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357호 (2019-10-14일자)

반기문과 ‘올리브 잎을 든 전사’ 외교관

 

2006년 오늘은 우리나라 외교사에서 기념비적인 날입니다. 반기문 외교통상부 장관이 제8대 국제연합(UN) 사무총장으로 선출됐습니다. 반 총장은 2011년 연임에 성공했고, 2015년 기후 문제 해결의 시금석이 된 ‘파리 협정’을 성공시키며 세계사의 이정표를 세웁니다.

반 총장은 한때 대한민국 청소년들의 별이었습니다. 수많은 청소년들이 반 총장의 위인전을 읽고 ‘세계인의 꿈’을 키웠습니다. 반 총장은 초등학교 때 학교를 방문한 변영태 외무부 장관의 강의를 듣고 외교관의 꿈을 키웠습니다. 고교 때 담임교사의 도움을 받아서 미국 초청연수 프로그램에 지원해 합격했고, 케네디 대통령을 만난 자리에서 “제 꿈은 외교관”이라고 당당히 밝혔습니다. 꿈이 실현됐고, 그 모습이 또 다른 꿈들을 꽃피우고 있다고나 할까요?

최근 민동석 전 외교부 차관이 펴낸 《외교관 국제기구 공무원 실전 로드맵》에 따르면, 반 총장은 2001년 차관 때 ‘한·러 공동성명’ 파동에 휘말려 사전 통보도 없이 해임됐습니다. 그러나 한승수 장관이 UN 총회 의장을 맡자 반기문을 찾아내서 비서실장으로 임명합니다. 직급이 낮은 공무원에게 어울릴 자리었지만, ‘미스터 반’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에 매진합니다. 이때 경험이 UN 사무총장의 피선과 성공에 토양이 된 것은 말할 나위가 없겠죠. 민동석 전 차관은 “나를 죽이지 못하는 고통은 나를 더욱 강하게 만든다”는 니체의 명언으로 반 총장의 이 시기를 설명합니다.

이 책 저자인 민동석이란 이름을 들으면 ‘광우병 파동’ 때 청문회에서 꼿꼿한 모습을 떠올리는 사람이 많겠지만, 제가 지켜본 민동석은 참 부드러운 사람이었습니다. 늘 이야기를 귀담아듣고, 수첩에 메모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자나 깨나 나라 걱정을 했고, 아들이 당시 준전시 상황이었던 중동에서 군복무를 하는 것을 자랑스러워했습니다.

그의 책에 따르면 외교관은 ‘올리브 잎을 든 전사’라는데, 민 차관은 우루과이라운드, 도하라운드 등에서 총성 없는 전쟁을 수행했습니다. 특히 농업시장 개방 협상에 참여했던 관료들은 대부분 정치적 희생양이 되는 것을 알면서도, 기꺼이 한미 FTA 협상을 맡았습니다.

민 차관은 미국 휴스턴 총영사로 근무할 때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뉴올리언스를 휩쓸었을 때 긴급구조단을 결성해 교민들을 무사히 구조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또 미국 남부 최대 규모인 휴스턴 미술관 1층 중앙에 한국관이 들어서는 것을 성사시키기도 했습니다. 나중에 국립중앙박물관이 한국 미술품의 보안을 이유로 민 총영사가 사투를 벌여 확보한 자리를 일본에 내줬지만…(진짜 애국이 무엇인지, 극일이 무엇인지…). 민 총영사는 우리나라와 텍사스의 경제협력협정을 체결시켰으며 텍사스 주 명예국무장관에 추대되고 명예시민증을 받기도 했습니다.

책에 소개된 ‘개고기 사건’도 인상적이었습니다. 1983년 민 차관이 영국 대사관 총무로 근무할 때 국제동물복지기금(IFAW)이 ‘개고기 반대’ 시위를 준비하자 최선을 다해 설득해서 집회 강도를 낮춥니다. 그런데도 회원들의 항의 편지가 줄을 잇자, 사용한 우표도 팔 수 있다는 것을 알아내고 며칠 밤을 새면서 수 만 장의 우표들을 확보합니다. 이를 팔아 관련단체에 구명보트와 시각장애인 안내견을 기증해서 항의를 선의로 바꿉니다.

민 차관은 외교관을 꿈꾸는 젊은이에게 “단지 외교관이 되는 것 자체를 목적으로 삼지 말고, 외교관으로서 어떤 삶을 살 것인지 한 번쯤 치열하게 고민해 보라”고 권고합니다. 수많은 외교관이 영토 주권 지킴이, 재외 국민 지킴이, 협상가, 공공외교 담당자로서 밤낮을 잊고 일하고 있지만, 일부 외교관들의 무사안일로 외교부와 외교관 전체가 지탄받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대통령과 관련한 외교, 의전 실수도 계속 됐지요?

