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극복 중심병원은 북유럽 3국의 선물”

[유승흠의 대한민국의료실록] ⑦국립중앙의료원의 출범

1958년 10월 2일 국립중앙의료원 준공식에 참석한 북유럽 3국의 간호사들. 이들은 가난한 환자들을 진료하면서 한국 간호사들 교육에도 크게 기여했다.(사진=국가기록원)

코로나-19 확진환자가 급증하면서 국립중앙의료원 상황실에서 전국의 중증 환자 이송을 직접 통제하기로 했다. 이처럼 전염병이 기승을 부리면 국립중앙의료원의 중요성이 부각된다. 이 병원은 스칸디나비아 북유럽 3개국과 UN한국재건단(UNKRA)의 재정 지원으로 1958년에 개원하였는데, 다들 메디컬센터라고 하였다.

6.25 전쟁이 발발하자 UN 회원국 가운데 스웨덴, 덴마크, 노르웨이의 북유럽 3국은 의료 구호 활동으로 우리나라를 도왔다. 스웨덴은 부산에 군야전병원단을 파견했고, 노르웨이는 이동외과병원을 편성해 동두천에서 미 제1군단을 직접 지원하며 민간인을 위한 외래환자 진료소도 운영했다. 특히 덴마크는 4개의 수술실과 356개의 병상을 갖춘 유틀란디아 병원선(病院船)을 파견해 UN 군인 4,981명과 수 만 명의 한국 민간인을 치료했다. 4,000명의 간호사 가운데 선발된 42명의 간호사는 천사로 불렸고, 배는 ‘천사 병원선’이라고 불렸다.

전쟁이 끝나고 북유럽 3국의 인력은 본국으로 돌아가려 했는데, 우리 정부는 계속 남아 의료 지원 활동을 해달라고 요청했다. 정부는 서울 을지로 6가 서울시립시민병원 터에 국립의료원을 설치하기로 했다. 병원 건설과 운영에 들어간 523만3000달러는 우리 정부와 북유럽 3국, UNKRA가 분담했다. 이 병원은 스칸디나비아 반도 3국이 참여했다고 해서 스칸디나비아 병원으로 불리기도 했다.

1958년 10월 2일 열린 개원식에는 이승만 대통령과 북유럽 3국 정부 대표, 대사 등이 참석했다. 7층 철근 콘크리트 건물에 총 건평 2만3140㎡(7000평)에 465 병상을 갖췄다. 650명의 한국인 직원과 의사·간호사·행정직원 등 북유럽 3국에서 파견된 인력 89명이 근무했다. 파견 인력이 병원 경영을 주도했고 김기홍, 김종설 박사 등 영어 실력이 뛰어난 의사들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개원 후 국립중앙의료원에는 외래환자가 밀려들었다. 시설도 최고 수준이었지만 전체 환자의 75%를 국비로 지원했기에 ‘가난한 환자의 천국’이었다. 국내 거주하는 외국인에게도 인기가 높아서 병원장과 북유럽 3국 사절단장이 합의해 ‘외국인 환자 구좌’를 개설해 치료비를 달러로 받기도 했다. 국립중앙의료원은 설립 후 10년간 북유럽 3국과 우리 정부가 공동 운영하다 1968년 운영권이 우리 정부로 완전히 넘어왔다.

국립의료원이 자리를 잡는 데에는 김기홍 박사의 공이 컸다. 김기홍은 국립중앙의료원 창설의 공로를 인정받아 1958년 10월 보건사회부 장관으로부터 의무사로 임명받고 국립중앙의료원에서의 생활을 시작했다. 이듬해에는 의무관으로 임명됐다. 1960년 10월 재단법인 우석학원 산하 수도의과대학으로 자리를 옮길 때까지 수석의무관으로 근무했다.

그는 1921년에 함경북도 명천에서 태어나 경기공립중학교(현 경기고)를 거쳐 도쿄제국대학 의학부에 다니다가 1944년 귀국해서 경성제국대학 의학부로 옮겼다가 서울대 의대를 1회로 졸업하였다. 한국전쟁에 자원입대하여 8년간 복무하면서 임상병리학의 초석을 마련하였다.

