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 옮기자 환자 600명 따라온 ‘백혈병 대부’

[대한민국 베스트 닥터 ②] 김동욱 서울성모병원 혈액병원장

‘러브 스토리’, ‘라스트 콘서트’, ‘사랑의 스잔나’, ‘가을동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영화나 드라마에서 어여쁜 여주인공이 백혈병 진단을 받으면 몇 달 만에 숨지는 게 당연했다. 그러나 골수 이식에 이은 표적 항암제의 보급으로 이제는 ‘살 수 있는 병’으로 바뀌었다. 특히 만성 골수성 백혈병(CML)은 1년 내 세상을 떠나는 비율이 1~2%에 불과할 정도가 됐다.

가톨릭대학교 의과 대학 서울성모병원 혈액병원 김동욱 원장(57)은 CML이 ‘관리 가능한 병’으로 되게끔 한 세계 연구 그룹의 일원이다. 글로벌 제약 회사가 신약을 개발할 때 가장 먼저 임상 시험을 의뢰하는 의사 중 한 명으로 현재 15개의 국제 임상 시험을 진행하고 있다. 한 달에 한 번꼴로 학회 발표, 강연, 회의를 하러 해외로 나가기 때문에 대한항공의 마일리지만 150만 마일이 넘는다.

글로벌 신약 가장 먼저 임상 시험 의뢰

김 원장은 한국의 CML 환자 3500명 가운데 절반 이상을 치료하고 있다. 세 명 가운데 한 명은 다른 병원 의사들이 보낸 환자. 김 원장의 가장 큰 장점은 무기가 많다는 것이다. 환자가 오면 기존 표적 항암제 4개 중 하나를 처방하고, 내성이 생기면 약을 바꾼다. 기존 약으로 조절이 되지 않으면 임상 시험에 참여시켜 차세대 신약 4개 중 하나를 복용케 한다. 어떤 약도 듣지 않을 때에는 골수 이식을 통해 생명을 살린다.

김 원장은 환자들을 ‘울렸다 웃게 하는’ 의사다. 그는 환자의 초진 때 “표적 항암제가 나온 뒤로도 많은 사람이 죽었다. 약 복용법을 철저히 지키지 않으면 약이 안 들어 죽을 수도 있다”고 경고한다. 환자는 사색이 돼 눈물 흘리기 일쑤다.

김 원장은 자신의 환자들이 만든 ‘루 산우회(山友會)’와 소통하며 환자들이 웃음을 되찾게 한다. 그는 해마다 철쭉, 아카시아, 작약꽃 등이 흐드러지게 피는 5월이면 전국의 백혈병 환자 300여 명과 함께 산행을 한 뒤 2시간 동안 강의한다. 매년 2월에는 산우회 임원 30여 명과 한라산 등반을 한다. 2005년에는 환자 7명과 함께 히말라야 등반을 하기도 했다.

산우회는 2015년 온라인에서 환자들이 스스로 건강 관리를 하면서 약 복용법, 부작용 등에 대한 궁금증을 김 원장에게 묻는 시스템을 구축했다. 김 원장은 스마트폰에 질문 메시지가 뜨면 곧바로 응답해서 만일의 사태를 방지한다. 산우회는 회비 없이 후원금으로만 운영되는데, 김 원장은 2005년 5월 모임 결성 때부터 매달 10만 원씩 월급 통장에서 빠져나가도록 해서 지금까지 자동 이체로만 1500여만 원을 후원했다. 환우회 관계자는 “환자들의 각종 모임 때 경비 등을 합치면 수천만 원을 썼을 것”이라면서 “그것보다 24시간 환자과 함께 한다는 것이 가장 큰 선물”이라고 말했다.

김 원장은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이모 때문에 의사가 됐다. 이모는 “봉사에는 의사만 한 직업이 없다”면서 김 원장 가족을 몰아붙였다. 그러나 의대에 들어간 조카는 공부와는 담을 쌓고 탁구에 미쳐 살았다. 의예과 2학년 성적표에서는 전체 110명 가운데 103등이라는 순위가 찍혀 있었다. 김 원장은 본과에 들어가면서 삭발하고 탁구 라켓 대신 책을 잡았다. 본과 2학년 때 탁구 동아리의 선배들로부터 강제로 회장을 떠맡았지만 탁구장에 얼씬도 하지 않았다. 동아리가 해체될 위기에 놓였다며 온갖 욕을 얻어먹으면서 ‘삭발 투혼’을 유지해 2학년 말 전체 차석으로 전액 장학금을 받았다.

