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핫닥터] “약보다 대화로 어린이 배앓이 치료”

④삼성서울병원 소아청소년과 최연호 교수

“의대에 진학해서 의사가 되고 싶은데….” 아버지와 함께 진료실에 들어선 고교생 민우(가명)는 허나, 서 있을 힘조차 없어 보였다. 궤양성 대장염으로 장 전체가 곪아서 배가 뒤틀리는 통증과 설사가 되풀이됐다. 수능시험이 1년도 채 남지 않았는데…. 민우가 꿈을 이루게 진정 돕고 싶었지만, 입시가 문제가 아니었다. 이전 방식으로 치료하면 외과에서 대장을 다 잘라내야 했다.

성균관대 삼성서울병원 소아청소년과 최연호 교수(57)는 민우에게 수술 대신 인플릭시맵 주사를 집중적으로 맞히기로 했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의 기준대로 치료하면 효과를 못 볼 가능성이 커, 샘플 치료제들을 긁어모아 민우에게 집중 투여했다. 최 교수의 바람대로 달포 만에 민우와 가족에게 기적이 일어났다. 시나브로 궤양과 염증이 사라졌고, 민우에겐 화장실에 덜 가고 진득이 앉아 공부할 수 있는 행복이 찾아왔다. 민우는 1년 뒤 진료실에서 최 교수에게 “시험 잘 친 것 같다”고 얘기하더니 얼마 뒤 밝은 목소리로 전해왔다. “선생님, 저 S의대 붙었어요.”

최 교수가 기존 방법이나 심평원의 기준을 뛰어넘는 치료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약의 효과를 모니터링 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춰 적극적 치료를 시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최 교수는 이 같은 ‘약물 모니터링 기반 톱다운 전략’ 등 다양한 무기로 크론병, 궤양성 대장염 등 염증성 장질환 소아청소년 환자 500여명을 치료하고 있는, 소아소화기질환 분야의 세계적 권위자다. 최 교수는 민우처럼 난치성 소화기 질환에 걸린 아이들이 병을 이기고 자라서 희소식을 전해올 때 저절로 흐뭇해진다. 최 교수를 닮은 의사가 되겠다며 의대에 진학한 환자도 다섯 명이나 된다.

최 교수는 소아청소년 염증성 장질환 만의 대가는 아니다. 헬리코박터 파일로리가 빈혈을 유발한다는 것을 밝혀 세계 소아과 교과서를 바꾸게 하기도 했고, 작지만 확실히 나쁜 기억, ‘소확혐’ 때문에 배앓이를 앓고 있는 아이들에게 약 대신 환경을 바꾸게 하는 휴머니즘 진료를 도입해 환자와 가족에게 자신감을 불어넣어주고 있다. 지난해 말 휴머니즘 진료의 철학을 담은 《기억 안아주기》를 발간해 베스트셀러 저술가로 떠오르기도 했다. 최 교수는 또 성균관대 의대 학장으로서 국내 최초로 ‘인성 중심의 절대평가제’를 도입해서 훌륭한 의사들을 양성하는 데에도 앞장서고 있다.

최 교수는 초등학교 고학년 때 한 점쟁이에게서 “의사가 돼 여자들을 상대한다”는 말을 들은 부모의 희망에 따라 어릴 적부터 의사가 되는 것을 당연시했다. 미신은 믿지 않았지만, 사람을 살리는 의사란 직업은 매력적이었고, 가끔씩 ‘점괘대로 산부인과 의사가 되는가?’고 생각하곤 했다.

그러나 서울대 의대 본과 3학년 때 멋진 외모에 품위, 유머를 갖춘 최용 교수의 명강의에 반해서 산부인과 대신 소아과로 진로를 정했다. 그리고 나중에 알았다. 소아청소년과가 엄마인 여자를 주로 상대하는 진료과라는 것을.

