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명쓰고 산채로 화형…노예 해방의 횃불로

이재태의 종 이야기(18)

버뮤다의 슬픈 흑인 노예 사라 바세트

18세기 영국의 식민지였던 카리브해 서인도제도(西印度諸島)의 버뮤다에 사라 바세트 (Sarah, 또는 Sally Bassett로 불리기도 함)라는 여인이 살고 있었다. 그녀는 노예로 끌려온 아프리카계 흑인과 백인 사이에서 태어난 뮤라토 혈통의 여성이었는데, 지배층인 백인 가족의 노예로 살았다. 그녀는 1713년 경 주인의 재산인 가축을 죽였다는 죄목으로 교구에 잡혀가서 매를 맞은 적이 있었는데, 그때 이미 많은 손자 손녀를 둔 할머니였다는 기록이 있다.

사라 바세트는 1727년 전까지는 버뮤다에서 대장간 일을 하던 백인 프란시스 디킨슨의 노예였는데, 이후 나이가 많아 노예로서는 값어치가 없다는 판정을 받았다. 그후 노예에서 풀려났으나, 겨우 생계를 유지하며 궁색하게 살아야만 했다. 1730년 백인인 토마스 포스터와 그의 부인, 그리고 그들의 하녀인 낸시가 갑자기 병에 걸렸다. 치료를 받았으나 병세가 좋아지지 않던 가운데, 하녀 낸시가 집에 숨겨둔 독극물을 발견하게 된다. 이들은 독극물로 병이 난 것으로 의심해 신고를 했고, 독극물을 숨겨두었던 범인을 찾는 조사가 시작됐다.

당시 사라 바세트의 손녀였던 벡크(Beck)가 포스터 집안의 노예였는데, 범인으로 의심돼 취조를 당하던 도중, 할머니가 그녀에게 독극물을 투여하도록 시켰다고 증언했다. 사라 바세트는 강하게 부정하며 무고를 주장했으나 교구의 마녀심판 재판에서 여러 명을 독극물로 죽이려 했다는 죄명으로 유죄가 인정돼 1730년 6월 17일 산채로 화형에 처하라는 판결을 받았다.

화형은 6월 21일 버뮤다의 해밀턴 항구 크로우 거리에서 거행됐다. 그녀는 화형장으로 압송돼 가면서도 시종일관 평온했으며 유머를 잃지 않았다. 화형 장면을 보기위해 자기보다 앞서가던 군중들을 향해 ‘그렇게 빨리 서둘러 갈 필요가 없네. 내가 거기에 다다를 때 까지는, 그 자리에는 아무 볼 것도 없어…’라고 여유를 부렸다. 버뮤다의 해밀턴 항구에는 양손이 묶여진 채로 화형 기둥에 매달려서 하늘을 쳐다보는 그녀의 마지막 모습이 동상으로 재현되어있다.

사라 바세트가 처형되던 6월 21일은 태양이 활활 타오르던 매우 더운 날이었으므로 지금도 버뮤다 사람들은 매우 더운 날을 ’사라 바세트의 날‘이라고 부르고 있다. 전설에는 그날 그녀를 불태웠던 장작불이 꺼진 뒤에, 그 자리를 정리하였더니 보라색 ’버뮤다 신세계 붓꽃(Bermudiana)’이 잿더미 속에서 발견됐다고 한다. 그녀는 화형에 처해지기 직전 ’내가 죄가 없다면 내가 죽은 자리에는 무죄를 증명하는 증거가 나타날 것‘이라고 했는데, 사람들은 불덩이 아래에서 발견된 이 꽃이 그녀가 말한 무죄의 증거라고 믿었다.

이 꽃은 버뮤다 주민들이 가장 사랑하는 꽃이 됐으며 오늘 날 버뮤다의 어디를 가더라도 보라색 꽃잎을 볼 수 있다. 평생을 노예로 살았고, 나이가 들어 버려진 후에는 백인을 독살하려했다는 누명을 쓰고 군중 앞에서 장작불에 불태워진 그녀의 이야기는 민중들에게서 구전됐다. 반복되는 중노동에 시달리며 내일에 대한 희망도 없이 살던 버뮤다 섬의 노예들은 이 이야기로 자신들을 진지하게 돌아보고, 서로 공감하게 된다. 그 결과, 버뮤다 흑인노예들은 노예 해방을 위해 봉기했고, 마침내 그들은 자유를 얻게 된다.

