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태죄, 일제와 종교가 만든 ‘괴물’

[인터뷰] ‘낙태죄’ 폐지 찬성하는 최규진 인하대 교수

낙태죄 위헌 논쟁이 다시 법정에 올랐다. 2012년 헌재 판정 이후 6년 만의 일이다.

지난 5월 24일 헌법재판소는 낙태죄 위헌 여부를 가리기 위한 공개 변론을 열었다. 공개 변론에는 “여성의 재생산권을 위협하는 낙태죄를 폐지해야 한다”는 찬성 입장과 “태아의 생명권을 인정해야 한다”는 반대 입장이 맞섰다. 종교 단체, 여성 단체 등 시민 사회 각층도 찬반 논쟁에 목소리를 보탰다.

‘코메디닷컴’은 헌재 공개 변론 전 구인회 가톨릭대학교 생명대학원 교수와 낙태죄 폐지 반대(현행 유지) 인터뷰를 진행했다. 구 교수는 “심지어 강간으로 인한 임신이라도 태아의 존엄을 훼손할 수는 없다”, “미혼모 지원 제도를 강화해 아이를 잘 낳아서 키울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반대 측의 주장에 최규진 인하대학교 의과 대학 교수는 “낙태죄를 유지한 채로 진정한 여성 권익을 추구하자는 주장은 모순적”이라고 반박한다. 2010년 프로라이프 의사회 운동으로 ‘낙태의 음지화’가 진행되고 나서 한국 낙태죄의 역사, 낙태죄를 둘러싼 주요 담론 등을 정리해온 최 교수를 만나봤다.

– 한국에 ‘낙태죄’가 처음 도입된 것은 언제인가?

“낙태를 법으로 다룬 역사의 기원을 찾으려면 조선 시대까지 거슬러 가야 한다. 조선은 명나라의 태형전(笞刑典) 조항을 따와 형법에 낙태를 언급했다. 다만 조선 말기까지도 낙태를 한 여성에게 직접 죄를 묻지는 않았다.

오늘날 우리가 떠올리는 낙태죄, 즉 낙태한 여성에게 죄를 묻는 자낙태(自落胎) 처벌이 처음 적용된 건 1910년 국권 침탈 이후다. 낙태한 여성에게 징역형을 내리는 일본 형법이 식민지 조선에 적용됐고, 그때의 낙태죄가 현재까지 계속 유지되고 있는 셈이다.”

– 일제가 적용한 낙태죄가 해방 이후까지 이어졌다. 해방 정부의 내부 반발은 없었나?

“1948년 헌법 초안을 만들 때 봉건적인 규정인 낙태죄를 폐지해야 한다는 지적이 있었다. 초안 입안자들은 ‘일단 낙태죄를 유지하되 각종 특수 사항을 고려한 특별법을 만들겠다’고 했다. 하지만 ‘한국 전쟁 후 인구 소모가 크다’, ‘독립국 주권을 유지하려면 4000만 명 이상의 인구 수준을 유지해야 한다’는 국가주의적 주장이 힘을 얻으며 폐지 의견이 무산됐다.”

– 나라에 필요한 인구수 유지를 위해 여성의 낙태가 죄로 남게 됐다는 셈이 아닌가. 인구 보존과 여성의 책임을 묶는다는 점에서 저출산의 원인을 여성의 고학력에서 찾은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보고서, 행정안전부의 ‘가임기 여성 지도’가 떠오르기도 하는데.

“국가주의를 위해 낙태가 동원된 전례는 이뿐만 아니다. 현행법상 낙태죄는 형법(제269조1항, 제270조1항)에 의해 처벌받고 모자보건법(제14조)에 따라 예외를 인정받는다. 헌법 초안 논의에서 낙태죄 예외 조항을 두자던 주장이 모자보건법을 통해 실현된 것인데, 실상 한국이 여성의 낙태를 허용하게 된 배경에는 박정희 정권의 가족 계획 사업이 있었다.”

1973년 제정된 모자보건법은 “아들딸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키우자”던 박정희 정권의 산아 제한 정책과 궤를 함께 한다. 최규진 교수는 “‘본인 또는 배우자가 우생학적 정신 장애나 신체 질환이 있는 경우’를 낙태죄 예외 조항의 첫 번째로 두고 있는 모자보건법은 1949년 일제의 우생보호법을 모체로 한다”고 설명한다. 인종, 유전적 요인에 따라 ‘건강한 아이’를 남기려 한 구세대의 악습이 모자보건법에 담긴 것. 최 교수는 “모자보건법은 정상 국회가 아닌 유신 체제 하의 비상국무회의에서 비공개로 통과됐다”며 “일본 우생보호법조차 인정하는 ‘사회 경제적 사유로 인한 낙태 허용’ 조항을 삭제해버린 전근대적인 법안”이라고 강조한다.

