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제국 광란의 함성 아직도 들리는 듯

이재태의 종 이야기(29)

나치 광풍의 전초전, 베를린 올림픽

손기정 선수의 마라톤 우승과 이어진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더 유명한 1936년 베를린 올림픽은 인종차별이 횡횡하고 전쟁에너지가 폭발하기 직전의 긴박한 분위기에서 개최되었다.

베를린 올림픽의 주경기장에는 1934년 높이 77m의 종탑이 완공되었다. 철골 뼈대 위에 대리석 판으로 지붕을 덮은 관측용 건축 구조물이었다. 종탑에는 올림픽을 기념하는 무게 9.6톤의 청동종이 걸렸고, 종체에는 베를린의 브란덴부르크 문과 독일의 상징인 쌍두 독수리와 함께 올림픽 오륜기 문양이 조각되었다. 청동종의 가장 자리에는 “제11회 베를린 올림픽 게임. 1936년 8월 1-16일, 전 세계의 젊은이를 부른다 (1-16 August, 1936. 11 Olympische Spiele Berlin. Ich Rufe Die Jugend Der Welt)”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베를린에 진주한 소련군의 실수로 종탑 건물 내부에 심각한 화재가 발생하였고, 이로 인하여 건물의 안정성에 심각한 문제가 생겼다. 결국 1947년 영국의 기술자들에 의하여 이 건물은 폭파 해체되었다. 종탑에 걸렸던 청동종은 직접적인 손상을 입지는 않았으나 화재로 종탑 꼭대기에서 바닥으로 떨어지면서 금이 갔고, 이후에는 더 이상 명쾌한 종소리를 낼 수 없었다.

1956년 올림픽 종탑에 걸렸던 청동종은 수거가 되었으나, 방치되었다가 대전차포 사격 훈련의 과녁으로 사용되는 처량한 운명을 겪었다. 그러나 견고한 청동종은 포탄에 맞아서도 파괴되지 않고 살아남았으며 지금은 베를린 스타디움 외부에 전시되어 그 시대를 말해주는 기념물이 되었다. 종탑 건물은 1960년 같은 높이로 재건축되었고, 4.5톤의 새로운 청동 종이 다시 걸렸다. 원래 크기의 절반 정도인 종에도 본 종과 같은 문양과 글자가 새겨져있다.

필자가 소개하는 순백색의 도자기 종은 독일 베를린의 유명한 도자기 공방인 KPM (Königliche Porzellan-Manufaktur)에서 올림픽 종을 높이 12 cm 직경 10cm 흰색 도자기로 복제한 것으로서, 올림픽 당시에 기념품으로 판매되었다. 같은 디자인을 바탕으로 동전을 넣을 수 있는 종 모양의 저금통도 인기가 있었다. 깨끗한 백색도자기는 본 차이나처럼 단단하며, 흔들면 청아한 소리가 울려 퍼진다. 마치 무서울 정도로 강렬하였던 1930년대의 독일 제국주의와 민족주의를 외치는 광란의 함성소리가 같이 묻어 있는 것 같다.

1931년 국제 올림픽 위원회는 1936년 하계 올림픽 개최지로 스페인 바르셀로나와 경합 하던 베를린을 지명하였다. 이러한 선택은 제1차 대전 이후 국제 사회에서 고립되었던 독일이 다시금 국제 사회로 재등장하게 되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그러나 당시의 정세가 매우 불안하였으므로 올림픽이 개최되기까지에는 우여곡절이 많았다.

독일에서는 1933년 히틀러가 수상이 되었고, 민주주의는 유태인과 집시 또 모든 정치적 반대파와 기타 세력들을 탄압하는 일당 독재 체제로 전환되기 시작하였다. 동시에 나치는 스포츠를 포함한 국민들의 일상생활 모든 영역을 국가에서 관리하기 시작하였다. 스포츠는 아리아인들의 인종적 우월성과 신체적 용맹성을 증진시키는데 집중되었고, ‘아리아 인들 만으로’의 정책이 스포츠에도 적용되었다. 유태인, 유태계 혼혈, 집시와 비 아리아계 선수들은 독일 스포츠계에서 퇴출되었다. 세계는 독일의 민족 차별주의 정책에 대하여 공분하였고, 베를린 올림픽대회에 참가하는 것이 나치의 정책을 인정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하였다.