여기에 10 cm 높이의 사라 바세트의 청동 종을 소개한다. 청동 종의 그녀는 버뮤다 법원 앞에 세워진 동상의 당당한 자세와는 다르게 초췌한 늙은 노예 여인의 모습이다. 두건을 쓴 머리에 구부러진 허리의 힘없는 자세로 왼손에는 나무를 깎아 만든 지팡이를 짚고 있다. 화형장으로 향하면서도 여유를 부리던 그녀였으나, 누명을 쓰고 화형을 당하기 직전에는 모든 것을 체념하며 ‘어떤 일도 지금보다 더 못할 것은 없다’고 애써 스스로를 위로하는 모습처럼 보인다. 이 종이 제작된 1900년대 초의 미국에서는 공식적으로 노예제도가 폐지됐으나, 흑인들은 여전히 극심한 차별에 시달리고 있었는데, 그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 같다.

아메리카 대륙이 발견된 이후 스페인과 포르투갈을 비롯한 유럽 국가들은 신대륙에 식민지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그들이 개발하고 있던 아메리카 대륙의 금은 광산이나 사탕수수 및 담배 재배 농장에 아메리카 인디언을 투입하려했지만 유럽에서 옮아온 질병에 취약했던 인디언 인구가 급격히 감소하였으므로, 그들의 계획에 큰 차질이 발생했다.

1530년 스페인 식민지에서 인디언 노예 제도가 금지되는 것을 계기로, 인디언 대신 아프리카 흑인노예로 이들을 대체하게 된다. 이때 아프리카 흑인 4,000명에 대한 수입권이 주어졌고, 1702년에는 프랑스의 기네아 회사도 4,800명의 노예 수입권을 얻는다. 이후 1713년부터 약 30년 동안 스페인령 아메리카에 14만 4천명의 아프리카 노예가 수송됐다. 서인도 제도의 사탕수수 농장이 급속히 확대되고, 북아메리카 대륙에서 유럽인의 식민지가 확장됨에 따라 흑인 노예의 수요도 계속 늘어갔다.

영국은 식민지 자메이카 섬이 사탕수수 생산의 중심지로 떠오르자, 1672년에 왕립 아프리카 회사를 중심으로 노예 수출의 독점권을 획득해 갔다. 콜럼버스 시대부터 19세기 말까지 아프리카에서 대서양을 건너 아메리카에 도착한 노예는 적어도 1600만 명을 넘었고, 이중 900만 명 정도는 서아프리카에서 카리브해 섬으로 팔려갔다. 당시 카리브해 식민지 나라들은 인구의 85%가 노예였다고 한다.

서인도제도의 노예무역은 유럽이나 식민지에 거주하던 백인들에 의해 삼각 무역의 형태로 이뤄졌다. 대부분은 유럽의 상인들이 범선에 물품을 가득 싣고 아프리카의 서해안에 도착함으로써 시작된다. 상인들은 술, 의류, 총이나 생활용품과 노예를 교환하였고, 노예들은 대서양을 가로질러 서인도 제도로 이송되어 농장이나 광산으로 판매됐다. 상인들은 노예를 판매해 막대한 돈을 벌었고 그 돈으로 서인도 제도의 설탕, 커피, 담배를 배에 가득 싣고 유럽으로 돌아가서 판매했다. 비록 위험하고 오랜 시간의 항해 끝에 얻을 수 있는 무역이지만, 유럽 상인들은 이를 통해 막대한 이윤을 얻었으므로 많은 사람들이 노예무역에 뛰어 들었는데, 특히 네덜란드 상인들이 많았다. 북아메리카 뉴잉글랜드의 상선들도 북미에서 제조한 럼주와 상품들을 아프리카로 날라 노예와 교환을 했으며 이들 노예들을 판매할 수 있었던 서인도 제도로 데리고 갔다.