최 교수는 청소년 때부터 팔방미인에 어울리는 삶을 살아왔다. 환일고 재학 때에는 창작오페라를 연출하고 악마 역을 연기했다. 1982년 서울대 의대에 들어가서는 예과 1학년 때 농대 황정림, 법대 이철 등과 함께 자신이 작곡한 노래 ‘샛별’로 제6회 MBC 대학가요제 본선에 진출했다.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인문학과 정치, 사회, 예술 등의 서적을 늘 가까이해서 주변 사람들로부터 인문사회학적 혜안을 가진 지식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최 교수는 전공의 2년차 때 최용 교수의 전공인 콩팥 분야를 따라 하기로 결정했고 1년 남짓 콩팥 환자들을 집중적으로 봤다. 군 복무를 마치고 모교에 전임의로 복귀하자 스승은 “개척 분야인 소화기를 전공하는 것이 어떻겠는가?”하며 제안했다. 10개월 동안 서정기 교수의 문하에서 소아청소년 소화기질환의 기본을 닦으니 인천에 새로 생기는 인하대병원에서 교원 모집 공고가 나왔다. 최 교수는 1996년 이립(而立)을 갓 넘긴 32세의 젊은 나이에 인하대병원 교수가 됐다.

최 교수는 정년까지 앞으로 남은 8년을 포함해서 자신의 교수생활 30여 년을 3단계로 나눠 소개했다.

첫 10년 동안은 헬리코박터 파일로리에 매달렸다. 1983년 호주의 베리 마샬과 로빈 워런이 정체를 밝힌 이 세균은 소화기 분야의 핫 이슈였다. 최 교수는 철분 결핍 빈혈에 걸린 고교 체육선수 중에서 헬리코박터 균 감염이 잦은 것을 놓치지 않았다. 외국 논문을 검색했더니 헬리코박터균 감염자 가운데 철분 결핍 빈혈이 있다는 몇몇 보고가 있었다. 최 교수는 체육고 학생 400여명을 검사해서 체육선수들은 합숙하며 함께 식사하기 때문에 헬리코박터 파일로리 감염에 취약하고, 이 때문에 빈혈이 늘어난다는 것을 밝혀냈다. 헬리코박터 균이 염증으로 위궤양 출혈을 일으킬 뿐 아니라 철분 흡수를 방해한다는 것을 규명한 것. 특히 여자선수들은 생리까지 있어서 빈혈에 더 취약했다. 최 교수는 헬리코박터와 빈혈의 관계를 입증한 논문들을 《헬리코박터》, 《미국소화과학회지》 등에 게재했으며, 그의 이론은 소아청소년과의 교과서 중 하나인 《소아소화기영양》에도 실렸다.

최 교수는 2001년 삼성서울병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곳에서 근무하던 대학 1년 선배 백남선 교수가 해외로 의료선교를 떠나면서 ‘좋은 의사’로 적극 추천한 덕분이다. 최 교수는 3년 뒤 헬리코박터 균 감염의 세포 차원의 기초연구를 하기 위해 미국 캘리포니아 주립대 로스앤젤레스 캠퍼스(UCLA) 세포막생리학과로 연수를 갔다. 그러나 미국 연구실에서도, 귀국해서도 아무리 연구에 매달려도 더 이상의 진척이 없었다. 그러던 중 예전에는 뜸했던 환자들이 조금씩 느는 것을 실감했다. 어른에게서 증가한다는 보고가 나오기 시작한 염증성 장 질환 환자들이었다. 염증성 장질환 가운데 어른에게는 궤양성 대장염이 많지만, 소아청소년에게 상대적으로 많은 크론병은 2001년만 해도 1년 신환이 10여명에 불과했지만 지금은 60~70명으로 급증했다.

