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회의 성명서 유감

예로부터 ‘과전불납리, 이하부정관'(瓜田不納履, 李下不整冠)이라고, 오이밭에서 신을 고쳐 신지 말고 오얏나무 아래에서 관을 고쳐 쓰지 말라고 했다.

최근 일부 학회가 성명서를 낸 것에 대해 취지를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노린 효과보다는 불필요한 오해만 낳고 있는 듯 해 안타깝다.

첫째, 대한신경외과학회 전 이사장과 회장 명의의 성명서다. 두 분은 당시 한나라당 고경화 의원이 우리들병원의 과잉시술을 문제 삼자 여기에 대해 반박하는 성명서를 냈다.

두 분은 정치적 이유로 의사가 공격받아 매도당하기 시작하면 전체 의사가 도매금으로 넘어갈 수도 있다고 판단한 듯하다.

그러나 절차가 상궤에 어긋나 오해의 말들만 낳고 있다. 이 성명서는 얼핏 보면 신경외과 학회의 공식 성명서 같은데, 왜 신경외과 홈페이지가 아니라 개인 병원의 홈페이지에 팝업으로 떠 있는지부터가 오해의 소지가 있다.

네 문단의 짧은 성명서인데 세 문단은 평어체, 한 문단은 경어체여서 공식 성명서로는 형식적으로도 엉성해 도대체 공식 성명서가 맞는지가 헷갈릴 정도다. 게다가 두 분이 척추 전문가가 아닌 뇌 전문가인데다 임기가 끝나는 때, 왜 이 같은 성명을 냈는지도 시비거리라고 할 수 있다.

누군가 의사를 공격할 때 성급하게 의사를 보호하는 움직임은 국민으로부터 오해의 소지를 낳기 십상이다. 필자가 듣기로는 신경외과학회 차원의 조사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다던데, 두 분이 왜 오해받을 일을 했는지 모르겠다.

둘째, 겉으로는 아무 문제가 없이 지나간 것 같지만 대한혈액학회, 대한조혈모세포이식학회, 대한소아혈액종양학회가 공동 성명서를 낸 뒤 이에 대한 시비가 학자세계에서 내연(內燃)하고 있으며 의료인에 대한 불신(不信)의 소지를 오히려 키운 셈이다.

발단은 일부 언론에서 가톨릭의대 오일환, 조빈 교수가 ‘British Journal of Hematology’에 발표한 논문을 소개한 것에서 시작됐다. 논문의 내용은 나중에 질병 치료에 이용하기 위해 보관된 제대혈 세포의 상당수가 초기세포사 상태여서 이식에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시청자와 독자들이 수군거렸고, 제대혈은행 회사들이 곤혹스러운 지경에 빠졌다.

이때 대한민국의 이 분야 중심 학회들이 논문의 한계를 지적하고 나섰다. 이들 학회는 △제대혈 이식은 백혈병 치료의 주요한 과학적 방법이고 △국내에서 300여 명이 제대혈 이식으로 건강을 찾았으며 △제대혈 효과 논란이 커지면 제대혈 기증자가 줄어들어 환자 치료에 차질을 줄 우려가 증가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일부 의사는 논문을 발표한 두 교수의 공개사과까지 요구했다고 한다. 두 교수는 환자를 위해 응당 해야 할 연구를 해놓고 동료의사의 비판에 가슴앓이를 하고 있다고 한다.

필자가 두 교수에게 전화를 걸었을 때에 두 교수는 “할 말이 없습니다. 더 묻지 말아주세요”라고만 말했다. 왜 이 교수들이 죄인이 돼야 하는지 우매한 필자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관련 학회는 아마도 환자가 제대혈 치료 자체를 불신하는 상황을 걱정했을 것이며, 그래서 이번에 성명서도 냈을 것이다. 하지만 필자가 아는 수많은 의사와 전문기자들 역시 이들 학회의 성명서에 곱지 않은 시선을 보냈다.

한 의대 교수는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학술지에 논문으로 발표된 기초 연구 성과를 두고 학회가 서둘러 입장을 발표한 이유가 궁금하다”며 “공익 차원의 제대혈 보관보다 개인 차원의 제대혈 보관이 많은 한국적 상황에서 제대혈 기증의 위축을 막자는 주장은 오히려 상업성이 있는 제대혈 업체에 제대혈을 많이 보관하자는 뜻으로 비칠 소지가 있다”고 지적했다.

물론 학회 관계자는 “이번 학회의 입장은 질병 치료용 제대혈의 공익적 보관을 위해 발표됐지 제대혈 업계의 입장을 대변하는 것은 아니다”고 말했다. 하지만 여러 사람이 오얏나무 아래에서 갓을 고쳐 쓴 것처럼 보인다고 지적하고 있다.