아프리카에서 노예상인들에게 잡혀 신세계로 수송되던 과정도 험난해, 수많은 노예들은 대서양 바다위에서 생명을 잃었다. 노예선들이 목적지에 도달하는 데에는 몇 달이 걸렸다. 노예들은 쇠사슬에 묶인 채로 선박의 아래층에 수용되었으며, 내부의 비위생적이고 혹독한 환경 때문에 헤아릴 수 없는 많은 노예가 죽었다. 험난한 항해 도중 사망한 노예는 전체 승선자의 10-20%로 추정되고, 그 이전에 포로가 되거나 유괴되는 과정, 그리고 수감되어 있는 동안에 목숨을 잃은 이들도 많다. 이들의 가족이 겪은 고통도 측정하기 어려울 만큼 컸으며, 실로 엄청난 인구가 백인들의 경제적 이익을 위해 지옥 같은 경험을 해야만 했다.

일례로 1781년 흑인노예 400명을 싣고 아프리카를 떠나 서인도로 가던 영국 함선 종(Zong) 호에서 항해 도중에 질병이 돌았다. 질병과 영양 부족으로 60명 이상이 죽었고 많은 수가 병에 걸린 상황에서 선장은 매우 잔인한 결정을 내린다. 배에 싣고 가던 노예 132여명을 산 채로 바다에 던졌다. 그 이유는 배에 먹을 물이 부족하였고, 육지에 상륙한 후 사망하거나 항해 중에 질병으로 사망한 노예에 대해서는 보험금이 지급되지 않지만, 항해 중에 다른 ‘화물(즉 노예)‘을 구하기 위해 바다에 던져진 노예에 대해선 보험금이 지급되기 때문이었다.

여기에 대하여 영국 법원은 ’말을 바다에 빠뜨린 것과 같다‘며 선장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선박 소유주와 보험회사 간의 법적 분쟁 과정에서 이 사건의 진실은 세상에 알려졌고, 사람들은 경제적 이익을 생명보다 앞세운 인간의 잔혹함에 분노하면서 점차 비인도적인 노예무역을 금지하자며 이들에게 동정적인 태도를 취하게 됐다. (송병건 “대양을 가로지른 노예무역의 참상”)

 

 

서인도제도로 잡혀온 노예들은 폭염의 농장에서 매질을 당하면서 사탕수수·담배·면화 등을 재배하거나, 금광과 은광에서 채굴을 하는 노동력으로 이용됐고 생산된 물자는 유럽으로 운송되어 소비자에게 판매되거나 정부의 국고를 살찌우는 수단이 됐다. 노예무역의 이익은 직접적으로는 노예상인에게 돌아갔지만, 유럽 국가들의 소비자와 정부도 큰 이득을 얻었던 것이다. 산업혁명 시기에 영국 전체 국민소득의 약 5%가 노예무역과 서인도 제도의 플랜테이션으로부터 얻은 이익이었다고 한다.

노예무역은 유럽 상업 자본의 식민지 착취에 의해 발생한, 흑인에 대한 가혹한 제도였다. 특히 설탕은 카리브해 식민지 나라 노예경제의 기반이 된 필수품이었다. 당시 유럽에서는 설탕이 재배되지 않았는데, 이 설탕의 단맛을 좋아하게 된 유럽인의 취향을 위해 점차 많은 노예가 사탕수수 밭에 투입됐다.

학자들의 추측에 의하면 1690~1790년 사이에 유럽으로 운반되었던 설탕 1톤당, 한 명의 흑인 노예가 사망했고, 설탕의 소비가 최고점에 달했을 때에는 영국 소비자 250명에게 설탕을 공급하기 위해 흑인 노예 한 명이 사망했다고 한다. 카리브해 섬들에 팔려온 아프리카 노예의 평균 수명이 7년이었다는 통계는 이들의 험난한 일생을 짐작하게 한다.