– 산아 제한 정책으로 큰 위력을 발휘하지 못했던 낙태죄는 2010년을 기점으로 다시 힘을 얻었다. 어떤 변화가 있었나?

“2009년 11월 이명박 대통령 직속 미래기획위원회가 제1회 저출산 대응 전략 회의를 주죄하면서 ‘한국인 늘리기’ 정책 과제의 하나로 ‘생명 존중(낙태 방지) 분위기 조성’을 내세웠다. 이듬해(2010년) 1월 산부인과 의사들로 구성된 프로라이프 의사회가 불법 낙태 시술 병원을 형사 고발하면서 낙태죄 처벌 분위기가 더욱 심화됐다.”

– 이명박 정부가 말하는 ‘생명 존중’ 담론의 기원은 무엇인가? 보수적인 종교 단체의 주장 그대로 이해하면 되는 것인가?

“그렇다. 특히 이명박 정권 때 기독교 근본주의 담론이 정치적으로 활용되는 경향이 강해졌다. 생명 존중이라는 담론이 저출산 극복의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다는 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여성의 권익을 향상시키려는 정치적 의지는 없지만 저출산 대책을 마련해야겠으니, 종교계의 담론을 끌어온 조야한 정책을 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정치권에서 이런 부실한 정책이 반발을 일으킨다는 점을 몰랐을 리 없다. 이때 프로라이프 의사회와 종교 단체가 행동대장 역할을 맡았다. 정부는 낙태죄를 처벌 정책을 직접 펼치는 대신 낙태죄 처벌에 관한 활동을 허용하는 간접적인 사인을 보냈다.

프로라이프 의사회가 낙태 시술 의료진 고발을 꾸준히 진행한 것은 아니다. 이 때문에 어떤 이들은 프로라이프 의사회 활동이 여성 낙태 시술에 큰 영향을 주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전문가 집단의 ‘지켜보고 있다’는 제스쳐만으로도 낙태를 고민하는 여성들은 위축될 수밖에 없다. 낙태죄가 불법이기 때문에 여성들의 피해가 가시적으로 집계되지 않았을 뿐이다.”

– 2016년에도 보건복지부가 불법 낙태 시술을 ‘비윤리적 진료 행위’ 항목에 추가해 처벌을 강화하려 하지 않았나. 극히 최근인 2018년 2월 유엔 여성차별철폐위원회도 한국 정부가 오랜 권고에도 낙태 문제를 개선하지 않고 있다고 비판했다. 불법 낙태 시술로 인한 건강상의 문제 등은 보건복지부가 전문가적 의견을 낼 수 있는 영역 아닌가?

“사실 가장 정상적인 구조라면 여성가족부는 여성의 권익 향상 측면에서 낙태죄 폐지에 관한 담론과 정책을 제시하고, 보건복지부는 낙태죄 폐지 여부와 별개로 여성의 건강 측면에서 낙태에 관한 여러 전문 지식을 제시하는 것이 해당 부서에 맞는 역할일 것이다.

의학적으로든 보건학적으로든, 낙태죄가 여성 건강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연구 결과는 너무나도 많다. 보건의료계의 전문가가 모인 보건복지부라면 이러한 객관적인 데이터에 기반해 보다 진취적으로 여성 건강권 개선의 시발점을 만드는 것이 마땅하다.

그런데도 이명박-박근혜로 이어지는 보수 정권이 여성, 저출산 문제를 실질적으로 개선할 만한 정책을 내지 않았기 때문에 2016년의 복지부 역시 비슷한 처방을 반복했다. 의사들의 낙태 시술을 비윤리적인 행위로 낙인찍어 조금이라도 실질적인 단속이 가능하도록 하는 조야한 정책 말이다.”

– 산부인과 수련 과정에서 낙태 시술법을 가르치기도 하나?

“정확하지는 않지만 일정 수준까지는 배울 것으로 안다. 하지만 낙태 시술이 범죄화된 사회에서는 무엇이 더 안전한 방법인지, 낙태 시술에 관한 최신 매뉴얼은 무엇이 있는지 등을 적극적으로 공유할 수 없다. 만약 시술 현장에서 산모 또는 태아에게 의료 사고가 발생한다면 의료진이 환자를 더 큰 병원에 보낼 수 있을까. 이처럼 낙태죄는 의료인과 당사자에게 생명의 위협이라는 실질적인 문제를 일으킨다.”

