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화적 선수도 한방에 ‘훅’… 무상한 육각링

●이춘성의 세상 읽기(6)

격투기 100배 즐기기 ④ / 대표적 격투기 단체와 스타 선수들

미식축구가 미국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끄는 이유는 스타 선수들이 대중들에게 친숙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스타 선수들을 잘 모르는 다른 나라 사람들은 미식 축구에 열광하기 힘들다. 팝송 매니아들을 보면 팝송 스타들과 역사에 관해 꿰뚫고 있음을 본다. 마찬가지로 격투기를 즐기려면 격투기의 스타들과 친숙해져야 한다. 그러나 격투기의 특성상 천하무적처럼 보였던 선수도 상대방의 예상치 못한 훅 한방에 갈 수 있다. 표도르의 연이은 패배, 케인 벨라스케즈의 KO패 등이 그 예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한번 빈 틈을 보인 선수는 대개 내리막길을 걷게 되고 재기가 쉽지 않다. 격투기 선수의 수명이 길지 않다는 것이다. 과거 검투사들도 그렇지 않았을까? 따라서 현재 활동하고 있는 스타 선수를 장황하게 소개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을 것 같다. 과거와 현재 스타 선수들을 그들이 활동했던 무대와 함께 간략히 소개한다.

K-1

1993년 시작된 K-1은 K로 시작되는 투기 스포츠(가라테, 쿵푸, 킥복싱)의 1인자를 가리는 경기로 그 동안 많은 스타들을 배출하였다. UFC나 Pride 등의 종합격투기(MMA)보다 덜 폭력적이고, 힘보다는 복싱과 킥 능력이 승부를 결정하는 화려한 기술 때문에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었다.

K-1 초창기의 스타 선수로는 앤디 훅을 들 수 있다. 스위스 출신으로 일본에서 가라테를 익혔던 앤디 훅은 180cm에 98kg로 다소 왜소한 체격이었으나 기량이 출중하고 투지가 좋아 일본과 스위스에서 인기가 매우 높았다. 가라테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1996년 K-1에서 우승하였다. 2000년 36세의 나이로 백혈병으로 사망했는데 조국 스위스에서 국장으로 장례식이 치러질 정도로 인기가 높았었다. K-1에는 유독 네덜란드 출신 스타들이 많았다. 피터 아츠, 어네스트 후스트, 레미 본야스키, 세미 슐트, 알리스타 오브레임 등이 네덜란드 출신의 전설적인 선수들로 그랑프리 우승자들이다. 이 밖에도 프랑스의 제롬느 배너, 뉴질랜드의 레이 세포, 마크 헌트, 모로코의 바다 하리 등이 K-1의 스타들이었다.

어네스트 후스트는 K-1 역사상 가장 완벽한 파이터로 꼽힌다. 너무 완벽해서 경기가 재미없을 정도였다. 최강의 MMA 파이터인 러시아의 표도르가 어네스트 후스트에게 입식 타격기를 사사(師事)한 사실은 유명하다. 이런 어네트스 후스트도 약점이 있었다. 미식축구 선수 출신인 스트리트 파이터 ‘밥 샵’에게 두 번이나 KO패한 것이다. 코미디언 같았던 160kg의 거구 밥 샵의 주먹을 피하지 못한 것이다. 격투기의 의외성을 잘 보여주는 에피소드라고 하겠다.

피터 아츠, 제롬느 배너 역시 어네스트 후스트와 함께 K-1의 전성기를 구가하였으며 이어 네덜란드의 흑인 미남 은행원 출신 레미 본야스키가 K-1을 제패하였다. 하지만 곧 2미터 10센티의 세미 슐트가 경쟁자들을 압도하면서 K-1을 완전히 평정하며 롱런할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바다 하리에게 패하면서 그의 시대는 짧게 막을 내렸다. 알리스타 오브레임은 막강한 체력과 테크닉으로 K-1과 MMA 양쪽에서 활약하면서 2010년 K-1의 우승자가 되었으나 이후 K-1의 스폰서가 흔들리면서 2011년 경기가 열리지 못하자 격투기의 가장 큰 무대인 UFC로 방향을 바꾸었다. 그는 2011년 마지막 날 프로레슬링 출신의 미국 최고 인기 선수인 브록 레스너를 미들킥 KO로 완벽하게 제압하면서 UFC에 성공적으로 데뷔하였다. K-1 챔피언 알리스타 오브레임이 UFC의 새로운 아이콘으로 떠오르면서 상대적으로 K-1 자체는 존재 가치가 사라지고 말았다.

