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들의 어깨 위에서 영원히 잠든 콜럼버스

이재태의 종 이야기(41)

아메리카 대륙을 유럽에 소개한 콜럼버스

‘누구라도 할 수 있는 쉬운 일처럼 보이지만, 그 일을 처음으로 생각해 내는 것은 어렵다’고 할 때 ‘콜럼버스의 달걀’과 같다고 한다. 콜럼버스는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하고 귀국한 후, 영웅이 되었다. 환호 속에 자주 파티에 초대를 받게 된다.

그러자 그를 시기하는 사람들도 늘어갔다. 어느 날 콜럼버스가 귀족들의 파티에 초대되어 자기가 발견한 신대륙에 대하여 연설을 하자, 한 사람이 크게 빈정거렸다. “대서양을 서쪽으로 계속 항해하여 새 섬을 발견한 것이 그렇게 대단한 일입니까? 당신이 아니더라도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에요!” 얼굴이 상기된 콜럼버스는 탁자 위에 놓인 달걀을 집어 들고 참석자들에게 물었다. “여기 이 달걀을 탁자 위에 세울 수 있는 분이 있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시도해 보았으나, 누구도 성공하지 못하였다. “아무도 못합니까? 그럼 내가 해 보겠습니다.” 그는 달걀 끝을 탁자에 쳐서 껍질을 깨뜨렸다. 그리고는 깨어진 쪽을 밑으로 하여 쉽게 달걀을 세웠다. “남이 하는 것을 따라 하기는 쉽습니다. 그러나 이처럼 처음으로 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나의 탐험도 마찬가지입니다.”

미국과 중앙아메리카 일부 국가는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날인 10월 12일(미국은 10월 두 번 째 월요일)을 ‘콜럼버스의 날’로 정하여 기념하고 있다. 특히 미국에서는 건국과 발전에 공헌한 이탈리아계 미국인들에게 감사하고, 이들의 희생을 기리는 행사를 거행한다. 그러나 좌파 민족주의자였던 베네수엘라의 차베스 대통령은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에 상륙함으로서 150년간 계속된 인종 학살이 촉발되었다.”며, “중남미 사람들은 ‘콜럼버스의 날’을 기념하지 말라.”고 촉구하였다. 콜럼버스가 상륙하였을 때 1억에 달하였던 원주민이 150년이 경과한 뒤에는 300만 명으로 감소했던 사실을 말한 것이다. 그는 2002년 ‘콜럼버스의 날’을 ‘원주민 저항의 날’로 바꾸는 법령을 공표한 바가 있다.

아래 사진에 보이는 것은 콜럼버스가 보트를 타고 아메리카 대륙에 처음 상륙하는 모습인 ‘콜럼버스의 상륙’이라는 어린이용 장난감이다. 앞쪽에 줄을 묶어 장난감을 끌면 바퀴가 굴러가며 위쪽의 종을 연속해서 처서 소리를 내는 금빛 도금 금속제품이다. 길이 19cm, 폭 9cm의 크기이고, 아래 부분에 1893년 10월31일 발명특허 등록이라는 문구가 있다. 미국인은 콜럼버스를 오늘의 미국이 있게 한 은인이라 생각하고 있고, 어린이들에게도 콜럼버스의 탐험정신을 전해주고자 노력하고 있다. 이 종 장난감도 그와 같은 교육적인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Gong & Gong회사가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상륙 400주년을 기념하여 제작하였다. 우리나라가 역사상 최초로 참가했던 국제박람회인 1893년 미국 시카고 박람회에서 처음 판매되었다. 보트 위에는 4명의 사람이 항해를 하고 있고, 보트를 지휘하는 콜럼버스는 바깥으로 분리할 수 있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는 1451년 이탈리아의 항구 도시 제노바에서 태어났다. 독실한 가톨릭 집안에서 성장하였고, 처음에는 아버지를 도와 양모 직공 일을 하였다. 그는 제노바 항구에서 이루어지던 이탈리아와 동방상인들 간의 무역 거래를 눈으로 보면서 바다와 동방과의 무역에 관심을 가졌다. 그가 25세였을 때, 탑승했던 제노바의 상선이 프랑스와 포르투갈 해적선의 공격을 받아 침몰하였다. 바다에 떠있는 노를 잡고 헤엄을 쳐서 겨우 살아난 그는 포르투갈의 리스본으로 갔다.

리스본에는 대서양으로의 항해를 마치고 돌아온 선장들과 미지의 세계에 대해 도전하고자 한 사람들이 많았다. 그곳에서 그는 동생들과 지도를 제작하며 독학으로 에스파냐어를 공부하였다. 선박 조종법을 익혀 북대서양의 아이슬란드와 같은 도서 국가로 항해를 한 기록도 있다. 그는 1478년 부유한 포르투갈 선장의 딸과 결혼하여 장인의 유품인 항해 지도와 선장 일지 등을 물려받았다. 거기에는 대서양의 바람 상태를 비롯한 중요한 항해 정보가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었는데, 이로써 평소에 꿈꾸던 동양으로 향하는 항해를 위한 필요조건을 모두 갖추게 된 것이다.

