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임상 시험은 ‘건장한 20대 남성’이 표준일까?

[대담] 엘리자베스 폴리처 '젠더 서밋' 대표

 

[사진=엘리자베스 폴리처 젠더 서밋 대표]
같은 실험실, 같은 실험 쥐를 가지고 한 연구는 항상 같은 결과가 나올까?

지난 2010년, 유럽의 한 과학자 그룹은 “같은 방법론이라도 어떤 성별의 연구자가 실험을 하느냐에 따라 그 결과가 달라질 수 있다”며 전 학계에 ‘젠더 혁신’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젠더 격차 문제는 보건의료 분야에서 특히 두드러졌다. 우울증 약의 효과가 연구자의 성별에 따라, 실험 동물의 성별에 따라 다르게 나타났다. 흔히 ‘여성 질환’으로 알려진 골다공증 치료법을 남성 환자에게 그대로 적용하니 예기치 못한 문제가 발생했다. “성차를 고려하지 않은 연구가 생명을 위협할 수도 있다”는 메시지가 학계에 퍼지기 시작한 것이다.

지난 10월 26일 국회 귀빈 식당에서 이러한 보건의료 분야의 젠더 혁신을 논의하는 자리가 마련됐다. 대담에는 엘리자베스 폴리처 젠더 서밋 대표, 홍성태 서울대학교 의과 대학 교수(대한의학회 간행이사), 이혜숙 이화여자대학교 수리물리과학부 명예교수(젠더혁신연구센터 수석연구원)이 참여했다.

– 보건의료 분야에서 젠더 혁신은 어느 단계까지 와 있나?

폴리처: 젠더 혁신의 발전 단계는 나라마다 다르다. 여성 건강 연구가 많이 축적된 미국이 가장 앞서가 있고, 유럽연합(EU)은 연구 기금 지원 프로그램인 ‘HORIZON 2020’을 통해 젠더 혁신을 꾀하고 있다. 싱가포르는 현재 과학기술청 차원에서 인식 확산 방법을 고민중이고, 일본은 젠더 혁신의 의의에 눈을 뜬 정도다.

EU, 싱가포르, 일본처럼 과학기술 혁신이 활발한 나라일수록 새로운 발상에 관심이 많다. 이들 나라는 과학기술 혁신에 익숙할수록 과학기술을 통해 사회, 경제 발전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한다. 특히 젠더 혁신은 국민의 절반인 여성을 고려한 개념이지 않나. 정책 결정자들을 중심으로 젠더 혁신을 간과하면 사회 혁신 기회를 놓칠지도 모른다는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다.

이혜숙: 현재 미국 국립보건원(NIH)은 척추 동물 이상을 다루는 모든 연구에 대해 과제 제안서(proposal) 단계부터 젠더 변수를 반드시 포함하도록 하고 있다. 가령, 수컷 쥐로만 실험한 연구를 암수 구분 없이 ‘동물’로만 표기하면 안 된다거나, 수컷 쥐만으로 실험을 했다면 암컷 쥐를 쓰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지 밝혀야 한다는 규정 등이 새로 생겼다.

미국, EU 등 연구 선진국의 상황이 이렇다 보니, 어떤 국내 산업계 전문가들은 ‘우리나라가 젠더 혁신 트렌드를 발 빠르게 쫓아가지 못하면 나중에 바이오 신약 분야에서 예기치 못한 무역 장벽에 부딪힐지도 모르겠다’는 우려의 말을 하기도 한다.

– ‘젠더 혁신은 글로벌 연구 트렌드’라는 말인가. 그렇다면 현재 우리나라 학계의 젠더 혁신 인식 수준은 어느 정도인가?

이혜숙: 아직 시작 단계라 봐야 한다. 한국연구재단이 보건의료 분야에서 젠더 격차를 고려한 일부 연구 과제를 지원하는 정도다. 학계가 아닌 정책 수준에서는 ‘제3차 여성 과학기술인 육성 지원 기본 계획’에 일부 내용이 포함돼 있지만, 연구비 지원 정책과 연계가 안 되어 실제로 잘 시행되고 있지는 않다.

홍성태: 학술지 차원에서는 ‘대한의학회지’가 지난해(2017년) 12월 국내에서 처음으로 논문 투고 규정에 젠더 관련 내용을 추가했다. 기초 의생명 분야에는 이미 많은 성, 젠더 분석 방법을 도입한 연구가 진행되고 있는데, 의학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학술지 편집위원회(ICMJE)가 지난 2016년 말 전 세계 6000여 종 의학 학술지 편집위에 젠더 관련 규정을 넣으라고 권고했다.

– 교육 현장은 어떤가? 전국적으로 의과 대학 여성 교수의 비율이 10%를 넘는 정도인 것으로 아는데, 젠더 의학을 교육, 연구 주제로 다루는 학교는 없나?

