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병원 장기입원

깜부기불. 불씨가 대부분 죽어 꺼져가는 불을 가리키는 토박이말이다. 깜부기불은 끄먹끄먹 불씨가 약해지며 이따금 불티를 튀기다가

결국 사그라지기 마련이다.

서울대학교병원 노동조합이 올해 노사협상 과정에서 제기한 ‘장기입원 환자 문제’는 깜부기불처럼 곧 꺼질 이슈일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이 밑불로 남아 불씨가 활활 살아날 가능성이 더 큰 듯 하다. 장기 입원 환자 문제는 다른 여러 문제와 얽혀 있으며, 절대 쉽사리 해결되지 않는다.

이 병원 노조는 8월 초 노사협상 진행 중에 장기입원 환자 문제를 들고 나왔다. 병원이 국가중앙병원으로서의 위상에 걸맞지 않게 병상회전율을 높여 수익을 내려고 장기 입원 환자를 내동댕이치고 있다는 것이었다.

노조는 “병원이 이를 추진하기 위해 선택진료비를 불투명하게 지원했다”고 주장한다.

병원 측은 이에 대해 드러내고 반박하지는 않았지만 “병원과 환자의 사정을 잘 알면서도 노사협상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려고 억지 주장을 하고 있다”며 불쾌한 내색이다.

노조 측은 “병원은 환자를 내몰기 위해서 35개 병동에 매달 30만원씩 지원했는데 이 돈의 출처는 선택진료비”라며 “대부분의 직원들이 이 비용이 어디에서 나와서 어디에 쓰이는지 모른 채 환자 내쫓기의 공범이 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에 대해 병원은 “장기 환자를 그대로 병원에 두라는 것은 입원을 기다리며 발을 동동 구르는 환자의 목소리에 눈을 가리고 귀를 막으라는 소리”라고 반박한다.

병원은 또 장기 환자를 내좇는 것이 아니라 근처의 협력 병원을 소개해서 ‘지속적 치료’가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병원 측은 또 말기암 환자를 위한 완화병동의 확충 등 장기 환자의 문제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고 있다고 했다.

사실, 서울대병원을 비롯한 주요 병원의 병실 구하기 난은 하루 이틀 된 문제가 아니다.

응급실마다 환자들이 신음을 토해내며 언제 병실로 들어갈 수 있나 기다리고 있다. 주요 병원 응급실에 처음 가본 사람은 중환자실, 암병동에 있어야 할 사람이 고통 속에서 치료 순번을 기다리는 모습에 “이곳이야말로 아수라장,” “우리 의료 체계는 후진국 수준”이라는 말을 내뱉기 마련이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병실 난을 타개하기 위한 노력도 다양하게 벌어지고 있다. 서울대만 하더라도 외과의 노동영 교수가 유방암 환우 모임인 비너스회와 뜻을 모아 병원 부근에 환자 거처를 마련했다.

어린이병원의 신희영 교수는 백혈병 치료 프로토콜을 만들어 전국의 의사들에게 똑같이 치료하도록 교육해 환자들이 굳이 서울로 올라오지 않도록 유도하고 있다.

서울대병원 성명훈 교수는 “병원에서는 이런 노력에 직간접적으로 지원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러한 병실 난의 고갱이에 장기 입원 환자 문제가 똬리를 틀고 있다는 것은 말할 나위조차 없다. 서울대병원의 경우 전체 환자 중 30일 이상 입원한 환자가 2003년 15.2%에서 지난해 15.8%로 늘었고, 이 중 혈액종양내과의 환자는 19.9%에서 24%로 증가했다.

종양내과의 허대석 교수는 “중증 환자는 최근 본인 부담 비율이 10%로 감소하면서 치료에 따른 경제적 부담이 줄어들어 장기 입원을 원하고 있다”라면서 “퇴원 후 간병인, 밀린 입원비 문제 등이 해결되지 않아 퇴원을 꺼린다”고 설명했다.

