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베닥] 보호자 귀띔 따라 백혈병 어린이 마음까지 치료

⑰소아혈액질환 서울성모병원 정낙균 교수

어린이날의 기적, 한·일·인도 감동의 합동작전, ‘코로나 봉쇄’ 뚫고 7200㎞를….

지난 5월5일 국내 언론들은 인도에서 급성백혈병 진단을 받고 천신만고 끝에 귀국한 5세 어린이의 사연을 앞 다퉈 보도했다. 그곳 주재원의 딸이 적혈구, 혈소판 수치는 뚝뚝 떨어지는데 ‘코로나 봉쇄’ 때문에 귀국하지 못하다 인도 정부가 공항을 열어주고, 일본이 항공기를 제공한 덕분에 극적으로 인천공항에 도착했다는 사연이었다. 환자와 보호자는 일본항공(JAL) 특별기를 타고 도쿄까지 6000㎞를 갔고, 그곳에서 1200㎞를 비행해 무사히 귀국했다. 이들이 안절부절못하며 애타게 가려고 했던 곳은 서울성모병원. 이 병원 정낙균 교수(56·소아혈액종양센터장)는 곧바로 아이를 격리병실에 입원시켜 본격적 검사를 끝내고 항암치료에 들어갔다.

서울성모병원에 있는 가톨릭혈액병원 소아혈액종양센터는 무균실 병동 36병상을 비롯해서 총 46개 병상을 갖춘 국내 최대 어린이 혈액암 치료센터로 백혈병을 비롯한 혈액질환 치료율에서 세계 최고 수준. 소아청소년과, 영상의학과, 외과, 진단검사의학과, 병리과 의사들과 전문 간호사의 협진 시스템이 정평이 나있으며 정 교수는 이 센터를 책임지고 있는 어린이 백혈병과 재생불량성빈혈 치료의 최고 권위자다. 정 교수에게는 전국곳곳에서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환자들이 수시로 찾아온다. 아랍에미리트(UAE)에서는 2013년부터 매년 평균 15명 정도의 중증 혈액질환 환자들이 병원에서 조혈모세포 이식을 받는다.

정 교수는 환자들에게 철저한 치료뿐 아니라 따뜻하고 세심한 말에도 신경을 쓰는 의사로 정평이 나있다. 정 교수가 미국 프레드 허친스 암센터에서 실력을 닦고 귀국, 여의도성모병원에서 근무할 때, 해외에서 그를 찾아온 환자의 어머니가 그를 ‘좋은 의사’에서 ‘훌륭한 의사’로 발돋움 하게끔 도왔다. 당시 싱가포르 교포 기업가의 10세 아들이 백혈병이 재발해서 수소문 끝에 성모병원에 입원했다. 여의도성모병원은 혈액질환 치료분야에서 국내 최초의 행진을 이어가고 있었고 그 명성을 듣고 찾아온 것. 어느 날 아침에 환자 회진을 마치고 병실을 나가는데, 환자의 어머니가 살짝 불렀다. 그리고 조용히 말을 건넸다.

“회진돌 때 아이들의 이름을 부르면서 조금이라도 더 관심을 기울이는 게 어떨까요? 아이들은 의사가 자신에게 관심을 갖고 있다는 것을 느끼면 큰 힘이 날 텐데….”

머리를 망치로 맞는 듯, 정신이 번쩍 들었다. 지금까지 환자를 잘 본다고 생각했는데…. 하루 종일 곰곰이 생각했다. 나는 진심으로 가족처럼 환자를 대했는가, 아니면 치료 성과에만 집중했는가, 환자와 보호자의 눈에는 설렁설렁 진료하는 것처럼 비쳐지지 않았을까, 지금부터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그날 이후 정 교수는 환자의 몸뿐 아니라, 환자와 보호자의 마음을 살피는 의사로 거듭 났다.

정 교수는 천주교 재단인 서울 동성중학교에서 영세를 받고, 자신의 종교와 맞는 가톨릭대학교 의대에 진학해서 ‘가톨릭 학생회’의 일원으로 주말마다 의료봉사활동을 펼쳤다. 본과에서 동료들끼리 시험문제를 정리할 때에 소아과를 맡았는데, 문제 정리가 재미있었다. 소아과에 선택 실습 가서 전정식 교수가 내준 과제에 답하는 것도 흥미로웠다. 자타가 함께 소아과를 소명(召命)으로 여기게 됐고, 잠시 내과와 소아과 사이에서 주저했지만, 선배인 정대철 교수가 등을 떠밀자 미련 없이 소아과로 지원했다.

정 교수는 전공의 2년차 때 여의도성모병원에 갔다가 소아 혈액질환 분야 최고 권위자인 김학기 교수의 제자가 됨으로써 ‘피의 세계’에 들어섰다. 당시 병원에서는 20~30명이 늘 입원해있었고 재생불량성빈혈의 경우 전국 환자의 절반이 이곳을 찾았다. 1년 400명의 백혈병 환자를 비롯해서 1200여명의 혈액질환 환자들이 김학기 교수와 팀의 명성을 듣고 몰려왔다. 정 교수는 원래 3개월 지내기로 했지만 6개월을 근무했고, 스승은 “이 분야에 관심이 있는 듯하니 계속 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제안했다. 강남성모병원으로 갔다가 3년차 때 여의도로 돌아와서 소아과 의국장으로 전체 어린이 환자들을 책임지며 골수이식 환자들의 담당의사로서 생명을 구하며 뿌듯함을 느꼈다.

