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핫닥터] 심장판막 환자들, 부모처럼 대하며 ‘새 삶’ 선물

⑦서울성모병원 순환기내과 장기육 교수

“이 몸으로 수술을 받을 수가 있을까요?”

지난해 12월2일 서울성모병원 2층 심뇌혈관병원 순환기내과 장기육 교수 진료실. 160㎝가 채 안 되는 키에 37㎏의 앙상한 몸으로 휠체어를 타고 온 최 모 씨(여·52)가 힘들게 호소했다.

최 씨는 30대 초반부터 당뇨병을 앓으며 콩팥이 망가져 투석을 받아왔고 협심증 탓에 스텐트 시술도 받았다. 우심방과 우심실 사이에서 혈류를 조절하는 밸브 역할을 하는 삼첨판막이 기능을 잃어 피가 아래로 역류돼 위장관 출혈, 간경변증 등으로 고통 받고 있었다. S대병원에서 당장 수술해야 한다고 했지만, 뼈밖에 남지 않은 몸으로 수술을 견뎌낼 자신이 없어 수소문 끝에 왔다고 했다.

체력만이 문제는 아니었다. 이론적으로는 사타구니를 뚫고 하대정맥으로 판막을 넣는 것이 최선이었지만 최 씨의 심장 아래 정맥 지름이 정상인의 3배 정도가 될 정도로 부어있어서 판막이 심장으로 떠밀려갈 수도, 대정맥과 간정맥이 합치는 부분이 막힐 수도 있었다.

장 교수가 최 씨를 어떻게 살릴 수 있을지 고민하고 있을 때, 아니나 다를까, 4주 뒤 응급실에서 SOS가 왔다. 최 씨가 혈변, 설사에 끔찍한 복통을 호소하다가 숨을 헉헉거리며 병원에 실려 왔다는 것. 장출혈 탓에 며칠 동안 아무 것도 못 먹었다고 했다. 장 교수는 응급실에서 강심제와 이뇨제를 처방, 증세를 약간 호전시키고, ‘살려야 하는데…’를 되뇌었다. 흉부외과 의사는 수술 중 사망률이 30~40%를 웃돌 것이라고 비관적으로 얘기했다.

전국에서 찾아오는 심장판막 환자를 치료하면서, 밤마다 최 씨의 시술 설계와 시뮬레이션을 하며 초초하게 시간과 싸우던 중, 인터넷에서 번개처럼 해결책을 찾았다. 태웅메디컬의 홈페이지에서였다. 폐동맥에 넣는 인공판막이 크기와 탄성이 적당했고 대장에 넣는 그물망 스텐트를 조합하면 시술이 가능해 보였다. 급히 제품을 구해 시뮬레이션을 한 다음 식품의약품안전처에 새 치료법을 승인해달라고 긴급민원을 넣고, 병원 생명윤리위원회(IRB)에 허가신청을 했다. 최 씨의 남편을 여덟 번 만나서 수술과 새 방법에 대해서 장단점을 설명했고 “수술보다는 새 방법을 시도해보고 싶다”는 동의를 받았다.

최 씨는 입원 4주 뒤 국내 처음으로 ‘경피적 대정맥판막 치환술(CAVI·Trans-catheter Caval Valve Replacement)’을 받고, 기적적으로 기력을 차려서 닷새 뒤 퇴원했다. 며칠 뒤 장 교수에게 전화를 했다. “집 부근으로 운동 겸 다니고 있어요. 숨이 차지 않아요.”

장기육 교수는 심장 판막에 문제가 있는 환자들에게 수술 대신 사타구니와 팔목에 구멍을 내서 장비와 인공판막을 넣어 치료하는 시술의 세계적 권위자다. 한 해 150여명에게 경피적 대동맥판막 치환술(TAVI·Trans-catheter Aortic Valve Implantation)을 시술, 개인으로서는 세계 최다 수준을 기록하고 있으며 경피적 승모판막 치환술(TMVR·Transcatheter Mitral Valve-in-valve Replacement), CAVI 등의 시술법을 개척하고 있다.

장 교수도 수많은 다른 대가들처럼 실패의 쓴맛을 보며 힘든 길을 걸어왔다. 그는 의대 6년과 인턴수련 때 매사 적극적이지 않아 중위권 성적을 맴돌다가 모교 병원의 내과 전공의 시험에서 낙방했다. 군대에 다녀온 뒤 겨우 내과 전공의가 됐지만 처음에는 제대로 의사가 될지 자신이 없었다.