노예는 대부분 서부 아프리카 출신이었는데 그들이 처한 생활조건은 극도로 열악하였으므로, 반란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영국 등에서 노예 노동에 반기를 들고 서인도 제도산 설탕에 대해서 불매 운동이 있었지만 그 결과는 미미했다. 그러나 19세기 이후부터는 내적·외적 요인에 힘입어 노예제도는 빠르게 무너지기 시작한다. 영국의 노예폐지론자들은 노예제도가 경쟁국가 프랑스를 부유하게 만들어준다고 주장했으며, 유럽과 미국에서도 설탕 생산의 비용이 높아지자 폭리를 취하는 카리브해 농장주들을 강하게 비난했다. 사람들도 점차 노예제도와 노예매매를 인도주의적 관점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마침내 1802년부터 덴마크를 시작으로 미국,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스페인, 스웨덴이 노예 매매를 폐지하였으나, 노예무역이 바로 중지되지는 못했다. 이후 1833년 영국령, 1848년 프랑스령, 1863년 네덜란드령 식민지에서 각각 노예제도가 공식적으로 폐지되었으며, 같은 해 미국의 링컨 대통령이 노예 해방을 선언함으로써 마침내 노예무역은 종지부를 찍게 된다. 스페인 점령지였던 푸에르토리코와 쿠바에서는 19세기 후반에 접어들어서야 노예제도가 폐지되었다.

노예해방 이후 대농장은 대부분 몰락의 위기에 처했으며 설탕 생산은 여러 대농장이 합병해서 중앙 공장에 설탕을 공급하는 정도로 맥을 이어갔다. 아이러니하게도 노예해방 후 식민지 경제는 오히려 본국에 더욱 종속되어 갔다. (‘서인도 제도의 역사와 문화’ 브리태니커 온라인 2014)

버뮤다는 1684년부터 영국령이 되었는데, 1998년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묻는 국민투표가 있었으나 부결돼 현재도 영국 자치령으로 남아있다. 지금은 관광산업과 조세 피난처로 대표되는 국제금융업으로 유명하나, 사라 바세트의 후손들은 지금도 가난하고 힘겹게 살아가고 있다. 그러므로 카리브해 사람들의 슬픈 기억은 아직도 진행형인 것 같다.

최근 카리브해 14개국이 서구 제국주의 국가들에 대해 노예무역을 사과·배상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노예제 뿐 아니라 식민 통치가 그들에게 끼친 해악에 대해서도 배상을 받겠다고 나서고 있다. 유럽 국가들은 ‘그 당시에 노예무역은 불법이 아니었다’ 고 주장하나, 카리브해 국가들은 ‘국제사법재판소에서 소송을 진행하겠다’ 고 한다.

할머니 노예 ‘사라 바세트’와 카리브해 나라들의 아픈 역사를 보며, 군국주의 일제의 위안부 문제로 아픔을 겪고 있는 21세기 우리나라의 상황과도 닮은 점이 있음을 알 수 있다.

※ 이재태의 종 이야기 이전 시리즈

(1) 세상을 깨우고 귀신 쫓고…신묘한 종들의 사연

(2) 무시무시한 검은 전사가 당장 튀어 나올 듯

(3) 적군기 녹여 종으로…승전의 환희-눈물 생생

(4) 천재 화가 ‘달리의 나라’에서 부활한 앨리스

(5) 딸의 작전에 넘어가 맞은 ‘그녀’… 종도 20개나

(6) 성모 마리아와 고문기구, 이 지독한 부조리

(7) 여왕의 꼿꼿한 자태에 서린 독립 열망과 분노

(8) 부리부리한 눈빛… 아직도 통독 황제의 위엄이

(9) “프랑스가 발 아래” 프로이센 한때의 자부심 충만

(10) 지옥같은 참호전투…전쟁 부산물 예술로 부활

(11) 전에 없던 부르조아풍 의상, 근대화 상징물로

(12) “그대에게 행운이…” 미첼레 성인의 사랑 가득

(13) 다양한 감정 실린 종소리…나에겐 한때 ‘공포’

(14) 한 시대를 풍미…. 비와 함께 떠난 왕의 애첩

(15) “나는 억울하다” 청동 속의 표정마저 침울

(16) 추하고 도도하고… 그러나 존경스런 여인

(17) 한때 성당으로 사용… 이게 정말 종이야?

코메디닷컴 관리자 kormedi@kormed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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