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진국 복지부, 확실?

“전문가들이 안전 의심하면 수술중단이 상식”

영화 ‘《쉰들러 리스트》의 마지막 장면에서 ‘한 사람의 생명은 구하는 것은

우주를 구하는 것’이라는 유태인 격언이 나온다.

현대문명 사회가 소중한 이유는 구성원 한 사람 한 사람의 생명을 소중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몇 명의 인질이 잡혀도 온 국민이 가슴을 졸이며 그들의 안전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다.

과거에도 찬란한 문명을 자랑하는 국가들이 있었지만, 인본주의 사상이 도입된

이후 현대 민주주의 국가의 가치는 바로 이 생명 존중 정신에 있다.

이러한 정신은 두 가지 상이한 모습으로 표출된다.

첫째는 범죄자가 체포돼도 확정판결이 내리기 전까지는 무죄로 추정하는 ‘무죄

추정의 원칙’이고 둘째는 임상에서 전문가들이 문제를 제기하면 철저한 검증을 통해

안전성이 확인될 때까지는 안전하지 않다고 보는 ‘문제 추정의 원칙’이다.

첫 번째는 문제가 있을 가능성이 큰 사람을 일단 무죄로 간주하는 잘못을 저지더라도

억울하게 처벌되는 사람을 막는 장치이다. 두 번째는 설사 나중에 문제가 없는 것으로

밝혀질지라도 혹시 모를 부작용 때문에 생기는 희생을 막으려는 취지에서 나왔으며

두 가지 모두 ‘인본주의’라는 똑같은 뿌리에서 나온 원칙이다.

2006년 세계 제1위의 제약회사인 화이자는 8억 달러(약 9000억 원)를 투자하여

고지혈증약 “토세프라핍”을 개발했다. 화이자가 자사의 블록버스터 약인 “리피토”가

특허만료를 눈앞에 두고 있기 때문에 심혈을 기울여 개발한 신약이다. 그러나 세계

각국의 의료기관에서 1만5000명을 대상으로 한 임상연구에서 새 치료제 복용시의

사망률이 리피토를 복용할 때보다 0.4% 높다는 결과가 나왔다.

화이자는 이 0.4%의 차이를 확인하자마자 당시까지 임상시험을 진행해 왔던 모든

의료기관들을 상대로 환자들에 대한 토세트라핍 투여를 즉각 중단토록 통보하고,

임상시험 참가 환자들에게도 이 사실을 알리도록 조치했다.

화이자는 애널리스트들이 1년에 200억 달러(약 23조원)의 매출을 안겨줄 것으로

예상한 신약을 스스로 포기했고 20%의 인원 감축과 주가폭락의 아픔을 겪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료계에서 화이자의 결단을 너무나도 당연한 상식적 행동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문제 추정의 원칙’ 때문이다. 선진국 의료계와 제약계에서 이런 일은 비일비재하다.

비록 심장 진료가 전공은 아니지만 의사의 한 사람으로서 최근 보건복지부가 건국대

송명근 교수의 카바 수술법에 대한 조치를 보면 우리 정부가 과연 선진국을 지향하는지

의심이 들 정도다.

대한흉부외과학회의 수많은 의사들이 2008년 추계학술대회에서 송 교수의 카바

수술에 대한 문제점들을 조목조목 지적했고 송 교수와 같은 대학 심장내과의 두 교수는

학회와 보건당국에 부작용을 보고했다가 학교 당국에 의해 한때 해임되기도 했다.

그리고 대한심장학회는 무려 5차례에 걸쳐 카바 수술의 문제점에 대해 성명을 발표하고

즉시 수술을 중단할 것을 요구했다.

심지어 정부기관인 보건의료연구원에서도 “2007년 3월부터 2009년 11월까지 서울아산병원과

건국대병원에서 카바(CARVAR) 수술을 받은 환자 397명 가운데 15명이 숨지고, 절반이

넘는 202명의 부작용이 발견됐다”고 보고하고 복지부에 수술 중단을 건의하기도

했다.

게다가 이해 당사자인 송명근 교수의 항변을 받아들여 송 교수가 추천한 사람들을

포함시킨 전문가 자문단이 내린 결론에서도 이번에 분석한 수술환자 397명 중 수술을

받지 않아도 되는 환자가 39명, 수술 후 심내막염 환자가 16명, 재수술 환자는 20명,

수술 후 병이 남아 있는 환자는 49명이었다. 자문단은 사망률은 질병의 경중을 완벽히

반영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검토에서 제외했지만 문제가 있다는 점은 인정했다. 이는

위원 9명 중에 송교수가 추천한 사람이 3명이나 들어가 있는 자문단이 내린 결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건당국은 전향적인 조사를 이유로 이 수술을 계속하도록

허용했다. 문제점을 인정했다면 일단 수술을 중단시키고 제3자가 기존의 기록을 정밀하게

검토해서 안전성평가를 하는 것이 당연한 상식이다. 적어도 개인 한 명 한 명의 생명을

중시하는 현대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그렇다.

그리고 2009년 5월 건강보험정책심의위원회(건정심)가 3년 후 재평가하자고 결정하였는데

그렇다면 지금처럼 논란이 되는 시점에서 건정심 결정 이후 과연 전향평가가 제대로

이뤄지고 있는지, 이뤄지고 있다면 중간평가는 어떻게 나왔는지에 대한 언급이 있어야

되는 것이 아닌가.  이렇게 논의만 하는 과정에서 희생되고 있는 환자들은 누가

보상할 것인가?

외국에서는 0.4%의 사망률 차이 때문에 일년에 200억 달러의 매출이 기대되는

신약도 당연히 포기하는데 우리는 얼마의 희생이 있어야, 또 전문가들이 얼마나 반대를

해야 문제의 심각성을 인정할 것인가? 과연 우리나라가 현대 민주국가라는 자부심을

가져도 좋은가, 답답한 의문이 꼬리를 문다.

전영훈(신경외과 전문의, 나누리병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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