각국의 유태인 선수들은 개인별로 베를린 올림픽 불참을 선언하는 경우도 있었고, 미국의 유태인 선수와 의원, 그리고 유태인 노동위원회는 공식적으로 올림픽 보이콧을 지지하였다. 그러나 1935년 12월, 미국 아마추어 선수 유니온이 투표로 참여를 결정하자 다른 나라들도 동참하였고 보이콧 운동은 잠잠해졌다. 그러나 1936년 초에는 미국과 영국, 프랑스, 스웨덴, 체코슬로바키아, 네덜란드에서 보이콧 운동이 다시 표면화되었다. 전통적으로 올림픽에 가장 대규모의 선수단을 파견해 오던 미국이 가장 강력하게 반대하였고, 일부는 ‘인민의 올림피아드(People’s Olympiad)’를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개최하려고 계획하였다.

그러나 이 대회는 1936년 7월 수천 명의 선수들이 도착하기 시작하였을 때, 스페인 내전이 발발하여 취소되었다. 결국 미국과 유럽 국가들은 올림픽에 참가하기로 결정함으로써 나치와 히틀러의 인종차별적 전제주의를 제제할 수 있는 기회를 포기하였다. 독일은 국제 여론의 악화를 진정시키기 위하여 올림픽 직전에 1928년 암스테르담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획득하였던 유태인 펜싱 선수 헬레네 마이어를 독일 대표 선수로 선발하였다. 그녀는 올림픽에서 은메달을 차지하고 시상대에서 나치에 경례하며 충성을 맹세하였으나, 유태인 차별정책으로 결국은 올림픽 이후 다시 미국으로 쫓겨났다.

 

베를린 올림픽에는 49개국에서 약 4,000명의 선수들이 129개의 세부 종목에 참가하였다. 독일선수단(348명)이 최대 규모였고, 미국이 두 번째인 18명의 흑인선수를 포함한 312명을 보냈으나 소련은 참가하지 않았다. 식민지 한반도는 마라톤의 손기정과 남승룡을 포함하여, 축구와 농구, 복싱에서 7명이 일본 선수로 출전하였다. 농구, 카누, 핸드볼 경기가 처음으로 올림픽 경기에 포함되었다.

베를린 올림픽의 스타는 육상 경기는 4개(100m, 200, 400m계주, 멀리뛰기)의 금메달을 딴 미국의 제시 오언스였다. 오언스와 동료들은 남자 육상 경기에서 12개의 금메달을 휩쓸었고, 그들을 ‘검은 외인부대’라 불렀던 나치 언론과 아리아 우월주의를 주창하던 독일에게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처음으로 공식 종목으로 채택된 농구도 미국 팀이 우승하였다. 그러나 독일이 전통적 강세 종목이었던 체조, 조정, 승마 등에서 선전하며, 가장 많은 33개의 금메달을 얻었다. 미국은 24개를 획득했고, 헝가리, 이태리, 핀란드, 프랑스, 스웨덴, 일본, 네덜란드, 영국 순이었다. 일본이 얻은 금메달 6개에는 마라톤의 손기정 선수가 포함되어있다.

이 대회부터는 처음으로 텔레비전을 통해 실시간으로 경기들이 방영되었다. 베를린 전 지역에 무료로 올림픽을 시청할 수 있도록 25개의 대형 TV 화면이 설치되었는데, 초기 기계식 모델이었기에 화질은 좋지 않았다고 한다. 베를린 올림픽 대회는 언론 보도 면에서 진보하여, 경기 결과는 텔렉스로 전송되었고 비행선은 유럽 도시로 뉴스 영화 필름을 날랐다.

