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404호 (2020-04-09일자)

휴 헤프너가 ‘n번방 사건’ 알았다면?

1926년 오늘, 우리나라에서 ‘헤픈 놈’이라고도 불리는, 휴 헤프너가 태어났습니다. 《플레이보이》 왕국의 황제였던 헤프너는 보수적 중산층 감리교 집안에서 태어났고 고교를 졸업하고 군대에 입대합니다. 고교 때부터 사귄 여자 친구랑 약혼하고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고 돌아오니, 약혼녀로부터 외도 고백을 듣습니다. 엄청난 충격을 받았지만 용서하고 결혼하지요.

헤프너는 육군에서 기자로 근무하다 제대한 뒤 대학과 대학원을 나와서 남성잡지 《에스콰이어》에 기자로 취업합니다. 급여 갈등 때문에 퇴사하고 은행대출금 600달러에 어머니를 비롯한 투자가들로부터 8,000달러를 투자 받아 《플레이보이》를 창간합니다.

헤프너는 최대 발행부수 7만 부 정도를 예상했지만, 마릴린 먼로가 표지모델로 나온 첫 호부터 히트를 치더니 창간 5돌 때 100만 부를 넘겼지요.  《에스콰이어》를 가뿐히 제칩니다. 최대 560만 부까지 찍었지만 지금은 30만 부까지 떨어졌습니다. 월간지였다가 계간지로 바뀌었고요. 2016년 누드사진을 게재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가 이듬해 뒤집기도 했지요.

《플레이보이》를 도색잡지로만 아는 사람이 많지만, 뜨거운 인물들의 인터뷰로 유명합니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마르틴 루터 킹, 피델 카스트로, 장 폴 사르트르, 존 레논, 스티브 잡스 등이 초대됐으며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1990년 3월호(왼쪽 사진)와 2004년 10월호에 두 번이나 등장했습니다.

구글이 《플레이보이》 때문에 나스닥 상장을 못할 뻔한 일화도 유명하지요. 미국에서는 공개를 앞둔 기업에게 언론과의 접촉을 금지하고 있는데, 《LA타임스》가 구글 창업자들이 플레이보이와 인터뷰한 것을 문제 삼았습니다. 나스닥 상장 심사위원회가 “뇌와 인터넷을 연결하는 세상을 만들겠다”는 구글 창업자들의 인터뷰 내용을 보고 황당한 장난으로 여긴 탓에 무사히 넘어 갔지만….

헤프너는 여성이 남성에 낮밤 모두 종속적인 것이 당연시될 때 “남녀가 동등하게 성생활을 즐겨야 한다”고 주장했고, 여성의 피임약 복용과 낙태선택권을 지지했습니다. 흑인이 공공시설을 이용하는 데 제한이 있던 때, 흑인을 자신의 파티에 초대하기도 했습니다. 파티 모습이 TV를 통해 방영되자 백인의 항의가 쇄도하고 광고가 해약되기도 했지만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헤프너는 《플레이보이》 창간 50돌 행사에서 자신의 묘비명을 미리 공개했습니다.

“성을 끔찍하게 여기는 위선적 시각을 바꾸는데 역할을 좀 했고, 그렇게 하면서 많이 즐거웠던 사람으로 기억되기 바란다(I’d like to be remembered as someone who played some part in changing our hurtful and hypocritical views on sex and had a lot of fun doing it).”

우리 사회에서는 성(性)이 여전히 끔찍하게 여겨지고, 위선적 시각에 덮여있지 않은가요?

그저께 대한성학회가 ‘n번방 사건을 비롯한 디지털 성 범죄’에 대한 성명을 발표했는데, 정부에게 규제 위주의 성문제 대책이 한계에 이르렀음을 인정하라고 요구했습니다. 성을 숨기고, 억누를 때 음지에서 범죄와 결합할 가능성이 크며, 성의 즐거움을 건강하게 누릴 권리가 인정될 때 은밀하게 거래되는 성폭력이 줄어들 수 있다고 선언했지요.

우리나라 성 정책은 교장, 목사, 성폭력 피해자 상담가, 학부모 등, 성을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들과 공무원들이 함께 정하지요. 제대로 된 인식·실태 조사도 없고 의학자, 철학자, 심리학자, 과학자 등의 의견을 들어볼 생각도 없는 듯합니다. 성폭력은 성의 문제라기보다는 폭력의 문제인데도, 자꾸 성 문제로 만들려고 합니다. 지난 주말에는 천주교 수도자 단체가 “이번 디지털 성범죄의 본질은 ‘음란’이 아니라 ‘지배와 폭력’”이라고 규정하기까지 했지요.

성학회는 사회 구성원들이 성의 권리, 의무를 포함하는 ‘성 시민성(Sexual Citizenship)’을 공유하게끔 돕고, 국제 기준에 맞는 ‘포괄적 성교육(Comprehensive Sexuality Education)’을 도입하라고 촉구했는데 구체적으로 무엇부터 시작해야 할까요? 성에 대해서 이성적으로 자유롭게 이야기하는 것, 언제 가능할까요?


오늘의 음악


봄 음악을 두 곡 준비했습니다. 첫 곡은 펠릭스 멘델스존의 ‘무언가’ 중 ‘봄의 노래’입니다. 이규서가 지휘하는 오케스트라 앙상블 서울의 연주로 듣겠습니다. BTS의 ‘봄날’ 이어집니다. 유튜브 영상 조회 수가 3억이 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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