Pride FC

 

초창기 Pride에서 가장 인기를 끌었던 선수는 단연 브라질의 힉슨 그레이시(Rickson Gracie)였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힉슨의 경기를 보고 너무 반하였다. 역사상 최강의 격투기 선수로 인정받는데 부족함이 없었다. 하지만 아들이 교통사고로 사망하자 힉슨은 더 이상 격투기를 하지 않고 은퇴하였다. 이후 일본의 사꾸라바 가즈시가 그레이시 패밀리의 다른 형제들을 잇따라 격파하면서 일본국민들을 열광시키고 Pride의 주역으로 떠오른다. 그러나 브라질의 반데레이 실바가 사꾸라바를 세 번에 걸쳐 재기하기 힘들 정도로 꺾어 놓음으로써 일본 선수들의 기세가 완전히 꺾였다. MMA가 글로벌화됨으로써 동양인의 체격으로 서양인들과 맞선다는 것이 더 이상 힘들어진 것이다. 힘과 체격에 기술까지 갖춘 서양 선수들을 기술만으로 상대하던 일본 선수들이 더 이상 감당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Pride 전성시대를 이끌던 선수로는 헤비급의 표도르, 크로캅, 노구에이라를 들 수 있다. 치열한 승부 끝에 페도르가 두 선수를 제압하면서 ‘60억 분의 1’ 인류 최강자로 등극하였다. 그러나 Pride가 앞서 이야기한 바와 같이 갑작스레 쇠퇴하면서 UFC에 인수됨에 따라 반데레이 실바, 크로캅, 노구에이라 등의 스타 선수들이 모두 UFC로 옮겨 옥타곤의 철망 cage 안에서 경기를 하게 되었다. 이들은 팔꿈치 가격을 허용하는 등 룰이 다른 UFC에서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고 패배하면서 모두 쇠퇴의 길을 걷게 된다.

단 한 선수 표도르는 예외였다. 푸틴 대통령이 아끼는 러시아의 스타 페도르는 다른 선수들과는 Pride와의 계약이 달라 UFC로 옮기지 않아도 되었다. Pride가 UFC에 인수된 후 자신에게 제시하는 계약이 종신, 노예 계약이라고 표도르는 반발하였다. UFC 회장 Dana White는 Pride를 인수하였음에도 최강자 표도르를 잡지 못해 몸 달아하였다. 그러나 이후 표도르가 내리막길에 들어서서인지 2류 선수들에게 잇따라 패함으로써 Dana White와 Fertitta 형제는 목에 걸렸던 가시가 저절로 사라지는 행운을 누리게 되었다.

UFC

격투기 비즈니스 세계는 그 동안 많은 단체들이 명멸하였으나 가장 인기를 끌었던 K-1이 지리멸렬하고 Pride가 UFC에 인수되면서 현재 UFC에 의하여 천하 통일이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당분간 UFC에 버금갈 단체는 나타나지 않을 것이 확실시된다. 격투기에 대해서 알고 싶은 분들은 UFC 선수들만 잘 알고 있으면 된다. UFC가 걸어온 길에 대해서 좀 상세히 설명하고자 한다.

 
UFC 대회의 발상, 즉 세계 최고의 격투기 선수를 뽑겠다는 아이디어는 사우스 캐롤라이나의 광고업계에 종사하던 ‘아트 데이비’라는 사람에 의해서였다. 그는 이 아이디어의 실행을 위하여 시장 조사를 하던 중 브라질 출신의 그레이시 패밀리 일원인 호리온 그레이시(Rorion Gracie)를 만나게 된다. 그는 캘리포니아주 토렌스에서 브라질리안 주짓수 학교를 운영하고 있었다. 이들은 여러 종류의 무술가 8명이 참가하여 대결을 벌이는 이벤트를 구상하였다. 그 와중에 별난 이벤트를 기획하는 SEG 회사를 파트너로 맞이했다. ‘Ultimate fighting championship’이라는 이름은 SEG가 고안한 것이다 (UFC 5회 대회 이후 UFC의 운영권은 SEG에게 완전히 넘어간다).

