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승 뜻 이어 여성 생명-상실감 함께 챙기는 ‘칼잡이’

[대한민국 베닥] ⑩유방암 분야 정준 교수

넘치는 카리스마, 호방하고 화끈한 성격, 시원시원한 언변…. ‘칼잡이’로 불리는 외과의사라면 떠올리기 쉬운 이미지다. 연세대 강남세브란스병원 외과 정준 교수(54)는 이런 이미지와 거리가 먼 의사다. 호탕하다고 하기 어려울뿐더러 사근사근하지도 못하지만, 환자들은 ‘속정 깊은 의사’로 여기고 따른다. 인터넷 유방암 환우 커뮤니티에선 “무뚝뚝하지만 잘 챙겨주는 쌤‘이라는 평가가 대부분이다.

정 교수는 동료의사들로부터는 “내과의사 같다”는 평판을 듣는다. 수술 전후 철두철미하게 환자의 상태를 체크하고, 수술 뒤 환자의 약물치료까지 챙긴다. 환자의 불안감과 상실감을 줄이기 위해서 병원 오는 시간과 횟수에도 신경을 쓴다. 정 교수는 어쩌면 자신의 내성적 성격과 맞는 내과 의사가 될 뻔 했고, 외과 의사가 됐다가 기초의학자로 길을 바꿀 뻔도 했다.

정 교수는 인턴 때 내과를 희망했지만, 내과 주임교수로부터 “성적이 안심할 수준이 안 된다”는 얘기를 듣고, ‘재수를 각오하고 지원해야 하나’ 진로를 망설였다. 전공의였던 최진섭, 김경식, 오정탁 현 연세대 의대 교수들이 함께 외과 지원을 권유하지 않았더라면….

그는 전공의를 마치고 지훈상 교수 문하의 전임의로서 간담췌장 수술을 맡았다. 부산 메리놀병원에서 외과 의사로 이름을 떨치던 부친 정동일 박사가 꿈꿨던 간이식수술을 자신이 할 수 있다는 생각에 괜스레 효자가 된 듯했다. 그러나 환자들을 수술할수록, 암에 대해서 제대로 공부하지 않고는 좋은 의사가 되지 못할 것 같다는 위기감이 떠나지 않았다.

정 교수는 세계 각국의 암 병원에 연수 지원서를 냈다가 회신이 없어 고민할 때 MD앤더슨암센터에 연수 중이던 윤동섭 현 강남세브란스병원장으로부터 “내 자리를 물려줄 수 있는지 알아보겠다”는 소식을 들었고, 마침내 길이 열렸다.

그는 전임의를 마치고 교수직이 나지 않은 상태에서 자비를 들여 연수를 떠났다. 스승인 병리학과의 복단 체르니악 교수는 염색체 23개의 특성을 연구하고 데이터를 정리해줄 연구자가 없어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정 교수가 몇 달 동안 연구실에서 살다시피하면서 이 문제를 해결했다. 스승은 정 교수를 불러서 “병리학을 전공하겠다면 세계 어느 병원이라도 소개시켜주겠다”고 제안했다.

정 교수는 세계적 암 연구자가 될 것을 꿈꾸며 거취를 알아보다가 의대 동기인 정웅윤 현 세브란스병원 외과 교수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그는 인사를 마치자마자 박정수 외과 과장을 바꿔줬다. “이희대 교수가 올 초 대장암 수술을 받았는데 재발했으니 귀국해서 도와줘야겠다.”

유방은 생각지도 않은 분야인데…. 정 교수는 같은 병원에서 유방암 수술을 담당한 펀다 메릭 교수를 찾아가서 가르침을 부탁했다. 그는 6개월 동안 메릭 교수가 집도할 때마다 수술실에 따라 들어가서 100명의 수술 장면을 톺아보고 이듬해 초 귀국했다. ‘새 스승’인 이희대 교수는 핼쑥하고 건조한 얼굴로 대장암과 투병하면서 환자를 보고 있었다.

고 이희대 교수

이 교수는 수술을 받고도 병원 기획실장을 맡을 정도로 ‘능력자’이면서 풍부한 교양에다 다방면에 인맥을 갖춘 의사였다. 그는 세계 학회의 최신 경향을 공부하며 어떡해서든 ‘여성의 상징’을 최대한 지켜주려고 노력했다. 이 교수는 1991년 다른 의사들은 유방암 환자의 유방 전체를 도려낼 때 국내 최초로 유방보존술을 도입했다. 당시 선배 의사들로부터 “암은 뿌리째 제거하는 것이 원칙인데 제 정신이냐?”라는 비난을 받으면서 유방 보존율을 24%에서 37% 이상으로 올렸다. 그는 1998년 유방암 수술 때 전이를 우려해서 무조건 겨드랑이 림프절까지 도려내던 기존 수술법에서 벗어나서 유방암이 림프절로 전이되는 길목을 검사해서 안전하면 림프절을 보존하는 ‘겨드랑이 감시 림프절 절제술’을 도입했다.

스승은 암이 진행되자 기독교에 귀의해서 “나는 비록 4기암이지만 하느님이 생명의 4기를 준비했을 것이므로 낙담하지 않는다”면서 환자를 봤다. 환자들과 매주 기도회를 열고, 환자와 걷기대회를 개최하는 등 자신도 환자이면서 유방암 환자를 챙겼다. 정 교수는 스승에게서 환자 사랑을 온몸으로 배웠다.