허 교수는 “정부가 중증 환자의 비용 측면만 신경 써 오히려 의료전달 체계의 왜곡을 초래했다”고 비판한다.

비용 뿐 아니라 ‘소셜 케어’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허 교수의 충심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현 시점에서 복지부가 환자의 본인 부담률을 줄인 것을 비판할 수만은 없을 듯하다. 암 환자에 대한 대책 역시 정부의 다른 정책과 마찬가지로 단계적으로 추진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게다가 장기 재원 환자의 문제는 복합적 요소가 작용한 것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첫째, 말기 환자에게 실질적 혜택이 무엇인지 따지기 보다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최고의 병원에서 최상의 치료를 경험토록 하고 싶어 하는 ‘가족 중심의 병 문화’가 이 문제의 근저에 있을 것이다.

둘째, 실제로 많은 지방 요양기관이 치료 수준과 공익성 등에서 서울의 주요병원과 현격한 차이를 보인다는 점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셋째, 이른바 ‘KTX 효과’ 때문에 가족이 환자를 서울의 주요병원에 입원시키고 오가며 돌볼 수 있게 된 점도 요즘 서울 소재 병원의 장기 환자가 증가하는데 관련이 있을 것이다.

넷째, 자신을 오랫동안 돌봐온 의사와 간호사가 자신의 처지를 가장 잘 안다는 환자의 생각도 무시할 수 없다.

어쨌든 서울대병원 노조가 제기한 문제는 그리 간단치 않으며 이 병원만의 문제도 아니다.

병원은 주어진 여건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며 병원을 파렴치 집단으로 몰 수 없는 것도 명백하다.

하지만 병원 측에서도 “국가중앙병원으로서 정부에 요구할 것은 요구하고 병원의 역할 모델을 확립하는 등 의료 환경 개선에 적극적인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노조의 주장은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는 듯하다. 그렇지 않으면 공익과 경쟁이라는 두 토끼를 잡으려다 정부의 공공보건의료계획 시행 평가에서 꼴찌가 됐던 올해의 전철을 되풀이할 수도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병원도, 의사도, 정부도 이런 문제의 근저에 깔린 문화적 코드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는 점이다.

우선 웰빙(Well-Being) 시대의 도래에 따른 웰다잉(Well-Dying)의 중요성에 대해 우리 모두 고민해야 한다.

웰다잉은 사실 유교사회에서 가장 중요시했던 행복의 가치 중 하나였다. 고종명(考終命), 즉 행복하게 삶을 마감하는 것은 오복(五福)의 하나였다. 이 가치가 복지사회, 노령화 등의 코드와 맞물려 다시 부각되고 있는 것이다.

호스피스 완화의학은 이런 점에서 중시돼야 한다. 다행히 정부도 이런 점에 눈을 떴는지 3, 4년 전에 비해 호스피스 병상 확보, 보험 수가 적용 등에 대해 전향적인 자세를 보이고 있다. 하지만, 현재 정부의 대책은 시대의 흐름을 좇아가기에는 미흡하기 짝이 없어 보인다.

이와 맞물려 큐어(Cure)에서 케어(Care)로 의료의 축이 이동하는 것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사람의 행복권이라는 차원에서 본다면 치료 뿐 아니라 관리 역시 중요한 가치이다. 현재의 의료전달 시스템은 근원적으로 큐어와 케어의 병존에 방해가 되는 측면이 강하다.

장기 환자 중 상당수는 어쩌면 깜부기불과도 같은 존재일지 모른다. 하지만 마른 장작불이 아니더라도 불은 불이다. 말기 환자는 희나리처럼 은은하게 소중한 삶을 마감할 권리가 있다. 말기 환자들이 행복하게 삶을 마감하도록 지혜를 모아야 할 때다. 누구나 말기 환자가 될 수 있다. 내가 될 수도, 내 사랑하는 가족이 될 수도 있다.

    이성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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