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거노인 집에서 거울만 봐도 건강 체크, 리빙랩이 뜬다

[인터뷰] 정덕영 성남고령친화체험관 R&D지원센터 센터장

[사진=BlurryMe/shutterstock]
‘저출산 고령화 사회’는 2018년 대한민국의 주요 키워드 중 하나다. 지난 2017년, 65세 이상 노인이 전체 인구의 14%를 돌파하며 우리나라는 공식적으로 고령 사회에 진입했다.

노년 인구 증가는 우리 사회의 새로운 도전 거리로 자리 잡았다. 정부는 늘어나는 의료비 지출을 막기 위한 여러 제도를 고민하는 한편, 시니어 헬스 케어 제품, 서비스를 선점하려는 기업의 투자는 더욱 커졌다.

‘코메디닷컴’은 기존의 연구 개발(R&D) 방식에 ‘리빙랩(Living lab)’ 플랫폼을 적용해 보건의료 혁신을 꾀하고 있는 정덕영 성남고령친화체험관 R&D지원센터 센터장을 만나 봤다. 리빙랩은 실험실 같은 통제된 조건이 아닌 실제 생활 공간에서 문제 해결, 신제품 개발을 꾀하는 새로운 형태의 R&D 방식이다.

정덕영 센터장은 “보건의료 리빙랩은 사용자(노인)에게는 보다 적극적으로 본인의 니즈를 반영할 기회를, 공급자(전문가)에게는 사회가 정말 필요로 하는 제품과 서비스를 만들 기회를 주는 사회 혁신”이라고 말했다.

– 최근 R&D 분야에서 리빙랩 개념이 주목받고 있다. 아직 많은 사람이 생소하게 느끼는 리빙랩이란 대체 무엇인지 상세히 설명해달라.

“리빙랩이라는 말은 새로울 수 있지만, 리빙랩의 운영 방식은 우리 사회가 늘 해오던 문제 해결 방식과 크게 다르지 않다. 유럽, 일본에서는 오래전부터 마을 단위, 지역 사회 단위로 생활 속 문제를 해결하는 전통이 있었다. 우리나라도 70~80년대는 ‘저 다리는 비만 오면 계속 물이 넘쳐’ 같은 문제를 마을 사람들끼리 머리를 맞대고 해결하려 하지 않았나. 리빙랩은 이러한 방식에 과학적인 요소가 덧붙은 개념이라 말할 수 있다.”

– 반상회나 마을 회의에 과학적인 요소가 붙다니, 무슨 뜻인가?

“가령 ‘매번 물이 넘치는 다리를 어떻게 하지?’ 같은 문제가 있다고 하자. 예전에는, 혹은 지금도 많은 곳에서 문제 당사자끼리 ‘다리를 새로 짓자’, ‘돌멩이를 더 놔보자’ 등 일부 구성원의 의견 교환과 다수결 방식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

리빙랩은 여기서 한 발 나아가 마을의 문제를 과학적인 방법, 제3자의 전문성을 빌어 해결할 수 있도록 한다. 이때 새로운 자원은 지역 설계를 오랫동안 해온 도시 공학자가 될 수도 있고, 마을 강수량 데이터를 가진 기상학자가 될 수 있고, 그 데이터를 분석하는 기술자가 될 수도 있다.

리빙랩이라는 물리적 공간과 시스템은 문제 당사자와 전문가가 서로 현안을 공유, 이전의 주먹구구 방식을 벗어나 좀 더 합리적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 한다.”

– 거칠게 보면 ‘리빙랩은 대중과 전문가가 함께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이라고 정리할 수 있겠다. 하지만 대중 참여형, 시민 참여형 R&D가 결코 새로운 시도는 아니지 않나. 리빙랩이 이름만 다른 ‘사용자 참여형 R&D’라는 지적도 있다.

“기존 사용자 참여형 R&D는 보통 전문가들이 제품을 다 만들어 놓고 사용자를 불러다 사후 평가를 하는 식으로 진행됐다. 이를테면 삼성전자에서 2030 청년 평가단을 뽑아 신형 휴대폰을 하나씩 주고 어떤 점이 좋고 나쁜지 평가하는 식이었다.