홍성태: 체계적으로 젠더 의학 교육을 열고 있는 대학은 사실상 거의 없다고 할 수 있다. 올해(2018년) 여름 서울대학교 의과 대학에서 선택 교양으로 ‘젠더 의학’ 과목이 열렸는데, 이마저도 해당 과목 교수의 의지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젠더 의학이 교육 제도에 반영되고 연속성을 갖기는 아직 한참 멀었다고 봐야 한다.

– 다시 우리나라 밖으로 눈을 돌려보겠다. 폴리처 교수는 ‘젠더 서밋(gender summit)’ 행사를 주최해 학계뿐 아니라 정치권에도 젠더 혁신 관점을 알리고 있다. 젠더 혁신을 달성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도전 과제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폴리처: 단연 ‘과학기술, 보건의료 연구 결과물은 젠더 중립적(gender neutral)이다’라는 통념을 깨는 것이다. 과학기술이 사회에 끼치는 영향이 나날이 커지는 현대 사회에서는 기존 연구의 편향성을 바로 볼 수 있는 현장 관계자들의 인식 전환이 필수다.

이혜숙: 젠더 혁신의 효과성에 관한 연구는 아직 진행 중이기 때문에 경제적 효과를 수치로 제시하기는 어렵다. 다만 캐나다는 ‘성차를 반영한 보건의료 연구가 국가 의료비를 절감할 수 있을 것’이라는 논리를 내세우고 있다. 또 젠더 혁신을 통해 남녀 모두에게 더 나은 의료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다는, 보건의료 전반의 질적 향상이 가능하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 젠더 혁신에는 기본적으로 페미니즘 관점이 반영된 듯하다. 젠더 혁신도 페미니즘 운동의 일종으로 봐야 하나?

폴리처: 우리는 젠더 혁신을 ‘운동’이라기보다 더 엄밀한 연구를 위한 ‘과정’이라고 말한다. 지난 2010년 론다 쉬빙어 교수팀이 젠더 혁신 연구를 제안한 취지는 기존 연구 방법론의 취약점을 개선하자는 것이었다. 남성 위주 연구 결과에서 생긴 지식의 젠더 편향성을 제거하고 잘못된 연구 결과, 비어 있는 연구 분야를 과학적으로 더 정확한 사실들로 채워 넣자는 주장이다.

– 젠더 혁신의 가치를 인정하더라도 연구자가 연구 설계 단계에서 이를 반영하기란 무척 어려울 것 같다. 무엇보다 현실적으로 비용 문제가 있지 않나.

홍성태: 물론이다. 현장 관계자들의 통념을 깨기 위해서는 결국 ‘연구자의 인식 전환을 독려할 수 있는 프로세스를 어떻게 갖출 것이냐’의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어떤 연구자가 늘 하던 대로 수컷 쥐 100마리를 사용한 연구 논문을 투고했는데, 심사위원이 수컷 쥐 50마리, 암컷 쥐 50마리를 써서 실험을 다시 하라고 수정 의견을 보냈다고 하자. 이미 다 끝난 실험이라 더 끌어 쓸 수 없는 연구비도 없는데, 이런 상황에서 연구자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아무리 취지가 좋더라도 이를 위한 충분한 지원이 없다면 당연히 저항에 부딪힐 수밖에 없다.

임상 시험 단계로 가면 문제가 더 복잡해진다. 임상 시험은 보통 ‘건장한 20대 남성’을 표준으로 하는데, 젠더 격차 문제를 해소하려면 연구자에게 각 성별마다 최소 인원을 맞춰야 하는 새로운 과제를 떠안게 된다.

이혜숙: 가뜩이나 여성들은 임신 등 남성보다 생리적 이슈가 복잡해 임상 시험 참여도가 낮다. 젠더 혁신 인식 확산과 별도로 이를 적절히 이끌 수 있는 법, 제도가 갖춰져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 지난 3월 이상민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젠더 혁신 관점을 반영한 과학기술기본법 개정안을 발의한 것으로 안다. 주요 내용은 무엇이고 현재 진행 상황은 어떤가?

이혜숙: 이상민 의원이 발의한 개정안은 국가 연구 개발 사업 추진 전반에 성별 특성을 반영하도록 요구한다. 과학기술 기본 계획 수립 시 성별 특성 분석을 포함한 혁신 촉진 계획을 넣어야 한다거나, 정부가 성별 특성 분석이 반영된 국가 R&D 수행을 위해 전담 기관을 지정하도록 하는 등 젠더 혁신 추진을 위한 법적 근거를 마련하는 작업이라 할 수 있다. 개정안은 현재 소관위원회에 접수돼 있다.

법제화 작업과 별도로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역시 국가 R&D 조사 분석 평가에 젠더 혁신 관련 내용을 포함하려 하고 있다. 2019년에는 기초 원천 분야에 시범적으로 적용되고, 2020년에는 전체 R&D 과제에 젠더 혁신을 고려한 조사 분석 평가가 추진될 예정이다.

    맹미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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