 
UFC 1회 대회는 1993년 11월 12일에 콜로라도 주 덴버에서 열렸다. 우승자는 그레이시 패밀리의 호이스 그레이시(Royce Gracie)였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승리였다. 왜소한 체격의 호이스가 우승하는 것을 보고 사람들은 경악하였으며 브라질리안 주짓수에 대해서 경이로움을 느꼈다. 이 경기는 약 86,000명의 페이퍼뷰(pay-per-view) 구매자를 기록했다. 하지만 격투기 경기가 잔인하다는 여론이 일어났고 특히 상원의원 존 맥케인이 얼티밋 파이팅을 추방하자는 캠페인을 벌여 UFC는 어려움에 처하게 되고 케이블TV에서 쫓겨나면서 페이퍼뷰 구매자 수가 격감하여 경영의 어려움에 직면하였다. 또한 일본의 Pride에 비해서 인기 면에서 밀리고 선수들의 기량에서도 많이 밀리는 감을 주었다. 얼티밋 파이팅이 잔인하다는 비난에 대응하기 위하여 ‘규칙이 없다(There are no rules)’는 자신들의 자랑스런 ‘Vale Tudo’를 포기하고 규칙을 만들기 시작하였다. 체급을 도입하였고, 성기 가격, 쓰러진 상대방에 대한 발차기, 박치기, 후두부 가격 등 치명적인 기술을 금지하였으며, 맨 손대신 글러브를 착용하기로 결정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UFC 창설부터 고군분투하며 초창기를 이끌던 메이로비츠(Bob Meyrowitz) CEO와 SEG 회사의 관계자들은 케이블 TV에서 유료중계(pay-per-view)를 하지 않으면 도저히 회사를 이끌고 나갈 수 없다고 판단하였다. 유료중계를 위해서는 두 개의 영향력있는 단체로부터 인가를 받아야 했다. 뉴저지주(New Jersey State Athletic Control Board ; NJSACB)와 네바다주의 체육위원회(Nevada State Athletic Commission ; NSAC)였다. 뉴저지주 체육위원회는 이미 다른 격투기 단체(IFC)가 인가를 받았으므로 UFC는 미국 내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NSAC로부터 인가를 받을 수 밖에 없었다. UFC 관계자들은 NSAC로부터 인가를 받기 위하여 무진 노력을 하였으나 결과적으로 인가를 받는데 실패하고 만다. 더 이상 견디지 못한 Meyrowitz와 SEG 관계자들은 2001년 1월 라스베가스에서 카지노를 경영하던 Fertitta 형제와 격투기 매니저 출신인 Dana White 세 사람이 설립한 Zuffa라는 회사에 UFC를 매각한다. 이때 매각 가격이 200만불이다. 현재 UFC의 인기와 관중 동원력 등을 감안하면 너무나도 헐값이다.

새로운 UFC를 장악한 Zuffa는 2001년 5월 4일 UFC 31회 대회부터 새로운 모습의 대회를 개최하면서 관중들을 끌어 모으기 시작한다. 또 유선 TV 중계와 pay-per-view의 선결 조건인 두 단체(NJSACB, NSAC)의 인가를 받게 된다. 이후 켄 샴록, 티토 오티즈, 척 리델, 래디 커투어 등의 스타 선수가 UFC에서 활약하였다. Zuffa 인수 후 UFC가 비약적으로 성장하면서 UFC의 전(前) 소유주였던 Meyrowitz와 SEG 관계자들은 인수 과정에 의혹을 제기한다. 사실 몇 군데 석연치 않은 점도 있었다. 그 내막을 살펴본다.

