깨달음으로 갈 수는 없다. 무늬 있는 비단은 본래 명주실로 짠다. 하지만 명주실에는 무늬가 없다. 짜는 사람의 뜻에 따라 무늬가 생겼을 뿐이다. 풀어버리면 다시 명주실로 돌아간다. 명주실은 본성이고 무늬는 망상이다. 명주실을 기억하라. 본성을 기억하라. 화두를 놓치지 말라. 수처작주(隨處作主). 가는 곳마다 주인이 되라.

장대는 폴 박스에 찍어야 한다. 폴 박스에 장대를 꽂지 않으면 아무리 높이 뛰어 넘어도 무효다. 화두를 놓치는 순간 깨달음의 길이 사라지듯, 장대를 폴 박스에 단단히 꽂지 않으면 한순간에 엉덩방아를 찧는다. 미국의 ‘미녀 새’ 스테이시 드래길라는 “초심자들은 대부분 폴을 박스에 꽂는 순간 두려움에 질려서 자기 가슴을 찔러버린다”며 “수많은 훈련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전속력으로 달려온 수평 운동에너지는 폴 박스가 가까워지면서 자연스럽게 장대로 옮겨진다. 약간 끝이 치켜 올라간 장대는 점차 아래로 내려지면서 지상의 폴 박스를 향한다. 일단 장대가 수평이 되면 선수가 균형을 잃게 되고 속도가 초속 약 7.7m로 떨어진다. 폴 박스는 착지면 앞과 바걸이 사이에 있다. 장대지르기는 발 구름 2보 전에 시작하고 발 구름 1보 앞에서는 아래손이 완전히 처져 있어야 한다. 발 구름 지점은 지면과 바가 직각삼각형을 이루는 위치에 있다.

③ 발구름 및 도약

화두만 잡고 있으면 모두 부처가 되는가. 기왓장을 천년만년 돌에 갈면 거울이 되는가. 깨달음은 단박에 이뤄진다. 깨달음의 길은 계단식이 아니다. 홀연히 도둑처럼 온다(頓悟). 밥 먹다가, 밭에서 일하다가, 똥 누다가 “아항, 그렇구나” 하고 무릎을 탁 친다.

 날갯짓은 아픔이요, 숨 막히는 두려움이다. 아픔을 생각하고 두려움에 떨면 결코 허공에 떠오를 수 없다. 온 몸으로 발구름 한 뒤 장대를 타고 단박에 두둥실 올라가야 한다. 장대높이뛰기 선수는 바닥에서 20도 각도로 오른다.

동시에 장대는 체중에 의해서 구부러진다. 휘어진 장대의 복원력에 의해 뛰어 오른다. 무릎을 가슴 쪽으로 끌어 올리고 엉덩이도 따라 추켜올려 몸을 둥글게 만든다. 장대가 펴질 때 두 다리를 머리 위쪽으로 올린다. 폴이 펴질 때 몸도 재빠르게 펴 올린다. 몸을 끌어올리는 동작은 폴의 탄력과 신체의 반동으로 강하면서도 빠르게 해야 한다. 폴이 수직으로 되기 전에 양 다리를 머리로 올리되 양 다리는 합쳐서 폴 가까이 놓이도록 한다. 폴이 탄력성이 있을 때 이를 이용해 몸을 두둥실 떠올린다. 폴을 잡은 손의 높이가 높을수록, 신장이 크고 체중이 많이 나가면 나갈수록, 폴의 속도는 느려진다.  

④ 비행(飛行)과 바 넘기

 산꼭대기에 올라간 사람만이 그 기분을 안다. 올라가 보지 않고 산 밑에서 이러쿵저러쿵 얘기해 봐야 아무 소용없다. 시인 조정권은 산정(山頂)에 올라 포효한다.

 겨울 산을 오르며 나는 본다.
 가장 높은 것들은 추운 곳에서
 얼음처럼 빛나고,
 얼어붙은 폭포의 단호한 침묵.
 가장 높은 정신은
 추운 곳에서 살아 움직이며
 허옇게 얼어터진 계곡과 계곡 사이
 바위와 바위의 결빙을 노래한다.
   ………………

<‘산정묘지(山頂墓地) 1’ 부분> 

그러나 산 정상에 올랐다고 해서 다 끝난 것이 아니다. 정상은 반환점에 불과하다. 올라 온 만큼 다시 내려가야 한다. 에베레스트에 오른 산악인들은 “산악인이라면 누구나 히말라야 최고봉에 오르고 싶어 한다. 그러나 막상 정상에 서면 ‘더 이상 가지 않아도 되는구나’ 하는 안도감부터 든다. ‘드디어 해냈구나’하는 뿌듯함은 한순간 일뿐이다. 그것보다는 ‘자, 이제 어떻게 내려가지?’ 하는 두려움이 밀려들기 시작한다”고 한목소리로 말한다.   

