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을 짓밟고… 모자 단추로 우월감 과시

이재태의 종 이야기(31)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의 모자 단추

1월 30일은 조선 역사상 가장 끔찍한 사건 중의 하나인 ‘삼전도의 굴욕’이 있었던 날이다. 명과 청(후금) 사이에서 줄타기 외교를 하던 광해군을 몰아내고 인조가 즉위했다. 인조는 청나라를 변방의 오랑케로 인식하며 망해가던 명나라에 사대를 하였다. 1627년 정묘년 청의 침입(정묘호란) 시에는 임금이 강화도로 대피하여 장기전을 대비하였다. 이에 조선이 후방을 공격할 것을 걱정한 청나라는 강화를 제의하고, 형제의 화친을 맺은 후 철수하였다.

그러나 청 태종 홍타이지는 명나라를 정복하기 전 후방의 조선을 먼저 평정하여야 했다. 청군은 1636년 12월 언 압록강을 건너 조선군을 대파하며 빠르게 남하하였다. 한양을 정복한 후 인조가 피난하였던 남한산성을 포위하게 된다. 마침내 1637년, 이날 인조는 청 태종에 항복을 하였다. 인조는 푸른 옷으로 갈아입은 뒤 백마를 타고 남한산성의 서문을 나와 삼전도 들판에서 항복 의식을 펼쳤다. 청의 신하가 되기로 하였으니 용포를 입을 수 없었고, 죄를 지었으니 정문으로 나올 수 없으며, 항복을 상징하는 백마를 타고 나온 것이다.

청 태종은 9층 계단 위의 수항단에 황색 장막과 양산을 펼쳐 놓고 용상에 정좌하여 인조의 도착을 지켜보았다. 인조는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 세 번 큰절을 하고 언 땅에 아홉 번 머리를 박으며 무릎을 꿇는 것)의 예를 표하였는데, 이는 여진족이 천자를 배례하는 의식절차였다. 인조는 청의 장수 용골대에게 머리를 찍는 것이 약하다는 질책을 받고 이마에 피가 나도록 땅바닥에 머리를 조아렸다.

청 태종은 항복 의식 도중에 고기를 베어 개에게 던져주었다. 항복한 조선을 개로 간주하고, 은혜를 베풀어 주는 의미로 개에게 고기를 던지는 치욕적인 의식이었다. 인조는 대국에 항거한 죄를 용서해 줄 것을 청하였고 청 태종은 조선 국왕의 죄를 용서한다는 칙서를 내렸다. 이후 청 태종은 조선의 항복을 기념하려는 뜻에서 지금은 서울 송파구인 삼전도에 ‘대청황제공덕비 大淸皇帝功德碑’를 세우게 하였다.

만주인은 오래 전부터 여진(女眞)족이라 불려졌다. 여진족의 일부는 12세기에 화북지방으로 진출하여 흑룡강의 아무르 지방을 중심으로 금(金)나라를 세웠는데, 대부분은 만주에 정착하여 농업 위주로 생활하였다. 명나라는 만주를 간접 통치하였는데, 만주의 여러 부족에 대하여 서로 분열정책을 취하였다. 임진왜란을 전후하여 만주에 대한 명의 통제력이 약해지자 여진 부족의 족장 누르하치가 다른 부족을 통일하고 1616년 스스로 한(汗)의 지위에 올라 국호를 후금(後金)이라 하였으니, 그가 청의 태조이다.

명나라는 후금을 제압하려 하였으나 오히려 대패하여 요하강 동쪽을 잃었다. 2대 왕인 태종은 먼저 명과 조선의 연합을 막기 위해 정묘년과 병자년 두 번에 걸쳐 조선을 침공한 것이다. 청 태종은 내몽골을 정복하고 1636년 황제의 위에 올라 국호를 대청(大淸)으로 고쳤다.

청나라가 부흥한 시기에는 명나라 궁정의 당쟁과 농민반란이 많았다. 1644년 이자성의 농민 반란군은 드디어 북경에 진입, 명나라를 멸망시킨다. 이때 농민군에 의한 보복을 두려워한 명의 지배계급은 청군과 강화를 맺었고, 특히 주요 요새인 산해관(山海關)을 지키던 오삼계는 자진하여 청군에게 길을 열어주었다.

결국 태종의 아들 순치제가 이자성을 토벌하며 수도 북경을 함락하며, 중국 대륙의 지배를 선언하였다. 당시 만주를 정복한 만주족은, 피지배층 한족들로부터 오랑캐라며 극심한 저항과 멸시를 받았으므로, 이들을 제압하기위하여 많은 한족을 학살하였다. 기록에는 양저우 한 곳에서만 약 80만 명이 학살 되었고, 중국 인구는 1600년 1억2천~2억 정도에서 1650년 1억~1억5천 정도로 감소한 것으로 보인다.

청에 대한 한족의 저항은 옛 왕족 출신의 왕들이 ‘남명(南明)’을 건국하였으나 힘을 얻지는 못하였다. 이들보다는 처음에는 오히려 청에 협력하였던 오삼계, 상가희, 경중명의 삼번(三藩)의 저항이 심하였다. 제4대 황제 강희제는 삼번의 난을 진압하고, 대만의 정씨 왕조를 정벌하며 마침내 전 중국을 통일하였다. 처음 25만 명 정도에 불과한 만주족이 마침내 중국대륙을 정복한 것이다.

