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해도 지켜야 할 비밀 있으니…!’

 

배정원의 Sex in Art(25)

단테 가브리엘 로세티, 『판도라

그림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은 아름다운 회색 눈동자를 가진 젊은 여인이다. 하지만 왠지 그녀의 눈빛은 무척 복잡해 보인다. 붉은 기가 도는 갈색 머리의 그녀가 길고 하얀 손으로 꼬옥 쥐고 있는 작은 상자에서는 붉은 빛의 연기가 새어나오고 있는데, 그녀가 오른손으로 뚜껑을 꽉 누르고는 있지만, 기세 좋게 흘러나오는 연기를 막을 수는 없다. 여인의 얼굴은 몹시 아름답지만 꽉 다문 작은 입술 탓인지 연약하기보다는 선이 굵고 고집이 세어 보인다.

그녀의 얼굴표정으로 보아선 그녀가 자신의 행동에서 비롯된 비극에 대해 두려워하는 건지 아니면 일부러 그런 건지 알 도리가 없다. 붉은 빛의 옷깃이 넓은 드레스는 그녀를 마치 여신처럼 보이게 하는데, 물결치는 적갈색의 곱슬머리와 점점 그녀를 둘러싸고 있는 주홍색 연기 때문에 자꾸 불안한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녀의 이름은 판도라…! 신이 인간에게 선물한 최초의 여인이다. 프로메테우스가 인간에게 몰래 불을 훔쳐다 준 것을 알게 된 제우스는 격노하여, 그에게 저주를 내려 코카서스의 바위에 결박하고는 독수리에게 간을 쪼아 먹히는 지독한 고통을 매일 겪게 한다. 그 고통은 훗날 헤라클레스가 독수리를 죽이고, 그를 풀어 줄 때까지 계속된다. 독수리가 간을 쪼아 먹어도 신의 신분인 그는 영생해 계속 새살이 돋기 때문이다.

그런 저주를 내리고도 분이 안 풀린 제우스는 헤파이토스에게 흙과 물을 반죽해 아름다운 여자를 만들도록 하고, 신들로 하여금 그녀에게 하나씩 선물을 주도록 한다. 지혜의 여신 아테나는 허리띠를 만들고 화장을 해주었으며, 아프로디테는 매력과 동경과 비탄을, 헤르메스 신은 그녀에게 설득력과 기만과 사기, 교활한 심성을 주었으며, 아폴론은 음악을 주었다. 제우스는 그녀로 하여금 인간남자에게 고통을 주고 싶었던 것인데, 땅으로 내려 보내는 판도라에게 상자 하나를 주며 절대로 열지 말 것을 당부했다.

‘미리 아는 자’란 뜻의 프로메테우스는 이 모든 것을 예상해서 동생 에피메테우스에게 ‘제우스로부터 어떤 것도 받지 말라’고 주의를 주었건만, 판도라의 아름다움에 반해서였는지 덥석 판도라와 상자를 받고 만다. 호기심이 많은 여자인 판도라는 ‘절대 열지 말라’는 제우스의 당부에 상자 속에 든 것이 더욱 궁금했고, 그래서 살며시 뚜껑을 열었다. 그 순간 상자안의 모든 험악한 것들이 빠져 나와 세상으로 퍼져 나갔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종류의 불행이 나간 후 망연자실하고 있는 판도라에게 상자 속의 희망이 문을 두드려 자신을 내보내 달라고 부탁하고, 겨우 상자 밖으로 나온 ‘희망’ 덕분에 인간은 어떤 불행도 ‘내일은 좋아지겠지’라는 희망 속에서 이겨내게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이 아름다우나 고집스러워 보이는 판도라는 이탈리아 라파엘전파 화가인 단테 게이브리얼 로세티(1828~1882)가 그렸다. 판도라와 상자 이야기는 많은 화가들에 의해 그려졌으나, 대개는 존 윌리엄 워터하우스가 그린 것처럼 아주 연약한 호기심 많은 소녀처럼 그려진 반면 로세티의 판도라는 어린 소녀라기보다는 세상 물정을 제법 아는 듯한 성숙한 여인이다.