기존 R&D 방식과 리빙랩의 차이점은 ‘2030 청년 평가단이 처음부터 휴대폰 개발 단계에 목소리를 내며 참여했느냐’ 여부다. 기존 R&D는 기업이 자체 회의에서 ‘사람들이 이게 필요할 거야’라는 아이디어를 모으고, 제품을 만들고, 소비자의 반응을 본다. 어떤 기업은 사람들이 정말 필요로 하지도 않는 제품을 마케팅 비용을 들여 마치 정말 필요한 제품인 것처럼 만들기도 한다.

이러한 마케팅 전략이 기업의 생존 측면에서 맞을 때도 있다. 하지만 막연한 추측이 항상 성공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특히 작은 기업일수록 위험 부담은 더 크다. 아이디어 개발 단계부터 사용자의 니즈가 적극 반영된다면 이러한 위험 부담을 크게 줄일 수 있다.”

– 리빙랩이 성공 가능성이 높은 제품을 만들어 줄 수 있다는 말인가. 그럼 소비자, 사용자, 문제 당사자 입장에서 리빙랩의 장점은 전문가가 나서서 문제를 해결해준다는 것 정도인가?

“평소 만나기 힘든 전문가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것도 큰 이점일 수 있겠다. 하지만 나는 사용자가 스스로 느끼는 문제를 본인이 원하는 방식으로 해결하는 경험을 주는 것이 리빙랩의 더 큰 장점이라고 생각한다.

체험관에 오는 어르신들과 만나 얘기를 하다 보면, 어르신들이 문제 해결에 참 수동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르신들은 어떤 제품, 서비스를 받아도 ‘죽을 날이 얼마 안 남았으니까’, ‘나랏돈인데 주는 대로 써야지’라는 식으로 반응하신다. 젊을 때 냈던 세금이 지금의 복지 혜택으로 되돌아오는 건데도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다, 내야 한다는 인식이 없다.

노인들의 수동적인 마인드, 패턴이 주도적으로 바뀌고, 시니어 제품을 만드는 기업, 연구자의 마인드가 탑 다운(top-down)에서 바텀 업(bottom-up) 방식으로 변화하는 것. 이 변화가 체험관이 추구하는 시니어 리빙랩의 핵심이다.”

– 성남고령친화체험관이 운영하는 시니어 리빙랩의 형태를 구체적으로 소개해 달라.

“우리 체험관은 일반적인 복지관과 형태가 다르다. 3층짜리 건물에 시니어 프로그램 운영실, 시니어 제품 체험 공간, 시니어 제품 개발 기업 및 연구단이 같이 있다. 시니어 프로그램을 하러 온 어르신들이 체험 공간에서 자유롭게 새 제품을 써보고, 어떤 점이 좋다거나 불편하다는 얘기를 한다. 반대로 기업 연구자들은 체험관에 놀러 온 어르신들께 솔직한 제품평을 듣는다.

처음 노인 사용자를 접하는 전문가들은 은연중 ‘우리가 갑이다’라는 생각을 품기 쉽다. 우리(기업, 연구자)가 소비자(노인)가 필요한 걸 만들어 줄 수 있다는 인식 때문이다. 하지만 막상 제품을 만들고 나면 이 제품이 쓸 만한지 제대로 된 평을 듣기가 쉽지 않다. 갑자기 연구실 밖을 뛰쳐나가 어느 동네 어르신을 일일이 찾아가 물어볼 수도 없고, 리서치 외주를 돌리려면 비용 문제도 만만치 않으니 말이다.

우리 체험관에서는 리빙랩 방식에 익숙한 어르신들이 많다. 기업이 주는 공짜 제품을 받으러 온 수동적인 사람들이 아니라, 새로운 제품에 관심을 갖고 본인이 원하는 바를 잘 표현하는 능동적인 사용자가 상주하고 있다는 뜻이다. 전문가가 갑이라는 마음만 버리면 소비자의 니즈를 즉각적으로, 주기적으로 들을 수 있다. 체험관에 입주한 한 고령 친화 식품 업체는 식당에 온 어르신들께 밥을 차려드리며 자연스럽게 사용자 후기를 듣고, 이러한 피드백을 제품 업그레이드에 반영하고 있다.”

– 체험관이 하나의 리빙랩 플랫폼이라면, 그 안에 기업-연구자-사용자 평가단이 상주하며 상호작용하고 있다는 말인가.

