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후 한국 의사들은 왜 미국에 갔나?

[유승흠의 대한민국의료실록] ①의료 시스템 태동기

전쟁의 화마가 덮쳤을 때 UN 회원국들이 파견한 의료진은 군인뿐 아니라 민간인들도 구했다. 덴마크가 파견한 유틀란디아 병원선(病院船)에서 간호사들이 어린이 환자를 돌보고 있다.

광복이 됐다. 평균수명 47세의 헐벗고 굶주리던 시절이었다. 우리 뜻과 상관없이 남북이 3.8선으로 갈라졌다. 대한민국은 3년 동안 미군정이 실시됐다.

미 군정청은 한국의 완전한 독립을 염두에 두고 보건의료 체제를 구축했다. 일본강점시대에는 조선총독부 산하 경무국 위생과에서 보건의료를 관장하는 위생행정 위주였다면, 미 군정청에서는 국민의 생명과 안전 확보, 건강 유지 향상을 목표로 삼는 미국식 보건의료제도를 도입, 실시한 것이다.

미 군정청은 보건후생부를 설치했고, 부장(현 보건복지부 장관)에 이용설을 임명했다. 이용설은 세브란스의전 4학년 때 3·1 운동의 학생 동원 책임을 맡았기에 중국으로 피신하여 베이징 협화대((協和大) 부속병원에서 3년간 외과수련을 받았고 미국 노스웨스턴대 의대에서 유학했다. 귀국해서는 세브란스의전 교수, 훙사단 활동 등을 했으며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옥고도 치렀다. 주민들의 권고로 1950년에 인천에서 출마하여 제2대 국회의원이 되었다. 그 후 세브란스병원장, 대한나(癩)협회 회장 등을 역임하였고, 99세로 소천했다,

미 군정청은 보건의료제도 수립, 개선. 정책관리를 하는 전문가를 양성하기 위해 록펠러재단의 후원을 받아 한국인 의사들을 미국의 명문 보건대학원에 보내서 석사를 받도록 했다.

첫 선발대로 세브란스의전 출신 4명, 경성의전 출신 2명, 미국 의대 출신 2명 등 10명의 의사가 뽑혔다. 1945년 가을 하버드 보건대학원에 3명(송형래, 최명룡, 황용운), 존스홉킨스에 3명(백행인, 윤유선, 최제창), 미시간에 4명(김동철, 주인호, 최창순, 한범석)이 미국행 배에 탔다. 두 해 뒤에 의사 3명(이병학, 이장원, 최영태)과 간호사 2명을 미국에 보냈다.

이들은 척박한 환경 속에서 눈물겨운 공부를 하고 귀국해서 대한민국의 보건의료 영역을 개척했다. 록펠러재단의 재정 지원을 받았지만 경제적으로 빠듯하게 생활했다. 영어로 공부해야 할 분량도 많았으며, 공중보건 강좌를 처음 수강했으므로 이해하기가 어려워서 숨차게 공부했다.

공부를 마치고 귀국하여 최창순은 차관과 장관을 역임했고, 결핵협회 초대회장으로 일했다. 윤유선은 국립보건원 원장과 국립의료원 원장을 맡았다. 백행인은 보건사회부 국장을 거쳐 이화여대 의대 교수로서 학장을 역임했다. 주인호는 고려대 의대 교수, 세계보건기구(WHO) 고문관으로 활동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출범과 함께 미군정이 종료됐다. 대한민국 보건후생부와 노동부를 통합하여 사회부가 되었고, 이듬해에는 보건부가 독립하였다. WHO/서태평양지부 회원국으로 가입했다.

그런데 6.25전쟁이 발발하면서 자원도 없는 형편에 전쟁으로 인한 응급조치, 전상자와 피난민의 진료 등을 하느라고 어려움을 겪었다. 천연두와 일본뇌염, 발진티푸스와 장티푸스, 수인성 전염병 등 급성전염병으로 힘들게 버티었다.