그렇다. 단박에 깨우쳤다고 해서 그것으로 깨달음을 얻은 게 아니다. 한발 더 나가야 한다. 백 척이나 높은 장대 끝에서 한발 더 나가야 한다. 과연 백척 장대 끝에서 어떻게 하면 한발 더 내디딜 수 있겠는가 (百尺竿頭 如何進步).

오호라, 한발 더 내디디면 천길 낭떠러지 허공뿐인데…. 하지만 그런 생각조차 버려라. 허공에 자기를 던져 버려라. 깨친 것조차 다 내던져 버려라. 깨우쳤다고 생각한 순간, 비로소 새로운 길이 시작되는 터닝 포인트일 뿐이다.

수평운동에너지를 흡수한 장대의 유연성은 선수를 물구나무서기 동작으로 밀어낸다. 선수는 자신의 엉덩이와 다리를 돌고래처럼 나선형으로 용틀임하며 뻗음으로써 거꾸로 선 동작을 강화한다.

한순간 두둥실 정상에 올라선다. 짜릿하다. 내친 김에 등과 다리를 펴면서 공중 물구나무서기를 한 몸통은 땅에 거의 수직이 된다. 장대가 원상으로 돌아올 때 팔로 장대를 밀어낸다. 물구나무 선 동작에서 몸을 바깥쪽으로 틀면서 다리-허리-몸통 순으로 바를 넘는다. 바를 넘을 때는 롤 오버(모로 넘기)를 주로 한다.

⑤ 착지

한번 깨달으면 그 경지는 죽을 때 까지 영원히 계속되는가. 아니다. 잠시라도 쉬면 거울에 먼지가 쌓인다. 거울은 쉬지 않고 닦아줘야 빛이 난다(漸修). 큰 스님들이 모든 것 훌훌 털고 무소유의 삶을 사는 이유다. 더 낮은 곳으로, 저잣거리로 내려가는 것이다, 그리하여 갓 난 송아지가 세상을 물끄러미 바라보듯 무심하게 그냥 물 흐르듯 산다.

깨달음은 결코 계급장이 아니다. 대상이 오면 비춰주고, 또 대상이 가면 흔적을 지우는 여여(如如)한 거울 같은 것이다. 중생의 마음은 창호지 같다. 먹물이 한 방울 떨어지면 지워지지 않고 번진다.

에베레스트에 오르는 것보다는 내려오는 게 훨씬 더 힘들다. 사고는 대부분 하산 길에 일어난다. 수없이 많은 위대한 산악인들이 하산 길에 목숨을 잃었다. 장대로 바를 넘었다고 마음을 놓는 순간, 바가 몸에 걸려 떨어진다. 두둥실 떠올라 깨달음의 경지에 올랐다고 환호하는 순간 장대가 똥침을 놓는다. 96년 에베레스트 정상을 단독 등반한 뒤 정상부터 스키 활강으로 내려온 한스 카멀란더는 말한다.

 “등산은 스포츠적인 요소를 지니고 있지만 심판도 없고 관중도 없다. 오로지 자신과의 외로운 싸움을 벌이는 무상(無償)의 행위다. (…) 등산은 물결이 만들어 내는 파장과도 같다. 오름과 내림, 높고 낮음이 끝없이 이어진다. 내리막의 힘을 받아야만 비로소 다시 오를 수 있다. 8000m가 넘는 산을 오르는 길에서 정상은 아주 작은 부분에 불과하다. 그것은 단지 하나의 전환점이고 전체 과정의 중간 단계일 뿐이다. 정상에 올랐다고 해서 끝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성취는 산 아래로 내려왔을 때에야 비로소 이뤄진다.”

장대높이뛰기 선수가 한번 공중에 두둥실 몸을 떠올린 뒤 다시 지상에 떨어졌을 때 그는 이미 뛰어 오르기 전의 그가 아니다. 그는 새로 태어난 자이다. ‘거듭난 자’이다. 설령 그가 실패했을지라도 그는 날갯짓의 그 숨 막히는 떨림을 맛본 사람이다.   

세르게이 붑카-이신바예바와 최윤희 선수

소설 ‘광화문 그 남자(?)’ 아니 ‘칼의 노래’를 쓴 소설가 김훈은 고개를 끄덕인다. 장대높이뛰기 선수의 가장 빛나는 순간은 ‘추락의 순간’이라고.