당시 유럽인들에게 가장 먼 땅은 중국, 인도, 그리고 일본이었다. 그곳을 비단과 향료, 그리고 황금과 보물이 가득한 꿈의 나라라고 생각했다. 머나먼 실크로드를 거쳐 유럽으로 들어온 동양의 물품들은 매우 비싼 가격으로 거래되었으므로, 낙타 대신에 배로 동양으로 가는 바다의 지름길을 찾는 사람이 많았다. 콜럼버스도 이들 중 하나였다. 그는 포르투갈의 왕에게 인도로 가는 탐험 항해를 후원해 줄 것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하자, 에스파냐로 향했다.

우여곡절 끝에, 1492년 4월 17일 이사벨여왕과 페르디난도 왕으로 부터 신대륙 탐험에 대한 후원을 확약 받는다. 이탈리아 출신의 평민인 콜럼버스는 자신과 후손들에게 귀족의 칭호인 ‘돈(Don)’과 제독의 계급을 요구했다. 새로 발견된 땅에서 얻을 수입의 10%를 자신에게 배당하고, 모든 무역 거래의 8분의 1을 자신의 지분으로 해달라고도 하였다. 또한, 그가 발견한 땅이 식민지가 될 경우 자신을 총독으로 임명해달라는 요구도 하였다. 이러한 엄청난 조건은 그가 포르투갈 왕에게 제시한 조건과도 같았는데, 이사벨 여왕은 결국 콜럼버스가 원하는 조건을 승인하였다. 여왕은 처음 계약을 체결한 뒤에도 계속 지원을 미뤘기 때문에, 처음 약속한 뒤 6년이 지나서 첫 항해가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그의 항해는 기독교의 전도나 미지의 세계에 대한 탐험보다는 인도와의 교역으로 얻을 수 있는 각종 향신료와 같은 재물을 얻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는 총 4차례에 걸쳐 아메리카 대륙으로의 항해를 떠났다. 첫 번째 항해는 1492년 8월 3일 출발하여 10월 12일에 현재의 바하마 제도의 섬에 도착하였고, 이 섬을 ‘구세주의 섬’이라는 뜻의 ‘산살바도르’로 명명하였다. 그리고는 쿠바와 히스파니올라(현재의 아이티)에 까지 도달하였다. 콜럼버스는 원주민들을 인도 사람이라는 뜻인 ‘인디오’라고 불렀고 그곳을 일본이나 중국의 해변이라고 생각하였기에 마르코폴로의 ‘동방견문록’에 나오는 황제인 ‘그레이트 칸’과 금은보화를 찾으러 돌아 다녔다고 한다. 탐험 도중에 산타마리아호가 파손되자, 한 섬에 약 40명의 선원을 남긴 후에 ‘이스파니올라’라고 명명하였다. 그는 1492년 12월 에스파냐로 귀국하였고, 왕 부부로부터 ‘신세계’의 부왕으로 임명되었다. 그의 귀국 장면은 기록으로 남아있다.

“콜럼버스는 의기양양하게 왕국으로 향하였다. 물고기 뼈와 금 장신구로 머리 장식을 한 인디언들과 화려한 앵무새를 비롯한 여러 종류의 새를 지니고 행진하는 이 용감한 모험가의 특이한 행렬을 보기 위해 농부와 귀족들이 모여들었다. 하인들은 순금과 호박을 들고 그와 선장들의 뒤를 따랐다. 바르셀로나 왕궁에 그가 들어서자 귀족들이 일제히 일어섰다. 이것은 이 나라에서 가장 저명한 귀족들만 누릴 수 있는 존경의 표시였다. 왕궁의 홀로 들어선 그가 페르디난도와 이사벨 앞에 무릎을 꿇자, 두 사람은 그를 일으켜 세우고, 여왕의 오른편에 앉아 모험담을 이야기하도록 했다.”

그는 이때 신대륙에는 금광이 많다는 거짓말을 했다.

