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도 군공 다툼…성웅 아닌 단순 전략가?

 

장정호의 충무공 톺아보기(2)

 

무패 전승의 위대한 장수

개봉 26일째 누적 관객수 1600만명을 돌파한 ‘명량’이 북미 전역에서도 ‘광해, 왕이 된 남자’를 뛰어넘어 118만여 달러의( 22일 북미 기준) 역대 최고 흥행 매출을 달성했다고 한다.

북미에서도 ‘명량’의 열풍이 이어지는 가운데 지난 2005년 미 육군 계간지 여름 호에는 ‘한국의 전설적인 장군’이라는 제목으로 이순신에 관한 기사가 다루어졌다. 그 기사의 첫머리는 이렇게 시작한다.

한 사람은 이미 역사에 자기 자리를 새겨 넣었다.

다른 한 사람은 잘 알려지지 않은 수군 장수이다.

한 사람은 오랜 기간의 전국 전쟁 후 통일시킨, 섬나라 전체를 정복함으로써 일본의 섭정(관백)이라는 자랑스러운 직위를 가졌다.

다른 한 사람은 시련 많은 경력을 느릿느릿 통과해서, 조선의 한 지방의 해안을 담당하는 단순한 사령관에 이르렀다.

한 사람은 자신의 호화로운 관저에서 일본의 황제를 접대했다.

다른 한 사람은 군대의 밥을 짓는 세부 기술을 손보았다.

한 사람은 거대한 육-해군 침략을 시작했다.

다른 한 사람은 전쟁이 시작되었을 때 수하에 단 24척의 전선이 있었다.

한 사람은 신 같은 초연함으로 뒤에서 전략을 계획했지만, 다른 한 사람은 그의 어깨에 적탄을 맞을 만큼 부하들의 위험을 충분히 같이 나누었다. 하지만 그래도 초라한 지휘관은 섭정을 이겼고 쉽게 따돌렸으며 결국 왕국의 진로가 바뀌었다.

한국 제독의 이름은 ‘이순신’이다.

‘23전 23승’에서 ‘30전 30승’ 등 기록의 차이는 있으나 이순신이 직접 해전에 참여하여 출동한 것은 16회이며, 한 번의 출동으로 어떤 때는 한 번의 전투 혹은 어떤 때는 두 번 이상의 전투를 한 곳이 많으므로 그 전투의 숫자 부여는 학자마다 다르다.

어쨌든 이순신은 임진왜란의 16번 출동에서 단 한 번도 패배한 적이 없다. 패배하지 않은 것으로 그치지 않고, 적에 입힌 피해에 비해 우리 아군의 피해는 극히 적었던 점은 특히 주목할 만하다.

임진, 병자의 7년 전쟁동안 이순신은 741척의 일본 배를 침몰시켰고, 29척의 배를 나포하였다. 그동안 충무공 측의 피해는 42척에 불과했다. 조선 수군은 원균이 지휘한 전투인 칠천량 해전에서 34척이 유실되고 256척이 침몰당하는, 그야말로 조선 수군의 궤멸도 겪었다. 칠천량 해전, 단 한 번의 전투로 말이다. 원균은 그의 삼도 수군통제사 기간에 8척의 일본 배를 불태웠다.

이순신의 심신이 피폐해진 결정적 계기인, 백의종군 이전의 기록을 보면 더욱 놀랍다.

임진년(1592년 4월)부터 이순신이 삼도 수군통제사의 직책을 잃고 감옥에 투옥되던 때인 정유년(1596) 2월까지, 320척을 격침하고 12척을 나포하는 전과 중에도 아군의 전선 피해는 통선 2척에 불과했다. 그나마 2척의 통선은 아군의 실수로 서로 부딪혀서 잃어버린 것이므로 그렇게 치면 단 한척의 피해도 없었던 것이다. 일본군의 인명피해는 최소 1만 명이 넘어갈 때 아군의 인명피해는 사망 38명 부상 139명이다. 이순신이 지나칠 만큼 꼼꼼한 이유도 있지만 사망 38명은 이순신의 장계에 일일이 그 실명이 거론되었으며, 이는 지휘와 신분의 고하를 전혀 고려하지 않고 무순서로 기록돼 있다. 예를 들어 율포해전 후 이순신이 조정에 올린 장계에 그 사망자를 거론한 부분은 다음과 같다.

‘왜적과 맞붙어 싸울 때, 군졸로서 화살과 총알을 맞은 사람 중에 신이 타고 있던 배의 정병인 김말산, 우후선의 방포군인 진무 장언기, 순천 제1선의 사부(射夫) 배귀실, 제2선의 격군인 사노 막대, 보자기 내은석, 보성 제1선의 사부인 관아의 종 기이, 흥양 제1선의 화살 제조 기술자인 관아의 종 난성, 사도 제1선의 사부인 진무 장희달, 여도 사공인 지방 병사 박고산, 격군인 박궁산 등이 총알에 맞아 죽었습니다.’

이순신이 영웅으로 평가되는 요소 중의 하나는 ‘사람 목숨의 쟁취를 위한 전쟁영웅이 아니라 사람 목숨을 지키는 전쟁영웅’이라는 점일 것이다.

제장명은 저서 ‘이순신의 파워 인맥’ 중 ‘이순신, 성웅인가? 전략가인가?’라는 주제의 글에서 ‘이순신은 여느 군 지휘관과 마찬가지로 군법의 범위 내에서 인명을 참하기도 했고, 교묘한 계략으로 많은 수의 적을 물리치기도 했다. 그리고 적군들을 붙잡아 효수한 것도 비일비재하였으며, 동급의 지휘관들과는 군공 다툼도 있었기 때문에 탁월한 전략가가 될 수 있지만 성웅은 될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이순신은 침략 전쟁이 아니라 방어전의 전쟁영웅이었으며, 백성과 인명을 중시했다. 신분 차별에 따라 인명을 보지 않고 인간으로서의 평등성을 갖고 전공과 부사상자에 대해 예우했다. 시대적 상대성으로 볼 때 그의 이러한 측면은 그를 성웅이라 보아도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만약 이순신이 성웅이 될 기준에 도달하지 못한다면 도대체 누가 될 수 있을까?

임진왜란은 당시 세계최대 규모의 전쟁이었고 일본이 동원한 군사만 30만이 넘는 전력전이었다. 국가 대 국가의 전쟁에서 한 쪽은 국가의 최고 지도자가 4배 이상 되는 국력과 100년간의 내전의 경험으로 다진 전쟁 기술과 장비, 그리고 숙련된 전투원을 총동원하여 일으킨 전쟁이었다. 그러나 한 쪽은 문치 위주의 나라에서, 전쟁과는 200년간 거리가 멀었던 역사를 갖고 그나마 육군 중심의 체계를 가진 나라의 해군에서, 더구나 총사령관도 아니고 지역의 제독정도에 해당한 사람이 동원한 전투력의 대결이었다는, 열악함으로 치면 이보다 더 열악할 수 없는 환경을 극복한 전투의 승리였다는 그 위대함의 의의를 놓칠 수 없다.

이순신은 항상 변방에 있었고, 임진왜란이 나고서야 역사의 고갱이로 올라왔다.

 

코메디닷컴 관리자 kormedi@kormed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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