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독간호사 귀국 때 취업 위한 묘책은?

[유승흠의 대한민국의료실록] ⑮영동프로젝트와 多병원 시대 개막

파독 한국인 간호사들은 모국 경제성장의 일등공신이었지만, 일부는 귀국 후 일자리를 걱정해야 했다.

1975년 여름 어느 날, 남덕우 경제기획원 장관과 김효규 연세의료원장이 남대문 근처 도큐호텔에서 만나 1960년대 파독 간호사들의 귀국 뒤 취업대책에 대한 의견을 나눴다. 정부는 10여 년 전 독일에 1만 명이 넘는 간호사와 광부들을 파견해서 이들의 임금을 담보로 차관을 얻어 경제개발을 추진했지만, 태극기를 들고 눈물을 흘리며 이국으로 떠났던 간호사 가운데 선진의료를 체험하고 국내에 돌아오려는 이들에겐 일자리가 없었다. 김 의료원장은 정부가 독일로부터 외자를 유치해 병원을 건립하고 파독간호사를 우선 취업하도록 하면 되지 않겠느냐는 아이디어를 내놓았고 남 장관은 무릎을 쳤다.

독일에서 병원 건립 재정 지원 여부에 대해 점검하려고 조사단이 내한했다. 당시 우리나라는 병상점유율이 낮았고, 병원 경영이 어려웠던 시절이었기에 조사단은 고개를 갸우뚱하였다. 우여곡절 끝에 국내에선 경제기획원을 거쳐서 국무회의에서 병원 건립 안이 통과돼 독일 정부 재정 차관이 성립됐다.

대학이 독일 차관 신청을 했기에 문교부 소관이었다. 필자는 병원을 건립하는 것이므로 보건사회부에도 알릴 필요가 있겠다고 김효규의료원장에게 제안했는데, 김 원장은 “교육부 소관인데, 왜 보건사회부에 알리느냐”고 반문하며 흘려버렸다.

그 해 가을에 결국 일이 터졌다. 필자는 대방동에 있는 공군본부 의무감실에 근무하고 있었는데 전화가 왔다. 차를 보낼 터이니, 학교에서 점심시간에 급히 만나자는 김효규 의료원장의 호출이었다. 외출증을 발급받아 의료원장 전용차를 타고 연세의료원에 갔다. 신현확 보건사회부 장관이 독일 재정 차관으로 영동세브란스병원을 건립하는 ‘영동프로젝트’와 관련해 화가 잔뜩 났으니, 필자더러 해결방안을 모색하라는 것이었다.

당시 보건사회부는 지금의 경복궁역 부근 정부종합청사에 있었다. 공군본부에서 퇴근버스를 타고 광화문으로 가서 강원식 과장을 만났다. 강 과장은 필자가 세계보건기구(WHO) 상대역(서기관 대우)으로 파견 근무할 때 의정과 계장으로 가깝게 지냈던 사이였다. 강 과장은 필자가 인사를 건네자, 말을 꺼내기도 전에 신현확 장관이 화를 낸 경위와 이유를 상세히 설명했다.

재정 차관 최종 결정은 국무회의에서 하는데, 교육부 소관이고 재정규모도 별로 크지 않았기에 신현확 장관은 별 생각 없이 서명했다고 한다. 병원을 건립하려면 보사부 장관의 승인을 받아야 하므로 김효규 의료원장은 보사부에 병원설립 계획서를 제출했다. 장경식 의정국장이 장관 결재를 받을 때 장관이 국무회의에서 서명한 것이라고 하자, 신 장관은 서명한 바 없었다고 화를 내었단다. 강 과장이 해결책을 귀띔했다. 신 장관은 문교부와 보사부 장관 등을 역임한 연세대 의대 출신인 최재유 박사에겐 꼼짝 못한다고 알려줬다.

곧바로 김효규 의료원장실로 달려가서 해결 방안을 전했다. 병원을 건립하는 것이므로 보사부 의정국은 적극 찬성이었다. 김효규 의료원장은 최재유 박사를 모시고 신현확 장관을 만났다.