전공의 2년차 때 신장내과에서 근무할 때 의국 도서실 책장에서 무심코 꺼내든 버튼 로저의 《체액·전해질·산염기 평형》이 삶을 송두리째 바꿨다. 인체의 신비를 파고드는 재미가 이런 것이구나, 그는 뒤늦게 공부에 빠져들어서 고된 전공의 시절 짬짬이 눈을 비비며 의학서를 보며 실력을 키웠다. 순환기내과를 돌 때 글렌 바그너의 《매리엇 심전도》를 완파하고, 연말 내과 전공의 1, 2년차 20여 명 대상의 시험에서 1등을 했다. 전공의 3년차 때 서울성모병원에서 건강검진센터를 열자 심초음파를 담당했고, 밤에는 타과에서 의뢰한 환자 심초음파를 판독했다. 다른 병원에서는 교수나 전임의들이 하는 일이었다. 4년차 때 《해리슨의 내과학 원리》를 꼼꼼히 다 읽었고, 내과 전임의 시험에서 전국 1등을 했다.

1997년 서울성모병원 전임의가 돼 스승 승기배 교수와 함께 당시 순환기내과에서 바람이 분 ‘스텐트 시술’의 세계에 빠져들었지만, 2000년 전임강사가 됐을 때 의정부성모병원으로 발령이 났다. 주위에선 ‘정치력’이 없어서 유배당했다고 술렁댔다. 의정부성모병원에는 스텐트 시술을 할 수 있는 심혈관촬영실이 없었다. 순환기내과 교수가 장 교수 혼자여서 낮에는 고혈압, 협심증, 부정맥 등 온갖 환자를 보다가 저녁에 서울성모병원에 협심증 환자를 데리고 와서 스텐트 시술을 해야만 했다. 그러면서도 학계에 분자영상 바람이 불자 실험실을 만들어서 연구에도 매진했다.

장 교수는 분자 영상을 좀 더 깊이 파고들기 위해 2007년 미국 하버드대 매사추세츠종합병원 파룩 재퍼 교수 연구실로 연수를 떠났다. 그곳에선 《해리슨 내과학 원리》의 죽상동맥경화증 분야를 집필한 피터 립비 교수가 있었다. 책에서 보던 대가와 동맥경화 분자영상 연구를 같이 해서 미국심장학회 젊은 연구자상을 받았다.

노력은 배신하지 않고, 열매를 맺는 법. 2009년 서울성모병원이 증축 오픈하면서 본원으로 자리를 옮겨 마음껏 시술하며 협심증 환자들을 살릴 수 있었다. 심근경색, 동맥경화증 등에 대한 국책과제 연구를 수행해서 《서큐레이션》을 비롯한 세계적 학술지에 논문을 발표했다.

2013년 승기배 교수가 서울성모병원 원장으로 부임하자 장 교수는 스승이 맡았던 심혈관촬영실 소장이 됐고, 서울아산병원에서부터 불기 시작한 ‘타비 시술 바람’에 합류했다. 당시에는 장비도 조악했고 밤새 시술하고서도 합병증이 생기기도 했다. 장 교수는 독일에서 온 지도전문가(Proctor) 에버하르트 그루베 박사의 도움을 받아 10건을 성공적으로 시술했고, 2017년부터는 국내 다른 병원 의사들의 지도전문가가 됐다.

장 교수는 지금까지 550여명에게 시술하며 타비 치료법의 개선에 큰 역할을 했다. 전통적 방법은 사타구니 오른쪽에 5.5㎜, 왼쪽 사타구니 두 곳에 2㎜의 구멍을 내서 장비와 판막을 넣어 시술하는데 지혈이 잘 안되거나 혈관이 막히는 위험이 있었다. 수술을 보조하는 의사가 자칫 실수하거나 지혈기기가 오작동하면 긴급히 흉부외과에 수술을 의뢰해야 했다. 또 전통적 시술법으로는 심장을 멈추게 한 뒤 다시 박동케 하고 서맥을 예방하기 위해 사타구니 정맥을 통해서 심장박동기를 넣는데 자칫하면 심장에 구멍을 뚫게 할 위험이 있었다.