정 교수는 전공의를 마치고 공중보건의 근무 뒤 서울성모병원 전임의(Fellow)로 복귀했지만, 혈액질환 분야에서는 자리가 나지 않았다. 온갖 어린이 환자를 보는 ‘올라운드 플레이어’로 지내며 개원을 해야 하나 고민할 때 결혼 5년째인 아내가 말렸다. “당신은 돈 잘 버는 의사보다는 의미 있는 일을 하는 의사가 어울려요. 좁은 진료실에서 평생 사는 모습, 당신과 맞지 않아요.”

이듬해 스승이 불러서 “강남과 여의도에서는 자리가 나지 않으니 인천성모병원의 한치화 교수 밑에 가있어라”고 지시했다. 그는 정대철 교수, 동기 임현석 현 국립암센터 혈액암센터장 등과 함께 면역학 공부를 하고 쥐 200여 마리를 대상으로 조혈모세포 이식 실험을 하며 실력을 닦았다. 마침내 2년 뒤 여의도성모병원으로 들어와서 김학기, 조빈, 장필상 교수 등과 막강 어린이혈액질환 치료 팀을 꾸려나갔다.

정 교수는 2009년 서울성모병원이 증축해서 재개원하면서 팀과 함께 이곳으로 옮겨 국내외에서 찾아오는 환자들을 보고 있다. 치료 팀에 속한 또 다른 세계적 대가 조빈 교수(대한혈액학회 이사장)는 급성골수성백혈병, 정 교수는 재생불량성빈혈을 비롯한 골수보전증후군과 희귀혈액질환을 맡는 것으로 역할 분담을 했다. 백혈병 중 가장 흔한 림프모구백혈병은 모든 교수가 본다.

“백혈병은 한 해 400명이 발병하고 전체 소아암의 1/3 정도를 차지합니다. 1980년대만 해도 어린이가 백혈병에 걸렸다고 하면 십중팔구는 세상을 떠나야만 했습니다. 항암 치료 뒤 2년 동안 유지되면 완치 판정을 받는데 지금은 새 치료법과 약이 많이 개발돼 세계적으로 80% 이상이 완치됩니다. 저희 병원은 90% 이상 완치율을 보이고 있지요. 재발하면 다른 차원의 항암치료나 조혈모세포 이식을 받게 되는데 아무래도 완치율이 떨어집니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 재발 위험을 미리 검사하고 대처하고 있습니다.”

정 교수 팀은 백혈병 치료 후 미세잔존 세포를 추적해서 재발을 줄이고 완치율을 높이고 있다. 정상세포에는 없는 백혈병 세포의 유전자적 특성을 파악해 항암치료 이후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남아있는 미세한 백혈병 세포를 확인하고 이에 따라 치료를 달리 하고 있는 것.

정 교수는 또 2012년 진단검사의학과 김명신 교수와 함께 난치성 희귀혈액질환중개연구센터를 설립해 소아희귀 혈액질환의 진단 알고리듬을 개발했고, 치료 후 예후에 대한 바이오 마커를 찾아내고 있다. 정 교수는 “진단 키트를 개발해서 우리나라에는 없는 것으로 알려진 병이 의외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밝혀냈고 어린이의 건강을 지키는 데 확실한 무기로 쓸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정 교수는 자신이 치료할 수 없는 영역에서 환자를 살리기 위해서라면 도움을 받는 것도 주저하지 않는다. 최근 암이 두 차례 재발해서 찾아온 10세 어린이는 면역세포에서 암세포를 잘 찾고 파괴할 수 있는 CAR 유전자를 선택, 증폭한 뒤 환자에게 투여하는 카티셀(CAR-T) 치료가 정답이었지만, 국내에서는 허가가 나지 않았다. 다른 병원의 동료 의사에게 도움을 받아 중국에서 치료를 받게끔 도왔다.

정 교수는 부모의 가슴까지 치료하는 의사이다. 병이 심각한 상태에서 백혈병 진단을 받은 환자의 부모들은 대부분 아이의 병을 너무 늦게 발견한데 대해, 또는 부모의 유전 때문이 아닌지 자책한다. 정 교수는 “몇 주 먼저 발견했다고 해서 치료성적이 더 좋아지지 않고 너무 이른 경우에는 병원에서 혈액검사를 받는다고 해서 진단이 되지 않으며 유전가능성도 낮다”며 부모의 짐을 덜어준다. 설령 아이가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갈 경우에도 부모를 불러서 “환자의 보호자로서 최선을 다했다”고 위로한다.

이럴 경우에는 정 교수도 가슴이 먹먹하지만, 주저앉을 수는 없다. 그럴 때에는 완치된 아이들이 보내온 편지를 읽어보기도 하고, 아이들이 그려서 보내온 그림들을 보며 힘을 낸다. 눈을 감고 자신처럼 의대에 진학한 A, 청첩장을 갖고 온 B 등 병을 이겨낸 환자들을 떠올리기도 한다. 지금도 국내외에서 찾아오고 있는 환자들을 생각하며, 혈액질환 99% 완치에 도전하기 위해서!

대한민국 베닥은 의사–환자 매치메이킹 앱 ‘베닥(BeDoc)’에서 각 분야 1위로 선정된 베스트닥터의 삶을 소개하는 연재입니다. 80개 분야에서 의대 교수 연인원 3000명의 추천과 환자들의 평점을 합산해서 선정된 베스트닥터의 삶을 통해 참의사의 본모습을 보여드립니다. 여러분의 관심과 참여는 베닥 선정을 통한 참의사상 확립에 큰 힘이 됩니다.

 

    이성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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