만주족은 한족을 제외한 이민족으로서는 가장 오랫동안 중국을 지배하였다. 청의 초기에는 강희제와 건륭제와 같은 훌륭한 황제들이 통치하여 한족의 명나라뿐 아니라 주변의 몽골, 위구르, 티베트를 정복하여 몽골의 원나라를 제외한 역대 중국 왕조 중에서 가장 큰 영토를 이루었다. 또한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하여 네르친스크 조약(1689년)을 체결하고 현재의 중-러 국경을 확정하였다. 건륭제 당시의 영토는 몽골, 신강, 티베트를 모두 포함한 것이었다. 또한 미얀마, 태국, 베트남 등의 지배권을 확보하였다. 이 시기의 중국 인구는 처음으로 3억 명을 넘어섰으며, 이는 명의 인구 6천만 명과 비교하면 엄청난 발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200년 이상 번성해온 청나라는 1839년에 일어난 아편전쟁과 같은 서구열강 세력의 침입을 받아 국력이 약해졌다. 청나라는 1911년 10월 10일에 발발한 신해혁명으로 인해 1912년에 멸망하였고, 중국 역사에서 2천년 이상 이어졌던 제국의 시대가 끝나게 된다. 손문이 혁명에 의하여 아시아 최초의 공화국인 중화민국이 건설한 것이다.

청나라 관리는 9개의 품계로 구별되었고, 각 품계에 각각 정(正), 종(從)으로 나누었기에 전체 18품계가 된다. 그들은 관리들의 모자의 꼭지에 특정 색깔의 단추모양의 보석을 달아 품계를 알아볼 수 있게 하였다. 모자의 표장에 관한 청나라의 법령은 1636년으로 올라간다.

수많은 한족 속에서 만주족 정복자들은 만주족 왕족, 한족 귀족, 그리고 관리들을 잘 구별하기 위하여 복장에 그 차이를 나타내는 법령을 제정했다. 모자는 다른 어떤 표장보다 품계의 차이를 가장 뚜렷하게 보여줄 수 있었기에 일상생활에 착용하는 모자를 규제한 것이다.

그 모양은 조금씩 변화하였으나, 마침내 1727년 옹정제가 원형 구슬을 닮은 ‘청나라 모자 단추(Mandarin hat button)’를 도입하였다. 모자단추는 행사에 입는 정장 관복을 착용하지 않은 상태에서 가장 눈에 띄기가 쉽다는 장점이 있다. 황제는 붉은 비단을 엮은 작은 손잡이 모양의 줄을 달았고, 귀족이나 관리들은 모자위에 단순하게 모자 단추를 달았다.

계절에 따라 모자 장식은 달랐다. 더운 계절에는 앞머리를 자른 변발에 단추 모양의 장식품만으로 치장을 했으나, 추워지는 계절에는 누비를 놓은 비단 모자를 썼다. 그리고 날씨가 여전히 싸늘한 계절에는 얇은 등나무로 만든 모자를 착용하였다. 여름용 모자는 가는 대나무 실을 엮어 원추형으로 만들고, 위쪽에 품계를 표시하는 보석으로 꼭지를 만들었다.

1품의 모자 단추는 고상한 루비나 투명한 적색 돌을 깍은 것이다. 관복에는 학을 수놓았고, 루비가 장식된 옥 허리띠를 착용하였다. 2품은 붉은 산호의 모자 단추를 달았고, 관복에 금색 꿩을 수놓았다. 루비가 장식된 금 허리띠를 착용하였다. 3품은 사파이어 모자 단추에 외눈의 공작 깃털로 표시 하였고, 관복에는 공작새를 수놓았다. 또한 금 허리띠를 착용하였다. 4품은 청금석(청색 돌) 모자 단추와 관복에는 야생 기러기 모양을 새겼다. 허리띠는 은 단추와 함께 세공한 금으로 만들었다. 5품은 맑은 석영 모자 단추에, 관복은 은 공작새, 허리띠는 은단추와 함께 세공하지 않은 단순한 형태의 금 허리띠를 착용하였다. 6품은 불투명 흰색 조개나 빙장석 모자 단추에 관복에는 백로를 수놓았다. 허리띠는 전복과 같은 자개로 장식하였다. 7품은 단순한 금 모자 단추에, 관복에는 만주 오리를 수놓고, 허리띠는 단순한 은대로 하였다. 8품은 세공한 금 모자 단추에 메추라기를 관복에 수놓았다. 허리띠는 동물의 뿔로 만든 깨끗한 형태를 착용하였다. 9품은 세공한 은색 단추 모양의 모자 단추에 꼬리가 긴 어치를 관복에 수놓았다. 허리띠는 물소 뿔을 착용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표장들은 시간에 따라 변화하였으므로, 나중에는 색깔이 있는 유리로 값 비싼 보석들을 대치할 수 있도록 허용하였다. 모자 단추는 직경 3cm, 높이 5cm 정도의 크기이며 가느다란 구리 막대로 16개의 세공된 원판장식으로 연결되어있다.

청나라 관리의 모자의 품계표시 장식품이 언제 칠보칠을 한 작은 금속종의 손잡이로 활용된 것인지는 확실하지는 않으나, 청나라 말기인 19세기 후반기에서 1900년경부터 이 보석을 장식한 금속 종들이 수출되었다. 화려한 문양의 받침대에 청나라 보석들이 올려 진 종은 전체 높이 10.5cm, 직경 7cm 이다. 종의 추는 색깔이 있는 유리막대를 철사나 가는 체인으로 매어 달았는데, 이러한 화려한 색채의 유리를 북경유리(Peiking glass)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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