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의사의 ‘사부님’, 대장암 복강경-로봇 수술 권위자

[베스트 닥터] 김선환 고려대 안암병원 교수

[사진=고려대학교의료원]
“회의가 믿음으로, 절망이 소망으로, 어둠이 빛으로, 설움이 기쁨으로.”

고려대 안암병원 김선환 교수(60)의 연구실 책장에는 이 글귀가 수놓인 작은 액자가 있다. 30대 여성 장애인 환자가 선물한 것이다. 재작년 휠체어를 타고 처음 진료실 문을 연 환자는 좀체 말을 하지 않았다. 얼굴엔 이렇게 쓰여 있었다. “하느님, 장애에다가 암까지!”

김 교수는 며칠 고민하다 환자에게 입을 열었다. “기술적으로 항문을 살릴 수는 있지만, 휠체어 생활에 오히려 불편할 수도 있겠어요. 인공 장루를 다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환자는 고개를 끄덕였고,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다. 그리고 몇 개월 뒤 외래에서 환한 얼굴로 이 액자를 선물한 것이다.

김 교수는 대장암의 복강경, 로봇 수술에서 세계적 대가로 인정받고 있다. 그는 늘 환자의 마음을 생각하는 치료로도 정평이 나있다. 그는 환자로서의 혹독한 경험이 환자 처지를 생각하는 데 도움이 됐다고 믿는다.

김 교수는 인턴 말기에 충수염에 걸렸다. 수술은 잘 됐다는데, 배가 빵빵하게 부풀어 올라 왔다. 가스가 나와야 하는데, 방귀는 나올 기미가 없었고 계속 토하기만 했다. ‘이러다가 죽는구나, 재수술이라도 받다가 죽었으면….’ 1주일 뒤 소원대로 재수술을 받았다. 뱃속에서는 장이 꼬여서 썩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수술 뒤 제대로 회복도 못하고 전공의 과정에 들어가야 했다. 이때 한 전공의 선배가 “자네는 외과에서 꽂는 모든 관을 다 꽂아봤으니 환자로서의 경험을 바탕삼아 GS(General Surgery, 일반 외과)에서 GS(Great Surgeon, 위대한 수술 의사)가 될 것이네”라고 격려했다. 그 선배의 말대로 됐다.

김 교수는 의사인 어머니가 혼자 탯줄을 끊는 산고 끝에 태어나서 어릴 적부터 의사가 된다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다. 어머니는 고려대 의대의 전신인 서울여자의대 출신이었고 외증조부는 현상윤 고려대 초대 총장. 망설이지 않고 고려대 의대에 들어왔지만 본과에 올라갈 무렵, 의사가 소명인지 의문이 생겼다. 수업은 빠뜨리고 전국을 유랑했다. 홍승길 교수가 등을 떠밀어 시험을 보게 해서 겨우 의대 과정을 마쳤다.

김 교수는 인턴 때 자신을 살린 외과에 지원했다. 힘들고 보상이 적어 4년 동안 고려대 의대 출신이 한 명도 지원하지 않은 과였다.

전공의를 마치고 군의관으로 가서는 앰뷸런스, 헬기를 타고 진지들을 돌아다니며 병사들을 치료했다. 대령으로 전역한 아버지의 길을 따라 군대에 말뚝 박는 것도 고민했지만 보다 많은 환자들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 모교로 돌아왔다.

김 교수는 1991년 고려대 구로병원에서 민병철, 이승규 교수 등 쟁쟁한 칼잡이 아래에서 전임의로서 대장 항문 분야를 맡았다. 1993년 고려대 안산병원에서 조교수로 발령받았고, 이듬해 미국 클리블랜드 클리닉에서 개최하는 웩스너 국제 대장 질환 심포지엄에 참석했다. 심포지엄에는 국내 최초로 대장암 복강경 수술을 집도했던 박재갑 서울대 교수가 있었다.

김 교수는 박 교수에게 미국의 대장암 전문가를 소개시켜달라고 부탁했다. 김 교수는 전임의 때 담낭 수술이 개복에서 복강경으로 바뀌는 것을 보고 언젠가 대장 수술에서도 복강경이 대세가 될 것으로 믿었다. 박 교수는 지인이자 세계적 외과 의사 워런 파지오 교수를 통해 제프리 밀섬 교수를 소개시켜줬다.

김 교수는 이듬해 클리블랜드 클리닉으로 연수를 떠났다. 미국에서는 타국 의사를 수술실에 들어오지 않게 하는데, 수술이 복잡하고 어려워서 미국 의사들이 안 들어가려 하는 바람에 대신 들어가서 온갖 기술을 배웠다. 밤에는 동물 실험에 매달렸고 주말에는 밀섬 교수로부터 논문 지도를 받았다. 당시 복강경 수술을 받으면 구멍 뚫은 자리에 암이 재발한다는 사례가 잇따라 보고돼 논란이었는데, 김 교수는 제대로 수술하면 재발하지 않는다는 것을 밝혀냈다. 2년 동안 논문 8편을 발표했고 귀국 직전에는 병원이 매년 한 명 선정하는 ‘최우수 펠로’ 상을 받았다.