두 번째 항해는 1493년에 17척의 배와 1,200명의 인원의 대 탐험단으로 구성되었다. 대부분은 그의 선전을 믿고 금을 캐러 가는 사람들이었다. 선단이 히스파니올라 도착해보니, 1차 항해 시에 남겨 두었던 식민지 개척자들은 타이노 원주민들의 저항으로 모두 살해되고 없었다. 콜럼버스는 여기에 식민지인 이사벨라 시를 건설하고, 토지는 모두 에스파냐인에게 나누어 주었다. 원주민들에게는 세금을 부과하고 경작과 금 채굴과 같은 부역을 명령하였다.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금의 산출량이 보잘 것 없어서, 약속을 한 금을 에스파냐로 보낼 수 없었다. 보낼 수 있는 특산물은 노예뿐이었다. 이 때문에 콜럼버스는 1496년 본국으로 돌아와서 문책을 당하였다. 결국 수백 명의 원주민이 유럽으로 보내졌고 다수는 그 과정에서 죽었다. 남은 원주민들도 할당된 금을 채우지 못하면 수족이 잘렸다. 많은 원주민들이 도망갔으나 에스파냐 인들은 이들을 사냥하듯이 죽였고, 절망 속에서 동반 자살하는 원주민들도 많았다. 유럽에서 전파된 천연두와 같은 질병이 퍼져서 50년이 지나자 수십만 명의 카리브해 원주민들이 사망했다. 25만 명이었던 타이노 원주민은 60년 뒤 겨우 수백 명만 살아남았다.

총 네 번의 콜럼버스 항해에서, 두 번째 항해 이후부터 왕과 여왕은 콜럼버스를 멀리하기 시작했다. 1498년의 세 번째 항해에서도 원하는 금은보화는 얻지 못하였다. 오히려 항해 도중에 히스파니올라에서 반란이 발생하여, 본국으로 송환되었다. 여러 차례의 갈등 끝에, 1502년 콜럼버스는 왕이 지원해준 작은 배 4척을 타고 마지막 항해를 떠났다. 동참하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 이 항해에서도 금은보화를 찾지 못한 콜럼버스는 1년 동안 자메이카 해안에 갇혀 고생 하다가 1504년에 에스파냐로 돌아왔다. 스페인 왕실은 항해에서 돌아온 그를 외면하였다. 그해 그를 후원하던 이사벨 여왕이 죽고 페르디난드 2세가 즉위하자 신하들은 그는 사기꾼이므로 처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콜럼버스는 재산과 제독 직위를 압수당한 채 비참한 노년을 보내게 된다. 

콜럼버스는 좌절한 가운데 관절염에 시달리다가 1506년 스페인 남부 바야돌리드에서 55세로 사망하였다. 에스파냐 왕실의 그 누구도 그의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유해는 수도원에 매장되었다가, 그가 남긴 유언에 따라 36년 뒤 아들 디에고가 총독으로 부임할 때 식민지 도미니카의 산토 도밍고로 이장하였다. 그러나 1795년 프랑스가 이 지역을 점령하자, 쿠바의 하바나로 다시 이장되었다. 1898년 쿠바가 독립하자 유골은 훼손을 우려하여 다시 스페인으로 운구되어 세비아 성당에 안치되었다. 세비아 성당에는 콜럼버스의 유언에 따라 매장 대신 아래쪽에 서있는 네 사람의 조각상이 관을 받들고 있는 청동 무덤이 만들어졌다. 조각의 네 사람은 14세기 카스티야, 레온, 아라곤, 나바라의 왕이다. 콜럼버스는 ‘죽어서도 스페인 땅을 밟고 싶지 않다. 내가 발견했던 히스파놀라 섬(도미니카)에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이에 따라, 그의 유해가 세비야에 돌아왔으나 스페인 땅에 닿지 않도록 콜럼버스의 관을 스페인 왕들의 어깨 위에 올려놓은 것이다. 1877년 도미니카의 산토 도밍고 성당의 공사도중, ‘저명하고 고귀한 남작, 돈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라고 새겨진 납상자에 든 유골의 일부가 발견되었다. 도미니카 정부는 1992년 콜럼버스 기념 등대라는 기념관을 짓고 건물 중앙에 유해가 든 납상자를 안치했다. 스페인은 DNA검사로 세비야의 유해가 콜럼버스의 것이라고 밝혔으나, 도미니카는 상자의 유골에 대한 DNA 조사는 허용하지 않고 있다. 두 나라는 서로 진짜 콜럼버스의 유해를 지키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콜럼버스는 죽을 때까지 자기가 발견한 땅을 인도의 일부라고 믿었다. 이 때문에 신대륙은 그의 이름 대신에 플로렌스의 탐험가 아메리고 베스푸치의 이름을 따서 아메리카라고 불리게 되었다. 사실 이 대륙에 오래 전부터 살고 있었던 원주민들에게는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했다고 선언한 것은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친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다. 이미 선사 시대부터 아시아인들이 베링 해협을 건너 아메리카 대륙에 정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필자는 이와 같은 이유로 이 글의 제목을 ‘아메리카 대륙을 유럽에 소개한 콜럼버스’라고 붙였다. 그러나 콜럼버스의 항해가 유럽인들의 세계관을 완전히 바꿔놓았다는 점은 확실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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