원인에 대해서도 생각해봐야 할 듯합니다. 우리나라 외교부 소속 공무원은 900명이 약간 넘는데, 일본 외무성의 5800명보다 턱없이 적습니다. 정부도 국내정치에 비해 국제정치에 무게를 덜 두고, 심지어 국제정치를 희생시키기도 합니다. 국민들도 국제 이슈에 대해 관심이 적은 듯합니다. 외교부와 외교관의 역할에 대해서도 별로 알려고 하지 않습니다. 언론도 ‘총성 없는 전쟁’의 노하우에 대해 무게를 두지 않아서 통상협상 업무가 다른 부처로 넘어가도 무관심했습니다. 국제정치나 외교에 대한 보도 자체가 다른 나라 언론에 비해 적습니다. 그렇다고 외교부 스스로 개혁이나 변화의 몸부림이 강한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총성 없는 전쟁’의 시기에 ‘올리브 잎을 든 전사’의 역량을 키우기 위해서 무엇부터 해야 할까요? 유엔 사무총장을 배출한지, 13년이 되는 오늘, 우리 모두가 외교에 대해서 관심을 갖기 시작하는 하루가 되었으면 합니다. 우리나라처럼 대외 의존도가 높은 나라에서 외교는 생명수와도 같은 일이기에….


《외교관 국제기구 공무원 실전 로드맵》 밑줄 긋기

이 책은 외교관이나 국제기구 직원이 되기 위한 안내서로도 친절하지만, 외교관의 실상에 대해 잘 알려주는 책입니다. 책에서는 고려의 대협상가 서희, 조선 최초 일본 전문 외교관 이예, 강영훈 전 총리, 이종욱 전 WHO 사무총장, 스티븐슨 전 미국대사 등의 이야기와 ‘대한민국 대표 여성 외교관’ 백지아, ‘한국 여성 최초 유네스코 본부 국장’ 최수향 등의 인터뷰를 통해 올바른 외교관의 길을 제시합니다. 요즘 ‘뜨거운 인물’인 김현종 국가안보실 제2차장이 노무현 정부의 통상교섭조정관일 때 한미FTA에 소극적인 미국을 협상 테이블로 불러들이는 ‘창의력’도 소개했습니다.

반기문 사무총장=전화는 24시간 열려있었다. 지구촌 지역마다 시차가 다르다보니 통화 시기를 놓치면 현안 대응이 늦어지기 때문. 또 아침에 현지에 도착하도록 스케줄을 짜기 때문에 야간비행이 많았다. 어린 학생들에게는 “지금 자면 ‘꿈’을 꾸지만 지금 공부하면 ‘꿈’을 이룬다는 하버드 도서관에 붙어있다는 글귀를 자주 얘기해 준다.

이종욱 사무총장=한양대 공대를 졸업한 뒤 늦깎이로 서울대 의대에 진학했다. 소외당하고 아픈 이들을 치유하는 봉사의 꿈을 꿨기 때문이다. 퇴근 후에 집에 가면 어떤 일이 있어도 프랑스 신문을 읽었다. 이런 노력 덕분에 영어는 물론 불어, 일어, 중국어까지 구사할 수 있었다. 병으로 고통받고 있는 이들을 위해서라면 세계 어디라도 마다하지 않고 달려갔으며, 높은 직위임에도 여객기 이등석에 앉는 것도 개의치 않았다.

캐슬린 스티븐슨 대사=소통을 중시해서 대사로 부임하자마자 ‘심은경’이란 이름으로 블로그를 개설하고 책을 펴내 한국인과 소통했다. 자전거로 전국을 누비면서 사람들을 만났고 미국에 비판적인 성향의 인사들까지 만찬에 초대해서 그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강영훈 대사=스스로에게 엄격하고 자신을 내세우지 않았다. 사람을 지위나 재산의 무게가 아니라, 사람 자체로 존경하고 배려했다. 산책로에서 커피 파는 아주머니가 자신을 알아보고 커피를 대접했는데, 실수로 설탕 대신 소금을 넣은 것을 아무 내색하지 않고 끝까지 마셨다. 그래서 하루 종일 속이 쓰렸어도. 부동산의 대가들이 판치는 세상에서 한 수 위인 ‘부동(不動)의 대가’였으며 타계했을 때 통장의 잔액은 0원이었다.

 


오늘의 음악

 

오늘은 두엣 곡 둘 준비했습니다. 첫 곡은 1940년 오늘 태어난 클리프 리처드가 올리비아 뉴턴 존과 함께 부르는 ‘Suddenly’입니다. 영화 ‘Xanadu’에 나오는 노래죠? 둘째 곡은 1990년 오늘 세상을 떠난 레너드 번스타인의 ‘West Side Story’ 중 ‘발코니 장면’을 시에라 보게스와 줄리안 오벤든의 멋진 노래로 준비했습니다. 존 윌슨 오케스트라가 협연합니다.

  • Suddenly – 클리프 리처드 & 올리비아 뉴턴 존 [듣기]
  • West Side Story -시에라 보게스 & 줄리안 오벤든 [듣기]

 

 

 

1 개의 댓글
  1. 윤서인팬

    외교 하면 이승만 박사가 떠오르지요. 외교의 중요성을 모르는 사람은 공감하지 않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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