1997년 귀국했지만 갈고 닦은 실력을 써 먹을 수가 없었다. 학계에서는 복강경 수술의 효용에 대해서 반신반의했고, 안산에는 보험이 적용되지 않는 비싼 수술을 받을 환자가 드물었다. 클리블랜드 클리닉에서 함께 연수했던 일본의 준지 오코다 오사카대병원 교수는 논문을 계속 발표하고 있었다. 가위바위보도 져선 안 된다는 한일전에서 지고 있는 셈이었다.

그때 서울 석촌동 한솔병원의 이동근 원장이 “전폭적으로 지원할 테니 마음껏 수술하라”고 손을 내밀었다. 김 교수는 2000년 말 고려대 안산병원에 사표를 내고, 이듬해부터 4년 여 동안 500여 명을 복강경으로 수술했다. 2, 3개월마다 수술 동영상을 국제 학회에서 발표했고 중국, 타이완, 태국, 인도 등에서 한 수 가르침을 받으려는 의사들이 몰려왔다. 그러나 개원 병원의 특성 때문에 우리나라 대학 병원 의사에게 ‘비법’을 가르치는 것엔 한계가 있었다.

김 교수는 2005년 동국대 일산병원이 개원할 때 이석현 초대 원장의 설득에 따라 자리를 옮겼다. 이 원장은 고려대 구로병원 출신으로 “서울아산병원 소화기내과의 민영일 교수가 오기로 돼 있으니 함께 일을 내보자”고 유혹했다. 김 교수는 이듬해 미국 소화기내시경복강경학회에서 자신이 수술한 310명의 중장기 생존율을 발표하면서 미국 의사들이 두려워하는 직장암 수술의 노하우를 밝혀 뜨거운 박수를 받았다.

그러나 동국대병원은 김 교수의 꿈을 채우기에는 너무 좁았다. 마침 김 교수의 동기인 나누리병원 장일태 이사장이 모교에 발전 기금을 쾌척하면서 “고대의료원이 성장하려면 김선한 같은 사람을 불러들여야 한다”고 권유했다. 2006년 고려대 안암병원은 ‘대장암 복강경 수술실’을 마련하고 김 교수를 불렀다.

김 교수는 이듬해 로봇 수술의 필요성에 눈을 떴다. 세브란스병원이 수술 로봇 다빈치를 도입해서 매스컴의 주목을 받을 때였다. 다른 분야는 몰라도 복강경 경험을 바탕으로 대장암, 특히 직장암의 수술에는 ‘고연전’에서 이길 자신이 있었다. 하부 직장에 암이 생겼거나 병기가 진행돼 방사선 치료를 받는 환자 등 수술 공간이 좁은 환자에게는 로봇 수술이 최적이었다. 그러나 당시 몇몇 병원에서 로봇 수술을 하다가 환자가 숨지는 사고가 발생했고 로봇 수술의 효용에 대해서 논란 중이어서 병원은 기계 구입을 망설였다. 김 교수는 비뇨기과 천준 교수와 함께 “병원에 손해가 나면 책임지겠다”는 각서를 쓰고 수술 로봇 도입에 총대를 멨다.

2008년 1월 김 교수는 이탈리아 로마에서 열린 ‘국제 로봇 학술 대회’에서 대장암 수술법에 대해서 발표했다. 본사 임원진이 찾아와 “우리가 생각했던 아이디어를 구현하다니 감동했다”면서 교육 자료를 만들어주기를 부탁했다. 그 해 9월부터 김 교수 팀이 만든 교육 자료가 각종 학술 대회에서 배포됐고, 미국과 유럽 등 선진국 의사들이 가르침을 받으러 오게 됐다. 고려대 안암병원에는 이들을 위한 하루 교육 코스가 있다.

2009년에는 자신에게 복강경 수술을 가르쳤던 클리블랜드 클리닉에서도 “로봇 수술을 배우고 싶다”는 요청이 왔다. 김 교수는 미국 의료진을 위해 심야에 수술을 했고, 화상으로 수술 장면을 지켜보던 의사들은 감탄사를 내뱉었다. 김 교수는 미국 최고 권위의 메이요클리닉, 노벨상 선정을 주관하는 스웨덴 캐롤린스카 의과 대학 등에서도 수술법을 가르쳤다. 김 교수는 13개국의 의사 면허증이 있다. 수술 시범을 할 때 자국 의사 면허증이 있어야 하는 국가들이 있기 때문이다.

김 교수는 취미도, 특기도 수술인 전형적 외과 의사다. 술자리에 가지도, 골프를 치지도 않는다. 2014년 창립한 크리스천 전문 남성 합창단 ‘즐거움 너머 남성 찬양단(BPMC·Beyond Pleasure Male Choir)’에서 한 달 2시간씩 노래 부르는 것이 수술 이외 유일한 낙이다. 합창단은 지난 3월 서울 영산아트홀에서 공연하기도 했다.

김 교수는 요즘 인공지능(AI)을 적용하는 수술 로봇을 개발하는 일부 회사의 컨설팅을 맡고 있다. 아이디어와 경험, 빅 데이터가 융합해서 새 수술법이 만들어질 것으로 기대한다. 지금은 자신의 소명이 의사라는 것을 절감하고, 자신의 경험이 의사들에게 전파돼 보다 많은 환자를 살리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이성주 기자 stein33@kormed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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