 “장대높이뛰기 선수들은 지상의 한 점 위에 장대를 박고, 그 위에 거꾸로 선다. 그는 ‘높이’와 싸우는 자이다. 그가 지상의 한 점에 장대를 박을 때, 그는 수평으로 달려오던 속도의 힘을 수직의 상승으로 전환한다. 그는 수평의 힘으로 수직을 지향하는데, 이 전환은 그가 지상의 한 점 위에 존재의 근거를 확보함으로써 이루어진다.

그의 가장 빛나는 순간은 허공으로 솟구친 후 표적을 넘어서 다시 땅 위로 추락하는 순간이다. 존재의 전환은 전혀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는 땅과 물리적으로 연결된 장대에 의해서만 땅을 박차고 솟구칠 수 있고, 그렇게 솟구쳐 오른 허공에서 다시 땅 위로 떨어진다. 그는 날개가 없는 자의 운명을 돌파하지 못하지만, 그 운명 앞에서 무너지지도 않는다. 그는 땅의 속박을 딛고 솟아올라서 다시 땅의 속박 안으로 돌아온다. 그의 인간된 몸은 이 질곡의 운명 속에서 아름답다. 그것이 땅 위에서, 시간과 공간 속에서 삶을 받은 인간의 몸이다. (…)

거꾸로 치솟는 장대높이뛰기 선수들의 몸을 보면서 내 몸 속에 숨은 수많은 척도들의 아우성 소리를 듣는다. 인간의 자유는 스포츠 엘리트가 아닌, 보통 사람들의 몸 안의 척도가 몸 밖의 척도를 무찔러 가는 과정을 따라서 전개될 것이다. 허공으로 치솟은 장대높이뛰기 선수는 아직도 세상의 척도가 되지 못하는 인간의 몸으로서 외로워 보인다.”

세계 최고의 ‘인간 새’는 누가 뭐라 해도 우크라이나 세르게이 붑카(41)다. 그는 94년  6m14cm를 뛰어넘어 세계 최고기록을 세웠고 이 기록은 아직까지도 깨지지 않고 있다. 그는 1988 서울올림픽 때 소련대표로 나와 5m90cm로 금메달을 따냈고 세계기록을 35번이나 경신했다. 또한 세계선수권대회도 6연패 했다.

그는 6m나 될 정도로 긴 슈퍼장대를 사용했다. 다른 선수들은 붑카와 같은 긴 장대를 쓸 엄두조차 내지 못했지만 붑카는 100m를 10초5에 달리는 빠른 스피드와 강한 어깨 복부 근육을 활용해 장대를 최대한 높이 잡을 수 있었다. 또한 다른 선수들보다 딱딱한 장대를 써서 힘을 거의 낭비하지 않고 장대에 실었다.

여자는 ‘미녀 새 삼총사’가 세계를 주름잡는다. 러시아의 엘레나 이신바예바(22), 스베틀라나 페오파노바(24)와 미국의 스테이시 드래길라(32)가 그들이다. 여자 장대높이뛰기가 처음 채택된 시드니올림픽에선 드래길라가 금메달을 따냈지만 2004 아테네올림픽에선 이신바예바가 우승을 차지했다. 그의 최고 기록은 501cm.

 한국에도 ‘미녀 새’가 있다. 최윤희(22·원광대)다. 170cm, 59kg의 알맞은 체격. 그의 최고기록은 411cm. 아직은 올림픽 B기준기록 4m25cm에도 못 미친다. 이신바예바의 세계기록엔 무려 90cm나 뒤진다. 아직 멀었다. 최윤희는 도움닫기가 짧고 스피드도 부족하다. 세계적인 선수들처럼 100m를 11초대에 달리는 스피드를 가져야 한다. 근력도 더 키워야 한다. 그래야 장대를 지금보다 더 길게 잡을 수 있고 기록이 향상된다.