김 박사는 국립의료원을 거쳐 1960년에 수도의대(현 고려대 의대) 병원장을 역임하였고, 1972년에 한양대 의대 교수로 부임하여 임상병리학을 발전시키면서 학장, 병원장을 역임하여 한양대학교 의료원이 성장 발전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대한혈액학회장, 대한병리학회장, 대한의사협회 부회장 등을 역임했고 1986년에 작고했다. 한세그룹 회장인 아들 김동녕이 선친의 호를 따서 ‘의당학술상’을 만들어 매년 의사협회에서 시상하고 있다.

김기홍은 헌혈운동에도 큰 발자취를 남겼다. 당시 병원에서 필요한 혈액은 돈을 주고 샀다. 누구나 배가 고팠던 시절, 피를 팔면 며칠 허기를 달랠 수 있었기에 서울 서대문 적십자병원 앞에선 사람들이 줄을 서서 매혈을 기다렸다. 김 박사는 1975년 대한혈액관리협회 회장으로 선임된 뒤 헌혈예치운동을 벌여 약 4년 만에 의료용 혈액의 전량을 헌혈로 대치한 업적을 남겼다.

헌혈운동에는 이삼열 박사도 큰 역할을 했다. 그는 1926년에 함흥에서 태어나 함남중학교를 다녔고, 1948년 연세대 의대를 졸업했다.1954년에 도미하여 4년 간 수련을 받고 귀국해서 세브란스 중앙검사실 책임자로 부임했다. 검사실을 임상병리과로 변경하고, 국내 최초로 임상병리 전공의 수련과정을 실시했다.

이삼열은 병원 교직원이 매월 한번 씩 헌혈하도록 적극 권장했다. 1964년에 학생을 중심으로 헌혈운동을 시작하였으며, 신촌 거리에 ‘헌혈의 집’을 만들었다. 그는 여러 기독교 의사 모임을 모아 1965년에 한국기독의사회를 창립할 때 적극 활약하여 초대 총무로 선임됐고, 세계기독의사회의 부회장으로 국제교류에도 지대한 역할을 하였다. 2015년에 작고하였다.

국립의료원의 역사에서는 1962년 이 병원에 간호과장으로 부임한 유순한(1912~2003)을 빼놓을 수가 없다. 1933년 평양기독병원 간호과를 졸업한 유순한은 간호업무에 종사하지 않고 평범한 가정주부로 지냈는데, 유한양행을 창립한 큰오빠 유일한의 제안에 따라 광복 후 미국에 가서 글렌데일병원 간호학교 특별생으로 졸업하고 로마린다병원, 카이저재단병원 주임간호사 등 6년의 수련 경력을 쌓았다.

그는 귀국하여 청량리의 서울위생병원(현 삼육서울병원)에서 근무하다가 서울대학교병원 간호과장으로 임명받아 2년 근무했다.

유순한은 미국식 병원행정에 익숙했기에 의사에게 고분고분하여야 했던 당시 분위기로는 병원장을 비롯한 고위직과의 관계가 원만하지 않아서, 전남대병원 간호과장으로 전출되어 2년 근무하다가 국립의료원에 임명받아서 8년간 근무했다. 병원장이 간호과장을 다루기가 쉽지 않았을 즈음에 유순한은 국립보건원 훈련부 보건간호담당관으로 발령받게 된 것이다.

유순한이 발령받을 당시 국립의료원 간호사들이 파업을 결의했다. 국립보건원으로 가게 된 유순한은 그 동안 간호업무를 충실히 하여온 간호사들의 파업을 적극 설득해서 진정시켰다. 간호계에서는 처음 있었던 일이었다.

유순한은 우리나라 최초로 1967년에 국제적십자사 나이팅게일기장을 받았고, 1972년 공직 퇴임 후 퇴직금 전액을 간호사 장학금으로 내놓았다. 또, 부산에서 청십자운동을 펼치던 장기려 박사를 도와서 청십자사회복지회 부이사장, 부산 생명의 전화 이사장 등을 맡으면서 사회복지 및 청소년사업을 펼쳤다.

그는 자신이 소유하는 유한양행 주식을 청십자사회복지회, 부산 생명의 전화에 잇따라 기부하였고, 1995년에는 소유 주식을 전부 유한재단에 기부하였다. 그는 2003년 12월 31일 작고하면서 27평짜리 아파트 한 채만 유족에게 남기고 나머지 재산은 모두 사회에 환원한 것으로 드러나서 사람들의 옷깃을 여미게 했다.

    유승흠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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