– 최근 맞붙는 낙태죄 폐지 논쟁은 ‘여성의 자기 결정권’ 대(對) ‘태아의 생존권’이라는 낡은 구도를 반복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특히 ‘여성의 자기 결정권’이라는 말은 낙태가 마치 저출산 시대에 아이를 낳으려 하지 않는 무책임한 혹은 이기적인 여성의 권리인 것처럼 묘사되기도 한다.

“‘여성의 자기 결정권’이라는 표현만 떼어 놓고 보면 낙태권은 마치 여성이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는 권리처럼 들릴 수 있다. 하지만 선진국의 낙태죄 논의에서 여성의 자기 결정권을 강조하는 맥락은 임신-출산-낙태가 인간(여성)이 살면서 부득이하게 경험할 수밖에 없는 일이라는 데 있다.

완전한 피임이란 불가능하고, 인간이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고, 인간이 사랑하는 누군가와 함께 살아간다면 결국 낙태는 어느 누구나 예기치 않게 경험할 수 있는 문제다. 프랑스 정부가 여성에게 낙태 시술 정보를 주거나 시술 비용을 대신 지불해주는 것은 여성의 전 생애에 자연스럽게 겪을 수 있는 그 문제를 사회가 함께 해결한다는 신호다.

실제 현실에서 정말 좋아서, 원해서 낙태를 하는 여성이 과연 어디 있겠는가. 낙태를 고민하는 여성은 낙태가 주는 신체적 부담, 정신적 스트레스를 충분히 잘 알고 있다. 때문에 낙태를 허용하는 많은 나라는 국가가 여성의 낙태 문제에 직간접적으로 개입하는 것을 인권 측면에서 고문이라고 보기도 한다.우리 사회는 이런 사람들에게 낙태죄라는 사회적 굴레를 한 번 더 씌우고 있다.”

– 여성의 건강권 확보가 낙태죄 폐지 논쟁의 새로운 돌파구가 될 수 있을까?

“어떤 논쟁이든 추상적인 개념만으로는 현실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태아의 생명권’이라는 개념에 입각한 생명 윤리가 아닌 정말 여성의 현실에 기반한 윤리적 논의가 필요하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여성들이 낙태를 고민하는 현실을 제외한 채 논의하는 낙태죄 폐지 논쟁은 결국 논쟁이 논쟁을 낳는 꼴이 될 수밖에 없다.

최근 기독교 근본주의 진영은 낙태죄 자체는 그대로 두되 여성의 권익 문제에 적극적으로 나서자는 전술을 펼치고 있는 듯한데, 이는 속임수 같은 전략이다. 앞서 말했듯 낙태는 인간이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살며 누구나 경험할 수 있는 문제다. 세계보건기구(WHO)가 낙태죄를 고민하는 이유는 바로 낙태죄가 자연스러운 성관계나 피임, 가족계획 등 생명 잉태를 조절하려는 모든 성행위를 터부시하는 간접적인 효과가 크기 때문이다.

낙태죄가 폐지된다면 양지에서 훨씬 건강한 방법으로 피임, 낙태가 가능해지고, 이는 오히려 낙태율을 낮추는 경향을 불러 온다. 여성의 건강 증진을 위한 실질적인 방향이 있음에도 낙태죄는 남겨둔 채 다른 방도로 여성 권익을 보호하자는 주장은 모순이 아닐 수 없다.”

– 낙태죄가 미혼 여성뿐 아니라 한 가정의 가족 계획에도 영향을 미친다면 이는 더더욱 여성 혼자만의 문제가 아닐 것 같다. 이번 헌재 공개 변론에 특별한 입장을 내지 않은 보건 당국에 바라는 점이 있다면?

“낙태 시술자의 대다수가 경력 단절, 양육비 등 사회경제적 이유로 낙태를 고민하는 기혼 여성인 점을 고려한다면 낙태죄 폐지는 ‘건강한 여성’뿐 아니라 ‘건강한 가족’을 위한 이슈이기도 하다. 많은 보건학적 데이터가 낙태 합법화를 지지해주고 있기 때문에, 보건복지부가 전문가적 의견을 제시한다면 더 건강한 여성의 삶을 만드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부디 보건 당국이 기존의 보수적 자세를 탈피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사진=The Abortion Right Campaign]

    맹미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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