최윤희는 초등학교 시절 포환던지기 선수를 해서 뛰어올랐다가 떨어지는 동작이 좋다. 중1 때인 99년 장대에 넋이 나가 장대높이뛰기 선수가 됐다. 지도자는 이원감독. 이 감독은 한 때 복싱을 하다가 장대높이뛰기 선수로 전향한 특이한 경력의 소유자다. 1964년 도쿄올림픽을 앞두고 부상을 당해 꿈을 접었다. 당시 이 감독의 최고기록은 3m20cm. 이원 감독은 "최윤희는 유연성, 담력, 순간 판단력 등 장대높이뛰기 선수로서 모든 조건을 갖췄다. 윤희가 스피드와 상체 근력을 강화하는 데 집중하면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최윤희는 “땀이 나면서 몸이 풀리고 경쟁자들이 많아야 기록이 나는 편인데 국내에서는 경쟁할 선수가 없어 컨디션 조절에 애를 먹는다. 국제대회에 자주 참가해 경험을 많이 쌓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렇다. 우물 안 개구리 식으로는 안된다. 최윤희는 아직 작은 재도 넘지 못하는 ‘작은 새’에 불과하다. 어깨 죽지의 힘도 더 길러야 하고 바람을 가르는 날갯짓도 더 빨라져야 한다. 여자장대높이뛰기 기록은 머지않아 5m30cm를 넘어 남자들과 경쟁할 것이라는 전망이다. 클리프 프럴리치 텍사스대 교수는 “장대높이뛰기는 선수들의 에너지가 장대의 유연성을 타고 점프에너지로 전환된다”며 “남자보다 유연성이 뛰어난 여자선수들이 현재 기록보다 훨씬 향상된 5m53cm까지 뛰어오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단숨에 허공을 박차려는 상상력과 의지력

장대높이뛰기는 에너지 보존 법칙이 적용된다. 선수의 수평 운동에너지가 장대에 고스란히 옮아간 뒤 다시 그 에너지는 선수의 도약에너지로 바뀐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상상력이다. 단박에 두둥실 떠오르려는 의지력이다.

장대높이뛰기 선수는 상상력으로 두둥실 허공에 떠오른다. 상상력은 꿈이다. 꿈을 잃은 새는 날개가 사라진다. 키위 새는 이제 거의 날개가 없다. 펭귄의 날개는 지느러미로 변했다. 타조의 날개도 무늬만 남았다. 이승철 시인은 낮은 목소리로 속삭인다. “날자, 제발 날자”라고 말한다. “젊은 넋들이여, 사는 게 모래알 씹듯이 퍽퍽하고, 사는 게 진창일지라도 날갯짓을 하자”고 울먹인다.

어차피 이 세상에서 살아 탈출한 사람은 단 한명도 없다. 그러나 꿈을 꾸면, 날갯짓을 하면 살아 탈출할 수 있다. 흔히 혼자 꾸면 꿈이지만 여럿이 꾸면 현실이 된다고 한다. 과연 그런가. 아니다. 꿈은 혼자 꿀 수밖에 없다. 그래서 꿈이다. 깨달음은 누가 대신 해줄 수 없다. 부처가 되는 것은 각자 자기 안에 있는 부처를 찾는 것이다.   

 초승에 떼무리 지어 달무리 곁으로
 겨울새 끼룩끼룩 날개짓 한다
 깃 치며 발버둥치며 솟구쳐 오른다
 진눈깨비 하이얗게 나부끼는 밤하늘
 너희 집 없는 형제들아 
 이 한밤에 어디,
 어디로들 떠나는 것이냐
 악다구니 세상 속 헤쳐가는 앞길에
 진정 뼈마디 덥힐
 둥지라도 기다리고 있는 것이냐
 가자, 가자, 젊은 넋들아
 정녕 이 한밤을 저버리지 말고
 날자, 날자, 젊은 벗들아
 그대 새초롬한 부리로
 어둠을 쪼아 새벽길 열리니
 이 추운 한 시절, 이제 너희 몫이다

<‘겨울새’ 전문>

새는 왜 나는가. 산악인들은 왜 산에 오르는가. 장대높이뛰기 선수는 왜 공중에 떠오르려 하는가. 왜 지상의 편안함을 버리고 자꾸 날갯짓을 하려 하는가. 구상 시인의 말한다. “앉은 자리가 꽃자리니라 / 네가 시방 가시방석처럼 여기는 / 너의 앉은 그 자리가 / 바로 꽃자리니라”라고. 그런데 왜 그 꽃자리를 박차고 나가려 하는가.

꽃이 피고 잎이 진다. 꽃과 잎은 둘이지만 그 뿌리는 원래 하나다. 뿌리는 꽃을 피워 내 뿌듯하고 꽃은 씨앗을 맺어 뿌리를 만든다.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 그러나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니라고 한번 의심하고 뒤집어 봐야 비로소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 된다. 두둥실 떠오르다가 추락해봐야 지금 내가 서 있는 이 땅이 ‘꽃자리’임을 안다. 에베레스트 정상에서 내려와 봐야 지금 내가 딛고 서 있는 땅이 가장 높은 곳임을 안다. 땅에서 넘어진 자 땅에서 일어나라. 정말 우습구나. 소를 타고, 소를 찾는 자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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