실제로 제대혈은행이 봇물을 이룰 때 많은 의학자들이 탯줄혈액 이식이 어느 정도 장점이 있지만 100만원 이상을 들여 탯줄을 보관할 만큼 인지에 대해서는 비판의 시각이 많았다. 많은 의사들이 탯줄혈액은행에 제대혈을 보관했다가 실제로 사용할 가능성이 너무 낮아 ‘로또보험’이라고 혹평해왔다. 일부에서는 산모의 모성애를 이용한 상술이라는 극단적인 표현까지 했다.

탯줄혈액 이식이 가능한 아이는 백혈병, 재생불량성 빈혈 등 혈액질환과 신경아세포종, 유전적 대사질환 등으로 이론상 10만 명 가운데 최대 7,8명이 혜택을 받을 수 있지만 어린이 백혈병 환자의 60~80%가 항암제만으로도 완치되기 때문에 굳이 탯줄혈액 이식이 필요 없다. 탯줄혈액 이식이 골수이식을 받을 수 없는 환자에게 유용한 것은 분명하지만 골수이식보다 성공률이 떨어지고 장기 효과를 장담할 수 없다는 것 또한 분명한 사실이다.

게다가 제대로 보관되지 않아 막상 병이 생겨도 이식을 못 받을 가능성에 대해 꾸준히 학계에서 문제가 제기돼 왔다. 또 5년이 지난 탯줄혈액을 과연 이식에 쓸 수 있을지도 논란거리였다.

이번 학회 성명서에서는 탯줄혈액이식 성공 사례가 300례에 달한다고 했는데, 이 가운데 장기보관한 제대혈이 어느 정도 쓰였는지를 밝히지 않는다면 논점 이탈의 오류에 해당한다.

학회는 환자의 처지에서 탯줄혈액세포의 채취, 보관, 이용 등에 대해 보다 엄격한 기준을 세우는 작업을 해왔어야 한다. 그러나 학회가 과연 이런 작업에 충실해 왔는지 의문이 든다. 이번 논문이 이런 작업을 보다 충실히 할 수 있는 계기가 되면 얼마나 좋을까.

최근 학회에서 36시간 내에 탯줄혈액을 냉동보관하면 된다는 가이드라인을 만든다는 소식인데, 일부 학자들은 이에 대해서도 “가능한 한 빨리 냉동 보관해야 한다는 상식에 비추어 이런 움직임도 환자보다는 관련자의 이익을 대변한다”고 비판하고 있다.

이러니 학회에서 환자를 죽일 수 있는 움직임에 대해 침묵했고, 관련자의 이해에 대해서는 민감하게 반응해왔다는 목소리가 뜬금없다고 할 수 없다.

황우석 사기극 때에도 이 분야의 최고 전문가 집단인 관련 학회에서는 침묵했다. 성체줄기세포 사기극이 횡행하고 있어도 모두들 입을 다물고 있다. 다시 한번 의사와 학회가 누구를 위해 존재하느냐는 원론적 질문으로 되돌아가자. 우리 의료계는 동료의사나 관련 업체가 아니라 환자를 위해 존재한다.

그렇지 않다면 국민이 의료계를 바라보는 부정적인 시각은 갈수록 심각해질 것이다. 많은 의사가 환자를 무지한 존재로 안다. 그래서 눈 가리고 아웅 식의 편법을 쓰곤 한다. 하지만 환자는 말을 하지 않아서 그렇지, 순진한 의사들보다 훨씬 많은 것을 알고 있다. 의사가 환자를 무시하면, 그것은 비수(匕首)가 돼 의료계로 돌아올 것이다.

부부자자군군신신(父父子子君君臣臣)이라는 공자의 실명론(實名論)은 의사에게도 어김없이 적용된다. 의사는 의사다워야 한다. 의사가 의사답다는 것은 모든 것을 환자 처지에서 생각하는 것이다. 학회는 의사들 서로가 바라보는 모임이어서는 안 된다. 의사들이 환자라는 지향을 염두에 두고 지성을 모으는 자리여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학회가 아니라 친목단체 또는 이익단체일 뿐이다.

지금도 수많은 의사들이 환자의 상태를 걱정하며 잠을 못 이루고 있을 것이다. 일부 의사의 성급하고 평면적인 인식과 이로 인한 성명서 때문에 의사 사회 전체가 소탐대실(小貪大失)하는 집단으로 비쳐지지 않기를 간절히 빌 따름이다.

    이성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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