“그렇다. 올해(2018년)는 평가단 형태를 조금 다듬어 200명가량의 ‘액티브 시니어 평가단’ 풀을 꾸렸다. 시니어 평가단 시범 사업에 체험한 여러 어르신 중에 정기적으로 사업에 참여할 수 있는 지원자를 받았다. 시니어 평가단 어르신들은 지팡이 하나를 만들어 가도 ‘이 지팡이는 어디가 문제야’라면서 문제점과 대안을 적극적으로 어필한다.”

– R&D를 많이 해온 전문가도 리빙랩이라는 플랫폼이 익숙하지는 않을 것 같다. 기업, 연구자들의 반응은 어떤가?

“처음에는 반응이 밋밋했다. 늘 해오던 방식이 아니기도 하고, 낯선 어르신을 여러 명 만나는 일이 부담스럽기도 하니 말이다. 하지만 이제는 전문가 쪽에서 더 적극적으로 시니어 평가단과 만남을 요청하고 있다.

보통 R&D 과제에 참여하는 기업이나 대학 연구팀은 과제 제안서에 적은 목표대로 신기술을 개발하면 자기 몫은 끝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원래 연구자의 생리는 그렇지 않다. 연구자가 사용자의 피드백에 더 많이 노출될수록 ‘더 좋은 제품을 만들어야 한다’는 욕심이 커지기 마련이다.

한 연구자는 이런 말을 하기도 했다. 연구실 안에만 있을 때는 ‘처음부터 엄청난 제품을 만들어야 한다’는 압박감이 있었는데, 이제는 그렇게 무리할 필요가 없다는 걸 알았다고. 연구자의 목표는 고령화 사회에 정말 쓰일 수 있는 제품을 만드는 것이고, 연구자의 역할은 제품 개발 과정에 기름칠을 내는 거라는 걸 깨달았다고 말이다.”

– 아직 우리나라 보건의료 분야에서 리빙랩 성공 사례는 많지 않다. 성남고령친화체험관 소속 의공학자들이 개발한 ‘낙상 방지 자동 기립형 비데’ 정도가 아닌가 싶다. 현재 개발 중인 제품에는 어떤 것들이 있나.

“최근 주목할 만한 제품으로는 독거노인 어르신의 의견이 적극 반영된 ‘스마트 미러’가 있다. 스마트 미러는 ‘독거노인에게 정말 필요한 제품은 뭘까’라는 연구자의 질문에서 시작됐다. 아이디어 수집 과정 중 독거노인의 입에서 가장 많이 나온 말은 ‘혼자 있다가 쓰러지면 어떻게 하냐’는 것이었다.

여러 의견을 들으며 레이저 기술을 활용한 거울로 제품 형태가 구체화 됐다. 욕실용 거울의 레이더로 노인들이 씻을 때의 움직임을 감지해 심박수, 혈압 등 건강 정보를 계산하고, 그 정보를 다시 거울에 표시하도록 했다. 노인들은 ‘오늘은 평소보다 혈압이 높습니다’ 같은 메시지를 보고 컨디션에 주의를 기울이게 된다.

‘스마트 거울’의 최종 목표는 독거노인이 일상 속에서 본인의 건강 정보를 손쉽게 접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애플리케이션 등을 활용해 부모와 멀리 떨어져 사는 가족에게 독거노인의 건강 정보를 알릴 수도 있다. 이밖에도 치매 노인을 위한 배회 감지 밴드, 어르신이 편하게 즐길 수 있는 알까기 보드게임 등 다양한 시니어 제품을 기획 중이다.”

– 설명을 들으니 리빙랩은 새로운 R&D 방식이기도 하지만 하나의 문화라는 생각도 든다. 그간의 경험과 자산을 통해 보건의료 분야에서 시도해 볼 만한 과제가 많을 것 같다. 앞으로의 리빙랩을 어떻게 운영할 계획인가.

“보건의료 리빙랩의 범위를 성남시 전체로 넓히고 싶다. 체험관 내에서도 많은 성과가 나오고 있지만, ‘지역 사회 전체의 삶의 질을 높인다’는 사회 공헌 취지를 달성하기에는 부족한 점이 있다.

앞으로 복지관, 요양 병원 등 성남시 어르신이 방문하는 많은 기관과 어르신의 삶에 관심 있는 기업을 연결해 지역 사회에 실질적으로 도움이 될 만한 제품, 서비스를 만들어가는 것이 목표다.”

    맹미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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