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살 보도와 심리학적 부검

또 되풀이되고 있다. 탤런트 안재환의 자살 보도를 접하면서 한국 언론의 고질적인 병폐가 반복되는 걸 확인하고 한편 화가 나면서 또 한편으로 한숨이 나왔다.

이번 보도는 선정성의 극치였다. 일부 신문도 문제였지만 특히 방송과 인터넷언론의 보도는 망자와 유족을 두 번 죽이는 보도였다. 언론인들이 스스로 발표한 ‘자살보도 가이드라인’을 이렇게 철저히 짓밟을 수 있을까? 급기야 한국자살예방협회가 "언론이 안재환 사망 영향을 최소화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호소하고 나서야만 했다.

2004년 7월 언론들은 자살에 대해 신중히 보도하겠다고 약속했다. 당시 인터넷을 통해 자살이 유행병처럼 번지자 보건복지부, 한국자살예방협회, 한국기자협회가 ‘자살보도 권고기준’을 채택했고 수많은 언론사가 이 기준을 따르겠다고 선언했다.

그 기준은 이렇다. 첫째, 언론은 자살 보도에서 자살자와 그 유족의 사생활이 침해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둘째, 자살자의 이름과 사진, 자살 장소 및 자살방법, 자살까지의 자세한 경위를 묘사하지 않아야 한다. 셋째, 충분하지 않은 정보로 자살동기를 판단하는 보도를 하거나, 자살동기를 단정적으로 보도해서는 안 된다. 넷째, 언론은 자살을 영웅시 혹은 미화하거나 삶의 고통을 해결하는 방법으로 오해하도록 보도해서는 곤란하다. 다섯째, 자살 현상에 대해 보도할 때에는 확실한 자료와 출처를 인용하고, 통계수치는 주의 깊고 정확하게 해석해야 하며 충분한 근거 없이 일반화하지 말아야 한다. 여섯째, 자살 사건의 보도 여부, 보도 방식과 내용은 저널리즘의 기본원칙에 입각해서 결정하고 흥미를 유발하거나 속보 및 특종 경쟁의 수단으로 다뤄서는 안 된다.

그러나 이 선언은 이듬해 영화배우 이은주가 자살했을 때 유야무야돼 버렸다. 언론은 자극적인 보도를 되풀이했고 모방 자살이 급증했다. 지난해에는 탤런트의 애인이었다는 호스티스가 자살하자 온갖 추측성 보도가 난무했다. 이번에도 똑같은 병이 되풀이됐다. 무지한 필자는 자살현장과 방법, 자살자의 아내가 실신하는 것을 왜 보도해야 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자살에 대한 언론보도는 최대한 신중해야 한다. 선정적인 자살 보도는 모방 범죄를 부르고 유족을 괴롭히는 고문이기 때문이다.

2005년 11월 이건희 전 삼성 회장의 딸이 자살했을 때 대부분의 신문은 객관적 사실 위주로 보도했다. 이때 일부 언론은 주요 신문이 삼성의 눈치를 본다고 ‘무식하게’ 따졌지만, 사실 이것이 자살 보도의 전형이며 다른 사람이 숨졌어도 이렇게 보도하는 것이 정상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자살을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라 사회문제로 인식하고 원인을 차분하게 진단, 예방대책을 내놓는 것이다. 이것을 정신의학에서는 ‘심리학적 부검(Psychological Autopsy)’이라고 부른다. 자살한 사람의 성장과정, 의학적 병력, 사회적 과거력, 최근 상황 등을 검토해서 정확한 원인을 찾는 작업이다. 자살자와 비슷한 처지에 있는 사람의 자살을 막는 필수 과정이며 이 과정에서 우울증에 대한 치료의 중요성을 알게 되고 유족이 죄의식을 가질 필요가 없다는 것이 밝혀지곤 한다.

선진국에서는 자살 예방을 위한 첫 단추로 여기고 있지만, 아쉽게도 한국에는 이런 심리학적 부검이 이뤄진 사례가 없다. 여기에 대한 전문가도, 예산도 없다고 한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가장 자살률이 높은 나라이건만, 이것이 우리의 현주소다.

마침 어제가 세계 자살예방의 날이었다. 부끄럽고도 울가망한 자살예방의 날이었다.

<이 기사는 한국일보 9월11일자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이성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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