그는 당시 최고 인기 전공이었던 내과 전공의가 돼 김춘추(74) 교수의 문하에 들어갔다. 스승은 스님이 되겠다며 절에서 수행하다가 아버지에게 붙잡혀 의대에 들어간 기인. ‘현대시학’을 통해 등단해 7권의 시집을 낸 중견시인이기도 하다. 스승은 1983년 국내 처음으로 골수 이식에 성공한 뒤 서울대병원, 세브란스병원 등에게 환자를 빼앗길까봐 환자가 찾아오면 꼭 껴안고 “이제 당신은 살았다”고 외치곤 했다.

김 원장은 괴짜 스승 아래에서 불호령을 들으면서 ‘대가의 주춧돌’을 쌓았다. 전공의 2년차가 한시라도 병원을 떠나는 것을 상상도 못할 때, 김 원장은 스승에게 “한양대 유전학교실에서 염색체 실험을 배우고 싶다”고 ‘감히’ 간청해서 허락을 받았다. 그는 6개월 동안 병원과 한양대를 오가며 연구의 초석을 닦았다.

김 원장은 연구와 병행하면서 임상에서 국내 최초의 성과를 이어갔다. 1995년 10월 국내 처음으로 비혈연간 골수 이식에 성공했다. 1996년엔 면역계가 피아를 구분하는 표식인 사람백혈구항원(HLA) 6쌍이 완전히 일치하지 않는 사람 간의 골수 이식, 97년에는 탯줄조혈모세포 이식에 처음으로 성공했다.

그는 1997년 ‘골수 이식의 산실’인 미국 프레드허킨슨 병원으로 연수를 떠나 밤낮없이 분자생물학에 파고들었다. 열정에 반한 미국의 교수가 김 교수에게 최고의 연구 환경에서 근무하며 최고의 성과를 내보자고 권했지만 스승이 미국까지 와서 제자를 서울로 데리고 왔다.

급성림프구성백혈병 처방 기준 세워

김 원장은 2001년 ‘기적의 표적 항암제’ 글리벡이 국내에 들어오면서부터 이 분야 연구를 주도했다. ‘글리벡 공급 심의위원장’을 맡아 2년 동안 300여 명에게 이 약을 무상 공급하며 환자를 살리고 연구를 이끌었으며 2003년 세계 최초로 급성림프구성백혈병의 글리벡 처방 기준을 세웠다. 아시아만성백혈병네트워크를 설립하고 아시아백혈병학교를 만들어 각국 의사들을 가르치고 있으며 아시아만성백혈병등록소를 설립해서 아시아 각국 주요 병원의 치료 데이터를 관리하고 있다.

김 원장이 골수 이식 대신에 표적 항암제에 몰두한 것이 평생 골수 이식에 전력했던 스승의 노여움을 샀던 것일까. 2005년 갑자기 여의도성모병원에서 의정부성모병원으로 옮겨야 했다. 600여 명의 환자가 의정부까지 따라와서 병원을 놀라게 했다.

그는 환자들이 약을 조기에 끊도록, 완치시키는 날을 앞당기기 위해 연구실 불을 끄지 못하고 있다. 2010~2015년 보건복지부 암정복과제의 책임연구원으로 전국 15개 병원 의사와 협력해서 글리벡을 끊은 환자의 60%가 재발하지 않았다는 결론을 내고 《유럽혈액학회지》 《혈액학》 등에 발표했다.

김 원장은 일양약품의 CML 치료제 슈펙트의 임상 연구를 주도해 국산 백혈병 치료제의 탄생에 기여했다. 그는 지난해 만성골수성백혈병 환자가 갑자기 악화되는 것이 코블-1 유전자 때문임을 밝혀내 ‘백혈병’에 발표했다.

그는 ‘뉴잉글랜드저널오브메디신’ ‘네이처’ 등 권위 있는 학술지에 300여 편의 논문을 냈다. 내년(2019년)에는 서울에서 국제백혈병 및 관련 질환 비교연구협회(IACRLRD) 회장으로 국제학술 대회를 연다.

“백혈병으로 숨진 많은 환자가 저를 채찍질해서 많은 환자를 살릴 수 있게 됐습니다. 특히 전공의 때 치료가 거의 불가능한 환자 가족을 설득해서 고용량 항암제를 투여했는데 결국 환자는 숨지고 가족은 엄청난 치료비 때문에 고통을 받게 됐습니다. 암 치료는 환자 가족까지 배려해야 한다는 뼈에 새겨지는 가르침을 얻었습니다.“

[사진=서울성모병원]

    이성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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