그도 그럴 것이 『판도라』의 모델은 소녀가 아닌 로세티의 연인인 제인 모리스였기 때문이다. 베아트리체에게 모든 열정과 사랑을 쏟았던 문학가 단테와 달리 화가며, 시인이며, 번역가였던 로세티는 그가 가졌던 풍부한 재능에 비례해 못 말리는 바람둥이였다. 로세티는 당시 라파엘 전파 화가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던 엘리자베스 시달(밀레이의 ‘오필리어’ 모델이었던)을 10년이나 기다리게 한 후에 결혼했으나, 타고난 바람기로 그녀를 힘들게 했고, 아기를 사산한 엘리자베스는 결국 아편을 먹고 자살하고 만다. 로세티는 아내의 자살 이후 더욱 방탕하게 살며 방황하게 되는데, 그때 꽤 오랫동안 그의 마음을 잡아 준 여인이 제인 모리스이다. 그런데 제인은 이미 로세티의 친구인 윌리엄 모리스의 아내였는데, 모리스는 이들의 관계를 알고도 로세티를 자기 집에서 살게 한다. 참으로 기묘한 관계이다.

그렇게 10년간의 동거 끝에 이들은 당시 엄격하고 도덕적이던(속이야 어떻든 간에) 사회의 비난 속에 어쩔 수없이 헤어졌고, 그 뒤 로세티는 약물중독으로 인한 간질증세로 고생하다가 1882년 혼자 죽음을 맞는다. 라파엘전파는 당시의 사회상 가장 고상하고, 종교적이며, 가족의 가치를 최고로 치던 빅토리아 시대 속의 위선과 탐욕의 모습을 독실한 신앙심과 관능의 이중성으로 자신들의 작품에 반영했다.

이렇게 ‘열지 말아야 할 비밀’을 밝히는 것을 ‘판도라의 상자’라고 우리는 부른다. 정말 사랑한다면 비밀이 없어야 한다는 믿음은 허구이고, 불행을 여는 열쇠가 되곤 한다. 특히 첫 날 밤을 치룬 신부가 진실한 사랑을 증명하기 위해(?) 털어놓는 과거의 사랑에 대한 구체적인 고백은 아주 대표적인 ‘판도라의 상자’이다. 당연히 부부 사이는 가능한 비밀이 없어야 하고, 사랑하는 사이는 ‘정직’해야 하지만 이것도 지나치면 관계의 독이 된다. 고백한 이야 모든 것을 숨김없이 털어놓는 것으로 자신의 부담을 덜어냈을지 모르지만 상대는 그때부터 시지프스처럼 내려놓지도 못하는 짐을 이고 평생을 갈팡질팡 살아야 할 수도 있다.

‘솔직’한 것이 최선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이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고해성사를 받는 신부님이 아니다. 가능한 정직해야 하지만, 털어 놓기 전에 상대가 견딜 수 있는 사람인지 부터 깊이 생각해봐야 한다. 또 모든 사랑에는 소유욕이란 다른 얼굴이 숨어 있다.

또 누군가의 아픈 경험은 사면 받아야 할 대상이 아니라 자기가 감내하고 견뎌야 할 오로지 자신의 몫이고, 책임이며, 좋은 배움이다. 아주 성숙한 사람이라면, 이것도 어쩌면 연륜이 많이 필요한 일인지라, 나이 들어 만난 사이라면 몰라도 젊은 혈기를 가진 사람에게(나이와 상관없이) 과거를 털어 놓았다간 사랑만 깨지는 것이 아니라 인생 자체가 사라져 버릴 수도 있다. 자신의 고백을 듣고도 상대가 의연하게 자기를 끌어안을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은 어쩌면 그야말로 ‘예측할 수 없는’ 희망 사항이 될지도 모른다.

이렇게 무거운 고백이 아니더라도, 상대가 힘들어 하는 결점을 거론한다든지, 자신의 위험하고 야한 성적 환타지를 털어 놓는다든지 하는 것 또한 삼가야 할 일이다. 현대를 사는 우리는 쿨한 사랑을 하고 싶어 하지만, 진실은 진정으로 깊이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절대 그에게 쿨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쿨하다는 것은 ‘거리’를 둘 수 있다는 의미이므로…..!

로세티의 ‘판도라’ 얼굴이 결연하면서도 불안하고 뻔뻔하면서도 연약해 보이는 것은 바로 이러한 사랑의 야누스적인 얼굴을 알고 있기 때문이 아닐지….!

글 : 배정원(성전문가, 애정생활 코치, 행복한성문화센터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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