1983년 허허벌판이었던 도곡동에서 개원한 영동세브란스병원(현 강남세브란스병원).

연세대의 병원 설립 계획은 서울에서 개발을 진행 중인 강남지역에 500병상의 병원을 건립하는 것이었다. 장관은 병원규모를 절반으로 줄이고, 공장지역(인천 주안동)과 농촌지역(경기 성남, 광주, 용인)에 나누어 건립하는 조건으로 승인했다. 연세의료원이 여러 분원을 건립하게 된 사연이다. 한 대학이 여러 곳에 나눠 병원을 짓게 된 것은 국내 최초였다. ‘1의대 다병원 시대’가 열린 것이었다.

연세의료원은 애초 강남구 도곡동에 500병상 규모로 건립할 것을 기획했는데, 이를 250병상으로 줄여야 했으며 성남에 100병상, 그리고 50병상의 산업병원과 농촌병원 두 군데를 설립키로 했다. 이를 영동프로젝트라고 불렀다. 준비위원회를 구성하여 계획서를 작성했는데, 김일순(의료전달체계), 독일 의사 출신 이성낙(장비), 유승흠 소령(내부관리 운영), 한양대 김광문(건축), 연세대 정법대 최평길(행정체계) 등이 참여했다. 필자는 1977년 봄에 군 복무를 마치고 전임강사로 복직했는데, 계속해서 준비위원회 간사로서 영동프로젝트 계획서 작성에 관여했다.

영동프로젝트가 독일 재정 차관 승인을 받자 독일에서 평가단이 방문했다. 병원 내부 시설은 물론, 우리나라 병원 관리 운영에 대하여도 자료를 요청하였기에 숨이 찼다. 필자가 군에 입대한 1974년 말에 불광동에 있던 가족계획연구원에 컴퓨터 단말기가 설치됐기에 퇴근버스를 타고 불광동에 내려서 매뉴얼을 보고 컴퓨터 사용법을 배웠는데, 독일 평가단이 지적한 부분을 보충해서 이튿날에 수정 자료를 제시하니 평가단원들이 우리 수준이 높은 것에 놀라는 분위기였다.

병원 건립은 순조롭게 진행됐다. 그런데 이미 경기도 성남에는 다른 병원 건립이 승인된 것을 알고, 보사부에 요청해 제외했다. 성남병원 설립자는 ‘경주 최부자’의 16대 종손 최염 씨였다. 최 씨는 병원행정을 배우려고 1982년 봄에 연세대 보건대학원에 입학해서 1984년 8월에 졸업했다.

연세대가 차관병원 건립을 진행하자 ‘라이벌’ 고려대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고려대병원 측에서 김효규 의료원장에게 재정차관 계획서 사본을 요청해서 계획서 사본을 전했다. 고려대병원은 당시 영향력이 컸던, 고려대 법대 출신인 장덕진 씨를 동원, 국무회의에서 독일 재정차관을 승인받고 구로병원과 안산병원을 건립했다. 장덕진 씨는 고시 인원이 극소이던 1960년대 초에  최초로 사시, 행시, 외시를 모두 패스한 뒤 재무부 관료, 대한축구협회 회장, 국회의원, 농림수산부 장관 등을 역임했던 인물. 1979년 박정희 전 대통령 서거 후 야인생활을 하면서 정관계에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가 ‘고려대 병원 프로젝트’가 성사되는 데 일익을 담당했다.

연세대 영동세브란스병원은 1975년 가을부터 7년 반이 걸려 1983년 봄에 개원했고, 고려대 구로병원은 3년도 채 안 되어 1983년 가을에 개원했다. 고려대 구로병원이 들어선 서울 구로구 일대는 당시 수출산업공단이 조성돼 강남지역보다 유동인구가 훨씬 많았다.

에디터 kormedimd@kormed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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