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 낙태 95%, 더 원치 않거나 경제적 사유

신현호의 의료와 법

미자(35. 가명)씨는 산골마을에서 1남5녀 중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큰 언니 둘은

초등학교, 작은 언니들은 중학교만 마쳤고, 오빠만 고등학교를 졸업해 도시로 나와

직장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어려서부터 언니들 옷을 물려받아 입었고, 세끼 밥조차

배불리 먹어본 기억이 없습니다. 가난이라면 진절머리가 날 정도입니다. 미자 씨는

오빠의 도움으로 산업체 부설 야간고등학교를 마쳤습니다. 같은 직장에서 남편을

만나 사귀던 중 임신사실을 알고 결혼해 딸 아영이를 낳았습니다. 

자식은 하나면 족하고 다음 세대에게는 가난한 삶을 물려주지 않겠다는 다짐으로

남편은 정관수술을 했습니다. 정말 ‘잘 기른 딸 하나, 열 아들 안 부럽다’는 마음가짐으로

아영이를 키우고 싶었습니다. 미자씨는 아내로서, 엄마로서, 직장인으로서 1인 3역을

다하며 하루 24시간이 모자랄 정도로 일했습니다. 그 덕분에 미자씨네는 사글세에서

전세로 옮겼습니다. 수입의 3분의1 가량을 아영이의 유아원비, 영재학원비, 피아노

학원비에 쓰고 나머지는 집을 사기 위해 적금을 붓고 있습니다.

똑똑한 아영이가 무럭무럭 자라는 것을 고마워하면서 화목한 생활을 이어갔습니다.

그런데 ‘임신 8주’라는 날 벼락같은 사건이 터졌습니다. 묶었던 남편의 정관이

풀려 원치 않은 임신을 하게 된 것입니다. 불임수술 후 5년이 지나도 정관이 풀릴

확률이 3%가 넘는다는 것을 이제사 알게 됐습니다.

미자씨는 의사에게 사정을 이야기 하며 낙태를 부탁했습니다. 불법이므로 할 수

없다는 답이 돌아왔습니다. 임신초기라도 경제적인 사유로는 중절수술을 못하게 한다는

모자보건법이 원망스럽기까지 합니다. 당연히 들어줄 줄 알았던 의사 말에 심한 좌절감이

듭니다. 자식에게는 못 배운 설움을 안기기 싫어 아끼고 또 아끼며 살아왔습니다.

부부의 소득으로는 아영이 하나 키우기도 벅찹니다. 아이가 둘이 된다면 어떻게 해볼

엄두가 나지 않습니다.

2005년 고려대학교와 보건복지부가 기혼여성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 따르면 낙태를

하는 사유의 94.9%는 더 이상 자녀를 원치 않거나 경제적인 이유 때문입니다. 바꿔

말하면 현실 속 낙태의 대부분이 불법이라는 것입니다. 뒤집으면 대부분의 기혼여성은

부녀낙태죄를 저지르는 잠재적 범죄자들입니다.

사회현실과 전혀 동떨어진 법률은 족쇄일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일본의 모체보호법은

‘임신의 계속 또는 분만이 신체적 또는 경제적 이유에 의하여 모체의 건강을 현저하게

해칠 우려가 있는 자’에게는 낙태를 허용합니다. 선진국에서는 사전피임약 뿐 아니라

사후피임약을 공급합니다. 뒤에라도 착상을 못하게 하여 낙태를 줄이는 것입니다.

물론 어느 정도 열악한 경제 환경이라면 이미 생긴 새 생명을 태어나지 못하도록

허용할  것일까에 대해서는 또 다른 논란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변에는 미자씨네와 같은 현실 앞에서 밤잠을 자지 못하는 이웃이 있을 수 있고,

어느 사회든 공동체의 이름으로 미자 씨에게 “일단 낳으라”고 강요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람은 잘 태어나고(well-birth), 잘 살고(well-being), 잘 죽는(well-dying)

삶을 누릴 권리가 있습니다. 물론 ‘잘(well)’은 경제적인 사유에 국한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교육이나 주거환경 등 경제적인 부분도 인간에게 필수 요소 가운데 하나라는

것이 갈수록 분명해지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사회적인 보호 장치는 마련하지 않은

채 무조건 낳으라고만 하는 것은 문제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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