1999년 4월 Meyrowitz와 SEG 관계자들이 네바다주에 가서 NSAC로부터 인가를 받으려 할 때 NSAC의 5명의 위원 가운데 한 명이 Lorenzo Fertitta였다는 사실에서 의혹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당시 NSAC 위원장 Marc Ratner는 후에 Zuffa의 부회장으로 근무하게 된다. SEG 관계자들은 NSAC 위원인 Lorenzo Fertitta 등이 UFC의 가치를 떨어뜨리기 위해 (그래서 헐값에 인수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인가해 주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NSAC에서 수월하게 인가받을 줄 알았으나 실패하여 헐값에 UFC를 넘길 수 밖에 없었던 前 소유주 입장에서는 결과만 놓고 보면 음모론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더구나 최근 UFC가 격투기 비즈니스계를 완전 평정하여 그 가치가 천문학적으로 증가된 것을 보면 분통이 터질 것이다.

 
“Total MMA – inside ultimate fighting”이라는 책에서 저자 ‘Jonathan Snowden’은 1999년 4월 23일 저녁 SEG 관계자들과 NSAC 사이에 벌어진 의혹에 관해서 기술하고 있다. 다음 날 벌어질 인가 투표에서 5명 가운데 3명이 찬성표를 던질 것으로 예상하고 있던 SEG 관계자들은 이날 밤 한 통의 전화를 받는다. 찬성 위원 3명 가운데 한 명이 반대쪽으로 돌아섰다는 것이다 (이 위원이 바로 Lorenzo Fertitta였다고 SEG 관계자들은 주장한다.) SEG 관계자들은 투표 결과 거부 쪽으로 결론이 나면 더 큰 역풍을 맞을 수 있다는 우려에 다음 날 아침 상정된 안건을 철회했다. 물론 이 의혹에 대해서 Fertitta 형제는 강하게 반발한다. Snowden의 책에서는 UFC를 새로 인수한 Fertitta 형제의 배경에 대해서도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이들이 텍사스 갈베스톤(Galveston)에서 카지노를 운영하다가 당국이 조사를 하자 라스베가스로 옮겨 온 마피아의 자손들이라는 것이다.

여하튼 뒤늦게 의혹을 제기한다고 달라질 것은 없었다. 비즈니스의 세계는 약육강식, 강자독식의 세계인 것이다. 무엇보다도 제기된 의혹과는 별개로 UFC를 새로 인수한 Zuffa는 과거의 소유주인 SEG와는 달랐다. 이들은 최상의 경기를 약속했다. 메인 경기는 말할 것도 없고 오픈 경기도 다른 단체의 메인 경기에 준하는 경기를 하겠다고 했다. 실제로 UFC는 과거와는 많이 달랐고, 많은 UFC 관계자들은 Zuffa의 인수를 환영했다. UFC는 이후 수 년간 세계 격투기의 주도권을 놓고 일본의 Pride, K-1과 경쟁하였고 상당 기간 적자에 시달리기도 했다. 하지만 행운이 따랐다. 격투기의 인기가 복싱, 레슬링 등 기존의 투기 스포츠들을 따라잡기 시작한 것이다. 또한 2007년 5월 27일 갑작스레 침체를 겪게 된 Pride를 인수하면서 MMA의 주도권을 잡게 되고 이후, K-1이 지리멸렬하면서 UFC가 격투기 비즈니스를 독식하는 모습으로 승승장구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된 데에는 UFC를 최고 격투기의 장으로 운영하는 Zuffa의 경영능력이 가장 중요한 요인임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UFC에서 경기를 하는 선수는 반드시 승인된 반바지를 입고 싸워야 한다. 상의나 도복, 긴 바지는 허용되지 않는다. 그리고 승인된 가벼운 글러브를 착용해야 한다. 또한 철창으로 둘러쌓인 팔각형의 옥타곤을 경기 장소로 사용한다. NSAC의 인가를 받을 때 9개 체급으로 하기로 하였으나 현재 헤비급, 라이트 헤비급, 미들급, 웰터급, 라이트급, 페더급, 밴텀급의 7개 체급으로 경기를 진행한다. 헤비급은 93kg 이상, 라이트헤비급은 84~93kg, 미들급은 77~84kg로 체중에 따라 체급을 나눈다. 

[격투기 100배 즐기기 이전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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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코메디닷컴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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