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타고 사라지고…한국 최초 ‘그레이 아나토미’ 탄생 비화

서구권에서 가장 잘 알려진 해부학 교과서는 1858년 첫 출간된 이후 160년 이상 사용되고 있는 ‘그레이 아나토미(Gray’s Anatomy)’다. 놀랍게도, 유명 미국 의학 드라마의 모티프가 되기도 한 그레이의 해부학 책은 우리나라 최초의 해부학 교과서가 ‘될 뻔 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 해부학 교과서는 1906년 제중원(세브란스병원) 소속 올리버 R. 에비슨 교수와 그 제자인 김필순이 번역, 교열한 ‘해부학’ 1-3권이다.

일본, 중국에 비해 서양 의학을 늦게 받아들인 우리나라는 19세기 말 한국에 들어온 의료 선교사의 주도로 근대 의학 교육을 처음 시작했다. 1893년 11월부터 제중원 총 책임을 맡은 에비슨은 자신이 배웠던 그레이의 ‘아나토미(Anatomy of the Human Body)’로 해부학 강의를 시작했으나, 곧 개화기 조선에 낯선 서양 의학 지식을 전달하기에는 적절한 한글 번역어가 부족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원고 분실, 화재 사고…10년 지연된 번역 작업

에비슨은 한글 해부학 교과서 작업에 발 빠르게 착수했지만 그 과정은 녹록치 않았다. 1897년, 에비슨은 영어를 조금 할 줄 아는 한국인 조수를 만나 ‘아나토미’ 번역 작업을 진행하지만 안식년 사이 한국인 조수가 사망하면서 완성된 1차 원고를 분실하고 만다.

한국으로 돌아온 에비슨은 당시 제중원 통역 일을 하던 김필순을 통역 겸 조수로 선발, 의학을 가르치며 번역 작업에 착수했다. 단순 번역 보조가 아닌 어엿한 의료진을 키워내 제대로 된 의학 교과서 번역을 시도하려 한 것이다.

김필순이 참여한 2차 번역은 1차 번역과 같은 ‘아나토미’를 대상으로 했다. 에비슨과 김필순은 일본, 중국의 서양 의서 번역본을 참고해 영어 개념에 맞는 한국어 의학 용어를 만들어 냈다. 그러나 1900년부터 4년 간 작업해 완성된 2차 원고는 등사 직전 불에 타 완전 소실됐다.

에비슨과 김필순은 2차 원고가 사라진 직후 3차 번역에 돌입한다. 허나 3차 번역은 ‘아나토미’가 아닌 일본 해부학 책을 원서로 삼았다.

‘아나토미’ 대신 ‘실용해부학’, 일본 책 익숙해서?

에비슨과 김필순이 새로 선택한 책은 이마다 쓰카네의 ‘실용해부학(實用解剖學)’이었다. 1887년 일본에서 출간된 ‘실용해부학’은 당대의 권위 있는 독일 해부학 저서를 인용해 만들어진 책이었다. ‘실용해부학’을 토대로 한 3차 번역은 1906년 비교적 빨리 작업이 마무리 돼 같은 해 세브란스병원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해부학 교과서가 출간됐다.

에비슨과 김필순이 ‘아나토미’가 아닌 ‘실용해부학’을 새로운 번역 대상으로 삼은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몸이로소이다’ 전시 기획을 맡은 고은숙 국립한글박물관 학예연구사는 그 첫 번째 이유가 “김필순이 그레이의 ‘아나토미’를 번역할 당시 일본 해부학 책을 여럿 참고해 이미 일본 원서에 익숙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고은숙 학예사는 두 번째 이유로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돼 일본과의 관계가 더 밀접해졌을 가능성”을 꼽았다. 반면 정용서 연세대학교 의과 대학 동은의학박물관 학예연구실장은 “‘실용해부학’ 번역 결정에 을사조약이 영향 미쳤는지는 좀 더 따져봐야 할 부분”이라고 말했다.

정용서 학예연구실장은 “비록 ‘조선과 일본의 관계가 밀접해져 일본의 교육 방침을 따라가기로 결정’했다는 에비슨의 회고록이 있기는 하지만, 이는 1930년대에 쓰인 자료라 ‘해부학’ 출간 당시의 맥락을 정확히 설명한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했다.

다만 정용서 학예연구실장은 “김필순-에비슨의 ‘해부학’이 오직 ‘실용해부학’ 내용만을 담은 것은 아니라는 점”에 동의했다. 고은숙 학예사는 “‘실용해부학’ 원본에서는 치아를 설명할 때 간단한 윗니, 아랫니 그림만을 보여주지만 ‘해부학’의 같은 부분에 덧니, 영구치 등 추가적인 설명과 그림이 추가로 수록됐다”고 설명했다. 고 학예사는 “‘해부학’에는 ‘실용해부학’뿐만 아니라 ‘아나토미’ 번역 작업의 경험이 녹아 있는 셈”이라고 말했다.

한편, 김필순-에비슨이 번역한 ‘해부학’ 초본 전질은 지난 7월 19일 개최된 국립한글박물관 ‘나는 몸이로소이다’ 기획 전시에서 최초로 대중 공개됐다.

[사진=김필순-에비슨 해부학 교과서]

    맹미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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