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 산부인과 명의들 탄생 배경은?

[유승흠의 대한민국의료실록] ⑧산부인과 전성시대

국내 첫 여성 전문병원을 표방한 제일병원에서는 출산 아기에게 발 도장을 찍어주는 마케팅을 펼쳐서 최근까지 이어왔다. 사진은 1994년 새해 첫 아기의 발 도장.

지금은 산부인과가 의대생들이 기피하는 전공이 되었지만 1960, 70년대만 하더라도 그렇지 않았다. ‘내외산소(내과 외과 산부인과 소아과)’ 기본과의 하나로 의대생들이 선망하는 과였다.

1960년대 산부인과 의사 한국남은 KBS 라디오 ‘재치문답’과 동아방송의 ‘유쾌한 응접실’ 등에 출연하면서 박학한 지식을 자랑했고, 전국 곳곳의 ‘산부인과 명의’들에게 환자들이 몰렸다.  산부인과에서 아기를 낳는 문화가 시작됐고, 정부의 인구정책에 맞물려 중절 수술 환자도 종종 있었다. 당시에는 ‘산부인과’ 간판이 걸려있는 의원에 여성 질환이 아닌 병을 앓는 환자들이 찾아오는 경우가 많았고, 심지어 남자들도 찾아왔다.

평북 출신으로 서울대 의대를 졸업하고 6․25 전쟁 때 의대 동문들과 의용군을 조직해서 평양탈환작전에 참전한 박영하는 1956년 중령으로 예편한 뒤 서울 중구 을지로 4가에 박산부인과의원을 개원했다. 박영하는 “의사는 한 시도 환자를 떠날 수 없다”며 병원 입원실을 가정집으로 개조해서 일요일에도 오후2시까지 환자를 봤다.

박 원장은 1년 365일 휴일 없이 진료를 하면서 박영하산부인과로 이름을 바꿨다가 1967년 개인병원을 공익법인화해서 을지병원을 설립했다. 현재 서울 노원, 강남, 그리고 대전, 의정부 등에 병원을 갖춘 을지의료원은 이렇게 을지로에서 생겨나서 이름이 붙었다.

1960년에는 서울 을지로 3가에 차병원 그룹의 모태인 차산부인과가 개원했다. 설립자 차경섭 은 평북 출신으로 1941년에 세브란스의전(현 연세대 의대)을 졸업했다. 그는 대구 동산병원에서 인턴을 마치고 평북 영변에서 개원했다가 공산 치하를 벗어나 월남했다. 1955년 미국 세인트루이스대학교 의대에서 유학하고 귀국해서 개인 의원을 차렸다.

김동길 연세대학교 명예교수는 자신이 평생 만난 의사 가운데 2명의 성현군자로 장기려와 함께 차경섭을 꼽았다. 차경섭은 연구하는 의사로서 이화여대 의대 교수, 연세대 의대 외래교수, 고황재단 이사장 등을 겸임했다. 그는 인문학과 사회과학에 달통한 지성인으로 개원가에 있을 때에도 의학서를 놓지 않았다. 자신의 병원에서도 공부하는 분위기를 조성, 매일 아침 7시에 세미나를 개최해서 해외의 논문을 함께 읽었다.

차경섭은 낙태해 달라고 찾아온 산모들을 설득해서 돌려보내곤 했는데, 덕분에 생명을 지킨 아이가 커서 감사 인사를 하러 찾아온 일화도 유명하다. 차경섭의 부인 장보섭은 병원 옥상의 간장독에다 장을 담그고 직접 고른 미역으로 산모에게 미역국을 끓여줘 환자들의 인기를 끌었다.

1963년 12월 5일 일간지에 ‘산부인과 전문병원, 제일병원’의 개원 공고가 실렸다. 산부인과 전문의로 미국에서 수련을 받은 함경도 출신 노경병과 일본에서 수련 받은 경상도 출신 이동희, 세브란스병원의 조교수 두 명이 기존의 ‘서울부인암센터’를 바탕으로 여성 전문병원을 표방하고 합자회사 형태의 병원을 설립한 것. 두 의사는 1948년에 세브란스의대(현 연세대 의대)을 졸업한 동기동창으로 이동희는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의 사촌 형이다.

산부인과 중심인 제일병원에서는 출산한 아기의 첫 울음소리를 녹음테이프에 담고, 아기 발바닥을 인주에 찍어서 ‘출산 기념 선물’로 산모에게 줬다. 당시에는 병원에서 이런 것까지 하느냐고 말이 많았다. 요즘은 당연시하지만, ‘병원 마케팅’의 선구적 모델을 보여준 것이 아닐까?

제일병원은 규모에 비해서 외래환자가 많았지만 별로 좁게 느껴지지 않았는데, 외래 환자의 동선을 효율적으로 관리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제일병원에 가서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면 어디선가 직원이 다가와 안내를 해주는 것도 당시로서는 이색적이었다.

노경병은 제일병원이 삼성의료원에 편입될 무렵, 강남구 대치동에 영동제일병원을 차렸는데, 이 병원은 나중에 미즈메디병원으로 성장했다. 미즈메디병원 노성일 이사장과 차병원그룹 차광렬 이사장은 연세대 의대 77년 졸업 동기이다.

1969년에 전북 출신 여의사가 인천시 중구 용동에서 지상 9층, 지하 1층의 산부인과 병원을 열었다. 서울대 의대를 졸업한 ‘여걸’ 이길여는 1958년부터 6년을 같은 자리에서 자성의원을 운영하다가 도미해서 매리 이머큘리트병원에서 인턴, 퀸즈종합병원에서 레지던트를 마치고 귀국했다.

이 병원에는 당시 고급 호텔에만 있던 엘리베이터가 있었고, 초음파 의료기기를 통해서 태아의 건강 상태를 확인할 수 있었다. 산모에게는 굴과 쇠고기를 넣어 끓인 미역국을 제공했다.

당시 형편이 어려워 진료비를 못 내고 도망가는 환자들이 많아서 병원들은 보증금 명목의 돈을 따로 받았는데, 이길여는 ‘무보증금제도’를 도입, 병원 입구와 수납 창고에 “보증금 없이도 치료받을 수 있다”고 알렸다. 형편이 어려운 환자들은 진료비 대신에 쌀, 생선, 고구마, 배추 등을 가져오기도 했다.

이길여는 늘 청진기를 가슴에 품고 다녀 차가운 금속체가 환자 몸에 닿지 않도록 배려했고, 차가운 고무장갑에 임부가 놀라지 않도록 항상 따뜻한 소독 물에 담가뒀다. 또 미국에서 배운 대로 환자들에게 기운을 북돋우는 말을 전하고 병과 치료에 대해 상세히 설명했다. 직원들에게 요일별로 과목을 바꿔 친절교육, 영어회화, 여성과 질환, 부인과와 산과 등의 교육을 시켰고 이를 바탕으로 ‘길병원 신화’를 써갔다.

에디터 kormedimd@kormed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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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의 댓글
  1. 김영섭

    글 잘 읽었습니다.
    “미즈메디병원 노성일 이사장(노경병의 아들)과 차병원그룹 차광렬 이사장(차경섭의 아들)은 연세대 의대 77년 졸업 동기이다.”로 보완하면 더 좋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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