팍팍한 세상살이… 명절이 두려운 사람들

 

주부 김소정(48)씨는 이번 설에는 큰 집에 가지 않기로 했다. 김씨는 3남 2녀 대가족의 둘째 아들인 남편 이모(49) 씨를 따라 명절만 되면 큰 집에 들러 차례를 지내고 친지들과 얘기꽃을 피우곤 했다. 하지만 이번 설에는 그럴 엄두가 나지 않는다. 다른 형제들도 김 씨의 사정을 이해하는 눈치다.

남편 이 씨는 지난해 9월 모 금융회사에서 퇴직한 후 극심한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다. 밤잠을 못 이뤄 부부간에 각방을 쓴지 오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김 씨의 장남은 잇따른 취업 실패 후 좀체 마음을 다 잡지 못하고 있다. 짜증을 내는 횟수도 잦아졌다. 자연스럽게 집안은 적막감이 감돌 때가 많다. 김 씨는 설날 큰 집에서 온 가족이 우울 감을 보이기보다는 차라리 내 집에서 머물기로 했다.

김 씨 가족처럼 설 명절이 즐겁지 않은 사람들이 많다. 지난해 금융권을 중심으로 퇴직자가 급증하면서 우울증이나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호소하는 중년 남성들이 늘고 있다. 장래가 불투명한 20~30대 취업 재수생들도 마찬가지다.

이들의 공통점은 대인기피증 증상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가까운 친척들도 보기 싫어하는 사람이 있다. 특히 명절 때는 ‘잘나가는’ 사촌들과 비교대상이 되기 때문에 큰 집 방문이 바늘방석인 경우가 많다.

이들은 다른 사람 앞에서 창피를 당하거나 난처해지는 것에 대해 과도한 두려움을 가진다. ‘직장에서 밀려난 사람’ ‘취업 불능자’로 낙인찍히는 것에 대한 막연한 공포가 있다. 평소 교류하던 지인들과도 연락을 끊는 것은 이런 증상 때문이다.

이들에게 몇 십 명의 친족들이 모이는 설날은 공포로 다가올 수 있다. 자칫 사정을 모르는 집안 어른들이 “직장은 어떻게 됐어?”라고 물으면 그 자리에서 벗어나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된다. 온 가족이 모이는 명절이 우울증 등 정신질환을 악화시킬 수 있는 것이다.

서울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권준수 교수는 “유난히 체면을 중시하는 사람들이 그동안 집착하던 자신의 브랜드를 잃으면 좌절감이 더욱 클 수 있다”면서 “이런 사람은 열등감이 과도해져 우울감이나 불안장애, 강박증세를 호소할 수 있다”고 했다.

이어 “불안장애나 우울증은 정신적인 질환이지만 우리 몸에 호르몬과 혈관 변화를 일으켜 교감 및 부교감 신경의 균형을 깨뜨려 심장혈관 질환으로도 이어질 수 있다”고 했다. 정신적인 충격이 다른 질병으로 확산될 수 있기 때문에 조기치료가 중요하다는 얘기다.

명절을 앞두고 좌절을 겪은 사람들에게는 친지들의 따뜻한 말 한마디가 큰 힘이 될 수 있다. “그런 일로 설에도 안와?”라는 말은 이들에게 더욱 큰 상처로 다가 간다. 주부 김 씨에게는 “고생한다. 우울증은 꼭 병원에서 치료받아야 한다”며 남편의 우울증 치료에 적극 나설 것을 권해야 한다. 명절에는 체면이나 브랜드 보다는 끈끈한 가족사랑에 기대야 한다.

    김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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