미국 육군이동외과병원(MASH)을 중심으로 스웨덴, 노르웨이, 덴마크, 이탈리아, 독일, 인도 등의 의료진이 전선과 후방을 넘나들며 의술을 전파했다. 특히 전선의 남쪽에서는 국제기구들이 식품과 함께 의료지원을 하면서 한국인의 생명을 살렸다.

아이들은 미공법480호(U.S. Public Law 480)에 의하여 분유를 공급받아서 허기를 달랬다. 외국 원조단체들에서 주는 구호물자도 많은 한국인들의 생명을 살렸다. 국제연합아동긴급기금(UNICEF), 한미재단, 록펠러재단, 유엔한국재건단(UNKRA), USOM(U.S. Operation Mission), KCAC(한국민사원조처), USAID(미국국제개발처), FOA(미국대외활동본부), 기독교세계봉사회, 선명회(World Vision), 기독교아동복리회 등 여러 단체에서 재정지원을 받았다. CMB(China Medical Board)는 원래는 중국을 지원하려는 록펠러재단 산하재단이었는데, 중국이 공산화해 우리나라와 타이완을 지원하게 되었다.

1953년 휴전이 되면서 정부는 보건소 설치 작업을 시작했다. 1956년에 보건소법이 공포됐다. 질병예방과 건강향상을 위한 기초가 마련된 셈이다. 급성전염병, 결핵, 나병의 관리 체계를 정립했다. 예방접종을 하러 가는 것을 우두 맞으러 간다고 했다. 이 덕분에 우리나라에서도 1959년 이후에는 천연두가 발생하지 않았다. 경기 고양군에 시범보건소(김명호 소장)가 설치됐고, 연세대 의대 4학년 학생들이 2주씩 현지실습을 했다. 1957년에 이화여대와 연세대에 학교보건소가 설립됐고, 서울대에는 보건진료소가 설립 운영됐다.

보건 분야에서 일할 전문가를 양성하기 위하여 WHO, CMB(China Medical Board), 미국 인구협회(Population Council). 한미재단 등 여러 곳의 재정지원을 받아서 주로 미국에 인재를 보내서 보건학 연구를 하게끔 했다.

1952년에 구연철이 당시 우리보다 모든 면에서 앞서 있었던 필리핀 마닐라의 필리핀대로 유학 갔고, 이종진은 미국 존스홉킨스로 떠났다.

1954년에 방숙(존스홉킨스), 차윤근,(존스홉킨스), 양재모(미시간)가 도미했고 김명호(미네소타, 1956), 권이혁(미네소타), 윤석우(미시간, 1956), 송인현(노스캐롤라이나,1957), 차철환(미네소타, 1958)이 미국행 배에 몸을 실었다. 1959년에는 서울대 의대 교수들의 해외연수와 장비 지원을 위하여 미네소타대와 협약을 맺은 ‘미네소타플랜’으로 고응린, 박형종이 미네소타대로 갔고, 허정은 미시간대에서 석사과정을 다녔다.

이 중 구연철, 방숙, 양재모, 김명호, 권이혁, 송인현, 차철환은 의대 예방의학 교수로서, 고응린, 허정, 박형종은 서울대 보건대학원 교수로 활동했다.

1955년에는 한미재단의 후원으로 보건인력을 6개월 훈련하는 공중위생원이 설립됐는데, 한범석 원장, 구연철 부원장, 김명호 강사로 운영했다. 이를 모체로 1959년 서울대 보건대학원이 설립됐다.

1954년 8월 부산에서 미국으로 향하는 화물선 갑판의 한국인 유학생들. 구호물자를 부산에 내린 화물선은 한미재단의 요청에 따라 한국 유학생들을 공짜로 미국까지지 실어다줬다. 이 배에는 윤덕선(한림대 설립자), 이명수(전 이화여대병원장), 이삼열 박사(연세대 임상병리학교실 초대 주임교수), 주정빈(전 연세대 정형외과 교수) 등 의사 4명과 다른 학과 학생 3명이 탔다. 가운데 여성은 변희용 전 성균관대 총장과 정치인 박순천의 딸이라고 한다. [자료=한림대의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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