최 교수가 살펴봤더니 전국에서 환자들이 고통 받고 있었지만 항문의 치루를 제거한다며 칼을 대서 악화되곤 했다. 교과서적 치료는 염증조절약이나 스테로이드제제로 치료하다가 더 이상 듣지 않으면 면역억제제, 종양괴사인자 억제제 등으로 넘어오는 것. 최 교수는 당연해 보이는 치료법에 의문을 품었다. 왜 부작용이 큰 스테로이드 제제부터 처방해야 할까, 처음부터 공격적으로 종양괴사인자억제제를 투여하면 되지 않나? 인플릭시맵이 장기적으로 종양을 유발할 수 있다고 하지만, 스테로이드제제에 비하면 그야말로 새 발의 피 아닌가? 약의 부작용을 제대로 모니터링할 수만 있다면, 처음부터 좋은 약을 쓸 수 있지 않나?

최 교수 팀은 약물 농도, 효과, 내성 등을 모니터링해서 부작용을 예측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해서 공격적으로 인플릭스맵을 투여하는 치료법을 정립해나갔다. 삼성서울병원에서 수련을 하고 임상강사로 근무한 제자인 강빈 경북대병원 교수와 함께 이에 대한 논문을 《크론병과 대장염 저널》 《영양약물치료》 등에 발표해서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미국, 유럽 등의 학회에서는 강연 요청이 잇따랐다.

최 교수는 교수 생활의 나머지 10년을 ‘휴머니즘 진료’에 전력할 계획이다. 복통, 구토, 설사, 변비 등으로 고생하지만 진단에서는 ‘이상 없음’으로 나오는 기능성 장질환을 약 없이 치료하는 것. 부모들은 자녀가 아프니까 무엇인가 해주고 싶고, 많은 의사들이 어설프게 치료를 시도하다가 되레 악화시키곤 한다. 최 교수는 이른바 ‘의원병(醫源病)’이 생기는 현실 앞에서 약 대신 아이가 왜 아픈지 아이, 부모의 얘기를 듣고 주변 환경 등을 종합적으로 분석해 치료하고 있다. 그는 기능성 장질환 뿐 아니라 지방간, 비만인 어린이에게도 약을 쓰지 않고 생활습관을 바꿔 치료한다.

최 교수가 부모들에게 아이를 믿고 기다리라고 제안하면 일부 부모는 실망한 표정으로 떠났지만, 대부분은 처음에는 자책하거나 반성하다가도, 나중에 아이가 약 없이 나아지는 모습을 보면서 오히려 자신감을 얻게 됐다고 전해왔다. 진료실로 실습 온 의대 학생들도 약 처방이 거의 없는 것을 보고 생각이 많이 바뀌었다고 말하곤 한다.

최 교수는 3, 4년 전부터 이런 진료철학을 담은 책을 펴내 보다 많은 부모에게 알려주기를 원했지만, 도저히 시간을 낼 수 없었다. 그런데 신종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 때문에 각종 저녁 모임이 줄면서 기회가 왔다. 4개월 만에 쓴 책 《기억 안아주기: 소학혐, 작지만 나쁜 기억》은 두 달 만에 4쇄를 찍으면서 반향을 일으켰다.

최 교수는 현재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통찰’에 대한 원고를 쓰고 있다. 그는 제자들에게 “의사가 의학지식만으로 환자를 보면 위험하다”고 말한다. 소아의 병을 제대로 진단하려면 환자가 왜 아픈지 아이와 부모 얘기를 제대로 듣고 주변 환경을 종합적으로 분석해야 한다는 것.

최 교수가 2018년 성균관대 의대 학장에 취임해서 ‘인성 기반의 절대 평가제’를 도입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점수만 잘 따는 의사보다 남을 이해하고 더러 손해도 볼 줄 아는 의사로 육성하려는 것이다.

“대학에서는 지독하게 이기적이거나 공감능력이 떨어지는 학생은 뽑지 않는 시스템을 구축했습니다. 의대생들에게는 눈앞의 이익보다 환자들 위해서 자신을 희생할 줄 아는 의사로 육성하고 있습니다. 또 의사 수련 과정에서 이 의사상을 유지할 수 있도록 병원과 협력하고 있지요. 환자를 위한 마음이 어떤 의술보다 우선이라는 것은 환자를 진료하면서 절실히 깨달았지요.”

    이성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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