정 교수는 6개월 스승의 수술실에서 돕다가 ‘독립’했다. 이 교수는 제자에게 “좋은 외과의사는 독수리의 눈과 사자의 마음, 여자의 손으로 수술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스승은 유방암학회에서는 ‘굴러온 돌’이었던 정 교수를 학회와 모임에 데리고 다니며 일일이 의사들을 소개해줬다.

2010년에는 몇 번씩 재발해서 방사선 치료를 거듭하면서도 제자를 불러서 “해외연수를 가야 할 때가 됐으니 내 걱정 말고 다녀와라”고 제안했다. 정 교수는 하버드대 다너 파버 암연구소에서 전이할 곳을 찾아 핏속을 돌아다니는 암세포의 성질에 대해 연구했다.

정 교수가 귀국하고 2년 뒤 스승은 10년 투병 끝에 천국으로 떠났다. 정 교수는 “내성적 성격 때문에 스승에게 존경의 마음을 적극 표시하지 못한 것이 늘 아쉽다”고 말한다. 그러나 주위에선 스승의 의사 정신과 못다 한 환자 사랑이 정 교수에게 그대로 옮겨졌다고 말한다. 겨드랑이 감시 림프절 수술을 이어받아서 발전시켰고, 매주 목요일 저녁 환자들과 함께 기도하는 ‘힐링 터치’ 모임도 이어갔다.

2011년 이병석 병원장이 유방암센터 발전방안에 대해서 묻자, 정 교수는 유럽에서 막 보급되고 있던 ‘수술 중 방사선 치료’를 제시했다. 암을 수술하는 자리에서 방사선 치료를 하면 나중에 방사선 치료 횟수를 줄일 수가 있다는 것. 그러나 식품의약품안전처로부터 안전성과 효과를 인증받았지만, 보건의료연구원의 신의료기술 승인이 나지 않았다.

정 교수는 의료장비 회사를 설득해서 환자에게 무료로 수술토록 했다. 환자 215명을 수술해서 ‘가슴이 작은 동양 여성도 서구 여성과 마찬가지로 효과적’이라는 것을 입증, 미국의 《유방암연구치료》(BCRT)에 발표했다. 2018년 정부로부터 제한적 의료기술로 인정받고 정상적으로 환자를 수술하게 됐다.

정 교수는 “이 수술법은 환자의 불편을 최소화하면서, 기존 단독수술 후 방사선 치료에 비해 효과가 뒤지지 않는다는 것이 입증됐다”면서 “지금은 세계 40여 개 병원과 함께 기존 수술보다 효과가 더 좋은지 검증하고 있다”고 말했다.

강남세브란스병원에서는 정 교수가 환자가 가급적 빨리 치료받을 수 있도록 애쓰는 의사로 잘 알려져 있다. 정 교수는 환자가 상실감을 덜 느끼도록 유방성형에 대해서 성형외과 노태석 교수와 식당에서도, 엘리베이터나 복도에서도 늘 의논한다. 노 교수는 “정 교수가 환자의 고민에 대해 늘 이야기하기 때문에 환자의 상태를 잘 알게 된 내가 대신 환자의 상실감을 다독여주기도 한다”고 말했다.

정 교수는 스승과 수많은 환자들을 잃게 한, 암의 전이에 대한 연구에도 최선을 다하고 있다. 그는 수술 환자를 장기 추적해서 ‘LOXL2 효소가 유방암 환자의 생존 및 전이에 중요한 예후 인자’가 된다는 것을 세계 최초로 밝혀냈다. 또 ‘에스트로겐 수용체 양성 유방암 환자는 재발 방지를 위해 지속적 항호르몬치료를 받아야 한다’는 내용의 연구 성과를 잇달아 내놓았다. 그는 매달 제자들과 유방암과 관련한 국제학술지 논문 100편 이상을 검토하고 토론하며, 암 연구의 넓이와 깊이를 더하고 있다.

정 교수는 암세포가 사라진 환자의 건강도 끝까지 챙겨 진료실에서는 10년 이상 찾아오는 환자도 수두룩하다. 다른 병원에선 보통 5년 뒤에는 특별한 이유가 없으면 보지 않지만, 그는 이후에도 매년 한 번씩 환자를 본다.

“얼마 전에는 14년 전 수술한 환자가 건강하게 진료실에 들어왔습니다. 당시 림프절 10여 곳에 전이됐는데 잘 치료됐고 지금도 아주 건강해요. 이런 게 가장 큰 보람이지요.”

대한민국 베닥은 의사–환자 매치메이킹 앱 ‘베닥(BeDoc)’에서 각 분야 1위로 선정된 베스트닥터의 삶을 소개하는 연재입니다. 80개 분야에서 의대 교수 연인원 3000명의 추천과 환자들의 평점을 합산해서 선정된 베스트닥터의 삶을 통해 참의사의 본모습을 보여드립니다. 여러분의 관심과 참여는 베닥 선정을 통한 참의사상 확립에 큰 힘이 됩니다.

 

 

이성주 기자 stein33@kormed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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