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리부리한 눈빛… 아직도 통독 황제의 위엄이

●이재태의 종 이야기(8)

독일을 통일한 빌헬름 1세

거의 전 세계를 상대로 전쟁을 두 번이나 일으켰다가 국토를 빼앗기고 산업시설이 잿더미가 됐지만 짧은 시간에 기적같이 재기한 나라. 강인한 체력의 축구 강국, 자동차 및 중화학, 정밀 기계 기술력을 바탕으로 다시 유럽 경제의 맹주가 된 독일은 경이로운 나라다. 고대 유럽에서 야만족의 땅으로 불렸고, 중세에도 존재감이 없던 독일이 이 정도로 부강하고 강한 나라가 된지는 그렇게 오래 되지 않았다. 고대부터 게르만 족이 살던 땅 게르마니아는 10세기 중반부터 거의 900년간 신성로마제국의 중심부였고,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자리는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가 차지했으므로 항상 오스트리아의 간섭을 받았다. 1806년 나폴레옹과의 전쟁으로 신성로마제국이 망한 이후 많은 작은 나라로 분리되었던 독일을 오늘날과 같은 강력한 연방국의 형태로 처음 통일한 사람은 프로이센(프러시아)의 국왕 빌헬름 1세(Kaiser Wilhelm I. 1797~1888)이다.

빌헬름 프리드리히 루드비히는 1797년 베를린에서 프로이센의 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의 차남으로 태어나 어린 시절에는 왕이 되기 위한 특별 교육보다 일반적인 교육을 받았다. 17세였던 1814년 프로이센 군대에 입대하여 전 유럽을 휩쓸었던 나폴레옹 전쟁 기간 나폴레옹 1세의 군대와 싸웠다. 그는 워털루 전투와 리니 전투 등에서 블뤼허 장군의 지휘 하에 있었으며 매우 용감한 병사였다고 한다. 이후 오랫동안 군대에 근무했던 그는 매우 보수적인데다 얼굴은 무표정했고 태도는 거만했으며 초상화에서 보는 바와 같이 팔자 수염을 길게 길렀다. 그러므로 주위사람들에게 호감을 주지는 못하였으나, 일을 도모함에 있어서 한번 내린 결론은 중간에 바꾸는 법이 없을 정도로 단호했다고 한다.

유럽의 1848년 혁명으로 프랑스에서 나폴레옹이 몰락하고 공화정이 성립하자, 독일의 지식인들과 평민들도 혁명을 일으켰다. 빌헬름의 형이자 당시의 국왕이었던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도 처음에는 혁명주의자들의 자유주의 요구를 수용하였고, 앞으로는 프로이센이 독일의 통일과 자유의 중심이 될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독일 국민의회는 작은 나라들이 느슨한 연방을 이루는 소독일주의와 입헌 군주제라는 온건한 헌법을 채택하였고, 의회는 대표단을 베를린으로 파견하여 프로이센 왕에게 황제의 칭호와 헌법을 바쳤다. 그러나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는 이 경우 권력을 잃게 될 것을 알았기에 이를 거부하였다. 그는 표면적으로는 독일국의 여러 왕들이 선택해 준 것이라면 좋지만, 혁명가들이 주는 황제관은 원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왕이 약속을 파기하자 사람들은 분노했고 각지에서 시민군이 봉기하였다. 하지만 강력한 프로이센 군대를 비롯한 각국의 군대에 의하여 1년 내에 시민 봉기는 진압되었다. 이때 빌헬름은 그의 형인 국왕을 노리던 반군과 군중을 향하여 무자비한 포도탄(葡萄彈) 대포를 발포해 “포도탄 왕자”라는 잔인하고 불명예스러운 별명을 얻기도 했다. 국민 의회에 참가했던 교수들은 이때 대부분이 전향하여 국가주의와 애국심을 강조하고 나섰다고 한다. 이 상황을 지켜본 빌헬름은 ‘독일을 통일하려면 독일을 정복해야만 한다. 통일은 말로 되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결국 빈 회의에서는 유럽을 모두 혁명 전으로 되돌리기로 결정, 국경선을 전쟁 전으로 되돌리고 정치 체제도 절대주의 왕정으로 되돌렸다.

