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라리 내가 아팠으면…” 환자보호자의 ‘번아웃’

[사진=byryo/gettyimagesbank]
암 환자를 가족으로 둔 A씨는 퇴근 후 곧바로 병원으로 간다. 직장인으로서 회사 출퇴근, 환자보호자로서 병원 출퇴근 두 가지를 병행하고 나면 ‘번아웃’에 이른다.

A씨의 상황은 남의 일이 아니다. 현재 다수가 경험하고 있거나, 앞으로 경험할 수 있는 일이다.

정부의 재정적·정책적 지원은 환자의 투병에 집중된다. 그렇다보니 환자보호자의 고충은 소외되는 경향이 있다. 한국환자단체연합회 안기종 대표는 “나는 갑상선암 환자지만, 아내의 백혈병을 계기로 환자보호자로도 20년을 살아왔다”며 “환자는 주연, 환자보호자는 조연이다. 정부나 사회가 환자의 투병에 집중해 환자보호자의 어려움에는 무관심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환자보호자에 대한 인식 개선과 지원 활성화가 필요한 상황이란 의미다.

한국BMS제약이 환자보호자의 날 캠페인의 일환으로 진행한 ‘환자보호자 인식 설문조사’에 따르면 ‘환자보호자=가족’이라는 인식이 강하다. 즉, 가족이 전적으로 책임져야 한다는 구조가 형성돼 있다는 것.

이번 설문조사를 진행한 한국상담학회 대외협력위원장인 서울사이버대학교 상담심리학과 김현아 교수 역시 폐암 투병생활을 한 가족의 보호자로 생활했던 경험이 있기 때문에, 환자보호자의 고충을 잘 이해하고 있다고 전했다.

이번 인식 조사는 20~29세 222명, 30~39세 225명, 40~49세 271명, 50~59세 282명 등 총 1000명을 대상으로 진행됐다. 이들 중 경증환자 보호경험이 있는 사람은 41%, 중증환자 보호 경험자는 33%, 환자보호 경험이 없는 사람은 41%였다.

‘환자보호자=가족’으로 인지, 업무에 간병까지 이중고

조사 결과, 환자보호자하면 연상되는 이미지는 ‘가족’, ‘간병’, ‘힘듦’ 등으로 나타났다. 환자보호자는 가족관계에서 발생하는 것으로 인지하기 때문에, 환자보호자로 적합한 대상 역시 가족을 꼽은 비율이 66%였다. 환자의 법적 보호자 21%, 전문 간병인 13%보다 훨씬 높은 비율이다.

[그림=환자보호자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 한국BMS제약 제공.]
환자보호자는 △식사, 용변 처리 등 거동이 불편한 환자를 육체적으로 지원하고 △치료비, 입원비, 수술비 등 경제적 지원을 하고 △심적으로 힘들어하는 환자를 위한 정서적 지원 △사회적으로 고립되지 않도록 사회적 지원까지 해야 한다는 역할에 대한 기대도 있었다. 이로 인해 환자보호자는 개인의 일상 업무에 간병인 역할까지 해야 하는 이중고를 겪는다.

20대까지는 절반이 안 되는 사람들(42%)이 환자보호자 경험을 하지만, 연령이 증가할수록 경험이 늘어 30대만 되도 이미 절반 이상(53%)이 경험을 하고, 50~59세에 이르면 10명 중 7명이 환자보호자 경험을 하게 된다. 즉, 환자보호 경험은 남의 일이 아닌, 사실은 우리 모두의 일이다.

이번 조사에 의하면 특히 중증환자 보호자들이 겪는 고충이 크다. 중증환자 보호경험은 57%로, 질환별로는 암 30%, 뇌혈관질환 18%, 심장질환 12%, 희귀난치질환이 8%로 나타났다. 경증 보호경험은 69%로, 골절(34%)과 사고로 인한 상해(25%)가 가장 많았다.

중증환자 보호경험은 3.31회, 경증환자 보호경험은 2.71회였고, 경험기간은 중증의 경우 1년 이상이 가장 많았고, 경증은 2주 미만의 짧은 보호 경험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즉, 중증환자를 보호하는 역할을 할 때 장기간 환자를 보호해야 하는 어려움이 발생한다는 것.

간병 형태는 가족 구성원끼리 교대로 공동 간병하는 형태가 중증의 경우 62%, 경증은 57%였다. 혼자 간병을 전담하는 경우는 중증이 11%, 경증이 33%로, 전문 간병인보다 혼자 혹은 가족끼리 책임지는 형태가 많았다.

평균 간병시간은 경증의 경우 하루 4.99시간, 중증은 5.63시간이었다. 만약 보호자가 직업이 있다면 본인의 업무 시간과 수면시간을 제외한 대부분의 시간이 환자 보호자 역할을 하는데 할애된다는 의미다. 1~2주간의 짧은 간병이라면 다행지만, 1년 이상 장기화될 땐 환자보호자의 고통이 매울 클 것이란 점을 짐작해볼 수 있다.

치료비 등 경제적 부담이 크다는 응답은 중증환자 보호자의 65%, 경증환자 보호자의 46%였다. 간병과 일상생활 병행이 어렵다는 응답은 중증에서 71%, 경증에서 48%였다. 즉, 중증환자의 보호자는 경제적 부담도 크지만, 사회구성원으로서 사회적 부담을 매우 크게 느끼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심리적·육체적 에너지 소진…환자보호자 지원 필요

이로 인해 ‘번아웃’에 이르는 경향이 있었다. 번아웃은 주로 감정노동자들의 직무 스트레스로 많이 나타난다. 이번 조사에 의하면 이 같은 심리적 소진은 중증환자를 둔 환자보호자들에게도 빈도 높게 나타났다. 환자보호자 역할을 하면서 체력 소모가 심하고, 환자 치료과정을 지켜보는 과정이 정서적으로 고통스럽고, 정신적 피로감이 높다는 것. 가족 간 의사결정에 다툼이 잦아지고, 역할의 한계를 느끼거나, 내 탓 같고 미안해지는 것도 번아웃 증상으로 나타났다.

김현아 교수는 “가족이 환자보호자 역할을 하면 환자가 겪는 고통을 동일시하면서 그 고통이 분리되지 않고 그대로 전가된다”며 “전문가들과 더불어 해결해야 나가야 할 문제”라고 말했다. 가족의 고통을 분리화하고 객관화하기 어려운 만큼, 고통이 클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차라리 자신이 아팠으면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환자보호자가 심신관리에 어려움을 느끼고 있는 만큼, 김현아 교수는 환자뿐 아니라 환자보호자를 위한 지원 정책도 필요하다고 보았다. △중증환자 보호자를 위한 전문 간병인 제도에 대한 정책적 지원 △가족 갈등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는 예방 조치 △환자보호자를 위한 심리적 요인 개입 △전문간병인과 요양보호사를 양성하는 교육과정에서 보호자의 정서조절과 자기관리 등을 돕는 심리교육 추가 △보호자를 위한 심리상담서비스 제도화 등이다.

한편, 환자보호 경험이 없는 비경험자가 가장 두려워하는 질환은 희귀난치질환(56%)과 암(13%)인 것으로 나타났다. 또, 가장 대비가 필요한 부분은 경제적 지원(65%)이라고 답했고, 전문 간병인과 교대로 보호자 역할을 하겠다는 응답은 33%였다. 환자보호 경험자들이 대부분 가족공동 간병을 하고 있는 것과 달리, 비경험자는 전문 간병인과의 교대가 현실적인 간병 형태라고 답해, 실제 경험자가 느끼는 어려움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보다 클 것으로 분석된다.

    문세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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