장 교수는 논문 검색을 하다가 아주 가는 전선을 넣어 전기를 흐르게 하면 심장박동기를 넣을 필요가 없다는, 프랑스 의사의 아이디어를 찾았다. 장 교수는 여기에서 더 나아가 사타구니에 구멍을 하나 뚫고 팔의 요골동맥에 구멍을 뚫어서 시술하는 방법을 개발했다. 이전 방법으로는 시술 후 환자가 밤새 누워있어야 했지만 장 교수의 새 방법은 6시간만 참으면 된다.

지난해 말에는 10년 전 수술했던 승모판막협착증의 인공판막이 망가지고 대동맥판막협착증이 온 76세 여성에게 타비와 TMVR을 동시 시술하는 데 국내 처음으로 성공했다. TMVR은 사타구니의 정맥으로 가느다란 도관을 통과시켜 심장의 우심방으로 이르게 한 뒤 우심방과 좌심방 사이의 벽에 구멍을 뚫은 다음, 이 구멍을 통해 인공판막을 넣어 고장난 승모판막과 바꾸는 고난도 시술이다.

심장판막질환은 인구 고령화에 따라서 환자가 급증하고 있으며 고령 환자가 많다. 서울성모병원 홈페이지에 있는 장 교수의 진료원칙은 “최고를 지향하며 환자를 내 부모처럼”이다. 장 교수는 첫 환자가 오면 20분 이상 면담을 하고 치료방법을 정한다. 인터넷에는 장 교수에게 타비 시술을 받은 환자들의 감사와 응원의 글들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이들에 따르면 장 교수는 진료 때부터 환자의 말을 경청하며 시술 전후 명쾌한 설명으로도 정평이 나있다.

장 교수의 큰 고민거리는 3000만원이나 하는 고가의 치료비. 보험이 부분적으로만 적용되기 때문에 환자가 판막비용 80%까지 내야 한다. 2018년 어머니를 살리기 위해 집을 팔고 전세로 옮겼다는 딸의 얘기를 듣고 한동안 가슴이 저렸다. 장 교수는 가난한 환자에게 구청 지원사업, 건강보험공단의 재난적의료비지원 등에 대해서 알려주는 등 비용을 줄이는 방법까지 상담한다. 병원 사회사업 팀에 졸라서 1년에 3명씩 전액 치료비를 지원토록 만들기도 했다. 그는 2014년 비영리법인 ‘가심(佳心)’을 설립, 의사 교육, 의료 봉사활동과 함께 환자 의료비 지원사업도 펼치고 있다.

장 교수는 지금도 밤 10시 전에 퇴근하는 것은 꿈도 꾸지 않는다. 주말에도 나와서 회진을 돌고 연구와 함께 환자의 상태를 분석한다. 연구 분야에서는 수지상세포치료로 심근경색 환자의 염증을 누그러뜨려서 심장기능이 떨어지는 치료법을 개발, 1상 임상시험에 들어가기 직전이다. 또 심장판막질환을 근본적으로 예방하기 위해 판막 석회화를 막는 약을 개발 중이다.

장 교수는 지난 10일 밤늦게 연구실에서 환자 분석을 하다가 응급실에서 SOS를 받았다. 협심증과 중증 대동맥판막협착증이 겹쳐 폐에 물이 찼고 수축기 혈압이 70~80㎜HG까지 떨어진 75세 환자였다. 지방의 한 종합병원에서 중환자실에 입원시켜 약물 치료만 받고 있다가 장 교수에게 TAVI 시술을 받은 친척의 조언으로 앰뷸런스를 타고 왔다.

장 교수는 곧바로 혈압을 올리는 약을 처방하고, 컴퓨터단층촬영(CT)을 해서 크기에 맞는 판막을 정했다. 다음날 오전 체외막산소장치(ECMO)를 달고, 심장동맥에 스텐트를 3개 넣는 시술을 하고 이어서 TAVI 시술을 했다. 환자는 이튿날 ECMO를 떼고 3주 동안 기력을 회복해서 21일 퇴원을 앞두고 있다.

“이 환자는 먼저 치료받은 환자 덕분에 살았지요. 병실에 갈 때마다 보호자가 싱글벙글거렸고 이제 퇴원합니다. 심장을 맡은 의사로서의 이런 기쁨과 보람이 육체의 피로를 녹이고도 남지 않을까요?”

    이성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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