그는 뇌졸중과 정신병을 앓았던 형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를 대신하여 1857년부터 대리청정을 하다가, 1861년 형이 사망하자 빌헬름 1세 국왕이 되었다. 왕이 되자 군국주의로써 프로이센을 일등 국가로 만들기로 결심하고, 부국강병을 최우선으로 주창하였다. 그의 주변에는 우수한 부하들이 많았는데, 철혈재상 비스마르크를 수상으로, 몰트케를 참모총장으로 등용하였고 대포왕 크루프를 초빙하여 거대한 후방 장착식 대포를 개발하는 등 군비를 획기적으로 증강시켜 장차 독일의 통일을 준비하였다. 비스마르크는 1862년 의회에서 “독일은 프로이센에 자유주의가 아니라 힘을 기대하고 있다. 시대의 요청은 언론과 다수결이 아닌 철과 피로 해결된다.”는 유명한 연설을 하여 철혈재상의 별명을 얻었다. 빌헬름 1세의 무한한 신임을 등에 업은 비스마르크는 내외 정치에 수완을 보이며 더욱 군비를 증강하였다. 프로이센은 1864년 프로이센-덴마크 전쟁, 1866년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에서 승리하였고 느슨한 독일연방을 해산시킨 후 북독일 연방을 건설하였다. 그리고 1870년 프로이센-프랑스(보불) 전쟁에서 나폴레옹 3세를 굴복시켰고, 1871년 마침내 파리의 베르사유 궁전에서 프로이센을 주축으로 한 독일 제국의 첫 황제로 추대되며, 통일된 독일제국을 이룩하였다. 이때 독일제국의 황제가 된 빌헬름 1세는 이 황제관은 국민이 주는 것이 아니라 바이에른의 루트비히 2세가 요청했기 때문에 받는다고 호령을 하였다.

 

독일인들은 국토를 통일하고 강대국 독일 건설의 기반을 마련한 빌헬름 1세 왕에 대한 존경심과 자부심이 대단하다. 그들은 빌헬름 1세의 두상 조각으로 장식한 생활 용품을 만들어 일상생활에도 황제를 가까이 둔 것 같다. 이 조각품은 빌헬름 1세의 두상으로 장식된 무쇠로 만들어진 커다란 잉크스탠드 탁상종(무게 4.6 kg, 길이 40 cm, 높이 22.5cm, 전후 직경 25cm)이다. 금속 뚜껑이 달린 두 개의 크리스탈 잉크병이 좌우에 올려져있고, 앞부분에는 펜이나 사무용품을 보관하는 공간이 있다. 두상의 앞부분에 작은 왕관 조각품을 좌우로 돌리면 아래쪽에 설치된 종을 치게 되어 “따르릉” 자전거 종 소리가 난다. 이 잉크스탠드를 나에게 판매한 베를린의 치과의사가 전해준 메모에는 1900년경 독일 베를린의 아드론(Adlon)호텔에서 사용된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었는데, 인터넷에서 이 호텔을 검색해보니 브란덴부르크 문 근처의 베를린 중심부에 위치한 전설적인 5성급 호텔이었다. 100여년 전 베를린 최고급 호텔의 접수부에 설치되어 있었으니, 호텔 방문객들이 필요한 기록을 하거나 서비스를 요청할 때마다 빌헬름 1세의 위엄에 찬 얼굴에 존경심을 표하였을 것이다.

 

또한 독일제국은 그가 사망한 이후 라인 강변의 코블렌츠에는 말을 타고 군대를 호령하는 웅장한 카이저 빌헬름 1세 기마조각상을 설치하였고, 1891년부터 4년간에 걸쳐 베를린 최대 번화가인 쿠담거리에 네오로마네스크 양식의 카이저 빌헬름 기념교회 (Kaiser Wilhelm Gedächtniskirche)를 건축하여 그를 기리고 있다, 이 교회는 2차 세계대전 중 영국의 포격으로 서쪽 탑이 무너졌으나 베를린 시민들은 독일이 일으킨 부끄러운 일을 기억하고 전쟁에 대한 경각심을 유지하기 위하여 부서진 교회 건물을 그대로 영구보전하고 있기도 하다.

빌헬름 1세는 계몽군주를 자처하며 국력을 증강하며 19세기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통일 독일제국을 만들었으나, 그가 이룩한 독일 제국의 영화는 그리 길지 않았다. 1888년 빌헬름 1세가 죽은 후에 성공에 취해 있던 그의 손자 독일황제 빌헬름 2세는 독일을 제1차 세계대전의 수렁에 빠지게 했고 제국은 불과 3대 만에 와해되었다. 1차 세계대전 후 프로이센 왕국은 독일의 프로이센 주로 남게 되었다. 그가 황제에 즉위한지 150 여년이 지난 지금, 한 시대를 풍미하였던 빌헬름 1세는 대한민국 어느 연구실의 탁상에 놓인 잉크스탠드 위에서 고고하게 서서 부리부리한 눈을 굴리고 있고, 그 주위에는 적막 만이 흐르고 있다.

 

※ 이재태의 종 이야기 이전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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