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의 변신…그리고 태극기의 의미

[ Dr. 곽경훈의 세상보기]

이탈리아 중부의 조그마한 도시에서 시작한 로마제국은 점차 세력을 넓혀 이탈리아 반도를 지배했다. 이어서 북아프리카의 해상국가 카르타고와 3차례에 걸쳐 100년 남짓 지속한 포에니 전쟁을 벌인 끝에 승리하여 지중해의 패권을 차지한다.

그러나 기원전 2세기 후반부터 기원전 1세기 중반에 이르자 승승장구하며 기세를 올리던 로마제국에 두 가지 위기가 찾아온다.

이른바 ‘동맹시 전쟁’이 첫 번째 위기다. 2등 시민으로 취급받은 이탈리아의 다른 도시가 로마와 동등한 대우를 요구하며 발생한 내전에 해당했고 짧은 혼란을 겪었으나 시민권의 범위를 점차 확대하면서 갈등은 사라졌다.

하지만 두 번째 위기인 노예반란은 조금 달랐다. 로마제국은 팽창주의와 제국주의에 기반해서 그 과정에서 얻는 노예는 사회경제적으로 꼭 필요했다. 따라서 노예반란은 자칫 제국의 근간을 흔들 문제였다. 특히 포에니전쟁에 승리하며 이탈리아 남부 곡창지대에 노예를 이용한 대규모 농장이 자리한 기원전 2세기 중반부터 3차례 대규모 노예반란이 발생했다.

가운데서도 세 번째 노예반란이 가장 위험했다. ‘스파르타쿠스의 반란’이라 불리는 세 번째 노예반란은 무기를 능숙히 다루는 검투노예가 중심이 되었고 초기 진압에 나선 로마군을 물리치면서 평범한 노예가 합류하여 질과 양 모두 이전의 두 차례와 비교해서 뛰어났다. 부랴부랴 크라수스를 중심으로 대규모 군대가 꾸려져 진압에 성공했으나 노예반란의 잠재적 위험을 뼈저리게 실감한 로마 지배층은 일벌백계의 본보기를 만들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포로로 잡힌 노예 수천 명을 십자가형에 처해 카푸아에서 로마로 향하는 주요 도로 주변에 전시했다.

이처럼 로마제국에서 십자가형은 가장 끔찍하고 잔인한 형벌에 해당했다. 커다란 나무십자가에 손과 발, 몸통을 끈으로 묶어 고정하고 고통을 가중하려고 손과 발에 큰 못을 박는다. 그러면 죄수는 온갖 고통을 겪으며 며칠에 걸쳐 서서히 사망한다. (자비를 베풀려고 몇 시간 후 창으로 찌르거나 독약을 먹이기도 했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바울을 비롯한 초기 기독교 지도자 상당수가 십자가의 전복적인 의미에 주목했다. 그들은 제국의 권위를 세우려고 흉악한 범죄자 혹은 위협적인 반체제 인사를 처형할 때 사용하는 십자가를 ‘평등과 사랑’을 내세워 제국의 지배에 항거하는 새로운 사상의 상징으로 삼았다. 그들의 ‘재산, 신분, 민족, 성별과 관계없이 모두 믿음 가운데 평등하다’는 매우 강력하고 위험한 주장이 성공한 덕분에 십자가 역시 공포와 경멸의 상징에서 사랑과 숭배의 상징으로 변신했다.

안타깝게도 이런 상징의 변신이 부정적인 방향으로 흐를 때도 적지 않다. 멀리서 찾을 필요없이 태극기만 봐도 그렇다. 과거에 태극기의 의미는 자유를 상징했고 국가란 공동체를 의미했다. 비록 현실은 힘들어도 태극기를 보면서 우리가 각자 지닌 모든 차이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이란 공동체에서 자유롭고 평등하게 공존할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그러나 오늘 태극기는 자주 극단적이고 편협한 세력의 상징으로 여겨진다. 그런 이유에 지난 삼일절, 거리에서 펄럭이는 태극기가 이전보다 적고 태극기를 마주해도 과거와 달리 묘한 기분에 휩싸였다.

물론 우리 모두에게는 생각하고 말할 자유가 있다. 나와 다른 생각이라고, 불쾌하다고, 모범에 어긋난다고, 억압할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다. 또 ‘태극기 부대’라 불리는 사람의 말과 행동도 대부분은 애국심과 정의감에서 기원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나치게 편협하고 극단으로 치닫는 논리는 그런 애국심과 정의감의 의미마저 퇴락시킨다. 부디 다음 삼일절에는 우리가 태극기를 국가통합의 의미로 흔들 수 있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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