제 11회 베를린 올림픽 대회는 1936년 8월 1일 정치적 긴장이 감도는 가운데 히틀러는 개회선언으로 시작되었다. 히틀러는 작곡가 리하르트 스트라우스가 지휘하는 악대와 열광적인 관중들의 환호 하에 입장하였다. 히틀러는 개회사를 통하여 “스포츠맨십과 기사도로 무장한 경기는 인간의 최고 자질을 깨워줍니다. 서로 이해하고 존중하여 선수들을 단합시켜줍니다. 또한 평화의 정신으로 국가들을 결속시킵니다. 이것이 올림픽 성화가 꺼져서는 안 되는 이유입니다.”고 연설하였다. 개막식에는 그리스의 올림피아에서 채화된 성화가 봉송되었다. 성화 봉송은 암스테르담 대회에도 있었으나, 아테네 올림피아 신전에서 채화하여 올림픽 개최 도시까지 봉송한 것은 이것이 처음이었다. 독일은 올림픽을 통하여 그들을 고대 그리스와 연결시켜 우수한 독일 국민이야말로 고대 ‘아리아 민족 문화’의 유일한 계승자로 알리고자 하였다. 아리아인의 영웅적 모습의 푸른 눈, 금발과 뚜렷한 얼굴 윤곽은 강조되었고, 이 같은 인종차별적 선동은 올림픽이 끝난 뒤에도 계속되었다.

신축한 주경기장과 4개의 주요 경기장등의 시설은 나치의 깃발과 상징물로 뒤 덥혀 나치 선전의 장이 되었다. 독일 국기는 하켄크로이츠가 들어간 나치당기가 사용되었으며, 대회장과 시내에 이 깃발이 게양하였다. 개회식에서 독일 대표 팀이 입장할 때에 기수 뒤에 정복의 군 장교들이 행진하였으며, 몇몇 유럽 국가들도 로마식 경례를 하며 입장하는 등, 경쟁적으로 정치, 군사적 행동을 하였다.

나치는 베를린 올림픽을 위하여 많은 준비를 하였다. 나치 정권은 올림픽을 통하여 외국 관중들과 언론들에게 평화를 사랑하는 인내심이 많은 독일의 이미지를 부각시키려 하였다. 국제여론을 의식하여 올림픽 기간 동안에는 인종 차별 정책을 은폐하였고, 반유태주의 구호도 일시적으로 중지하였다. 1936년 7월 16일, 나치경찰은 베를린에 거주하는 약 800여 명의 집시를 체포하여 교외의 특수 수용소에 감금하였다. 대부분의 관광객들이나 선수들은 나치 통치가 일시적으로 반유태주의 표지판을 철거한 사실이나 경찰이 집시들을 감금한 사실을 알지 못하였다. 독일 선수들이 훌륭한 경기력을 보이며 많은 종목에서 메달을 차지하였고, 방문객들은 개최지 독일과 독일인들의 환대에 박수를 보냈다. 신문들은 올림픽 게임이 독일을 다시 국제무대로 돌아오게 했다고 보도하였으며, 뉴욕타임즈는 “독일을 더욱 더 인간적인 모습으로 다시 돌아오게 하였다”고 평하였다.

그러나 올림픽의 종료와 함께 유태인에 대한 탄압이 재개되었다. 올림픽이 폐막된 지 불과 이틀 후, 올림픽 단지의 책임자 퓨에르스트너 대위는 자신의 조상이 유태인이라는 이유로 군대에서 강제 퇴역된 사실을 알고 자살했다. 독일 팽창주의 정책과 유태인 및 다른 민족에 대한 탄압은 그 수위가 높아져갔고 홀로코스트 역시 정점을 향해 달려갔다. 3년 뒤인 1939년 9월 1일,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함으로서 유럽은 다시 거대한 전쟁터가 되어갔다.

1940년 대회는 일본 도쿄에서 개최될 예정이었으나, 일본은 중일전쟁과 국제여론의 악화로 개최권을 반납했다. 이어 헬싱키가 다음 개최지로 결정되었으나 전쟁이 장기화 되었기에 취소되었다. 결국 2차 대전이 끝난 뒤 1948년이 되어서야 올림픽은 런던에서 다시 재개될 수 있었다.

올림픽이 시작된 지 한 세기가 지났다. 그러나 올림픽은 아직도 정치와 민족, 그리고 자본의 영향에서 자유롭지 않은 형편이니, 그동안 진화한 것인지 퇴화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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