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네소타 프로젝트] “떨리는 손으로 심장 엽니다”

39통 편지로 보는 한국 심장수술 개척사

“개심술을 시행했지만 몇 시간만 생존했습니다.” (1959년 8월 24일)

“5월에 환자 한 명을 수술했는데 이번에도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1961년

6월8일)

“마침내 7, 8번째 수술에서 생존 케이스를 기록하게 됐습니다. 진심으로 감사

드립니다.” (1963년 3월 27일)

서울대병원 흉부외과 고 이영균 교수가 미국 미네소타대학병원의 ‘스승’ 와튼

릴리아이 교수에게 보내 편지의 일부분이다. 이 교수는 정부 프로그램에 따라 미네소타대학병원에서

1957~1959년 심장수술 연수를 받았으며, 1963년 한국 최초의 심폐기를 이용한 심장수술을

성공시킬 때까지의 고난과 기쁨을 스승 릴리아이에게 적어 보냈다.

‘미네소타 프로젝트’는 한국전쟁 뒤 1955~61년 한국 의사를 미네소타대학병원에

보내 연수시켜 한국의 의료 수준을 높이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프로그램이었다.

당시 연수자 중 한 명이었던 이영균 교수가 연수 뒤 한국에 돌아와 불모지에서 악전고투하며

심장수술에 도전한 사연을 스승 릴리아이 교수에게 보낸 편지 39통이 최근 서울대병원

흉부외과 김원곤 교수에 의해 발굴돼 세상 빛을 보게 됐다.

릴리아이 교수(1918~1999)는 외부 기계로 혈액을 순환시키면서 심장 수술을 하는

방법을 개발해 ‘심장수술의 아버지’로 불리는 인물이다. 이영균 교수(1921~1994)는

서울대 흉부외과를 창설했으며 1982~1986년 서울대병원장을 지냈다.

“아무 것도 없지만 수술은 해야 하고…”

이 교수의 ‘미네소타 연수기’는 시작부터가 처절하다. 1957년 당시 서울대병원

외과학교실에 재직 중이던 36세의 이영균 교수는 당시 명주완 학장에 의해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미네소타 행을 명령받는다. 그리고 미국에 도착해 단 1주일 간의

영어회화 교육을 받고 병원에 나가니, 병원에서는 첫날부터 야간 당직에 수술조수까지

시킨다. 당시 상황에 대해 이 교수는 “심장이라고는 의대 1학년 시절 해부학 실습

때 배운 기억밖에 없는데, 참으로 난감했다”고 당시를 술회한 바 있다.

그는 1년 예정이었던 연수를 “더 배워야 한다”고 고집해 2년 동안 첨단 심장수술법을

배운 뒤 1959년 귀국한다. 첨단 의술을 배웠다고는 하지만 국내 사정은 정말로 ‘아무

것도 없던’ 시절이었다.

이 교수가 릴리아이 교수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당시의 절박했던 사정이 그대로

드러난다. 그는 1961년 3월14일 편지에서 “학장과 두 교수가 세 번 수술할 수 있는

혈액을 살 수 있는 돈을 주었습니다”라고 했고, 4월11일 편지에서는 혈액 응고를

막는 항응고제 헤파린을 보내 달라고 부탁한다.

릴리아이 교수는 7월10일자 “헤파린 200cc들이 72병을 무료로 보낸다”고 답장을

보낸다. 오늘날 너무나 쉽게 구할 수 있는 헤파린 조차 이 교수는 미국 스승에 일일이

부탁해 몇 달씩이나 걸려 공수 받으면서 수술에 매달렸던 것이다.

장비와 돈만 없었던 것이 아니다. 아무리 세계 최고의 심장수술 대가에게서 배웠다고

하지만, 당시는 심장수술 초창기였고 2년간 배운 실력은 한계가 있기 마련이었다.

그래도 환자는 밀려 왔고 수술은 해야 했다.

1963년 5월14일 편지에서 이 교수는 자신의 심정을 이렇게 밝힌다. “저는 좌심방을

열 때마다 제발 인공판막이 필요할 정도로 판막이 손상되어 있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인공판막이 없으니까요. 그래서 좌심방을 열 때마다 늘 초조함을 감출 수 없습니다.”

당시의 처절한 상황과 어려움을 느끼게 해주는 부분이다.

‘격무에 시달리는 흉부외과의’ 예나 지금이나 똑같아

이런 난관에도 불구하고 이 교수는 뚜렷한 성과를 이뤄냈다. 심폐기를 이용한

세계 최초의 개심술(開心術)이 1953년 미국에서 이뤄진 뒤 불과 6년 만에 한국에서도

척박한 환경에서나마 동일한 수술이 행해졌고, 1963년 첫 성공이 이뤄졌기 때문이다.

오늘날 세계 최고 수준을 달리고 있는 한국 흉부외과학의 토대를 쌓아 올린 노력이었다.

그러나 그때나 지금이나 ‘격무에 시달리지만 충분한 보상을 받지 못하는’ 흉부외과

의사들의 노고는 마찬가지였다. 65년 8월30일 편지에서 이 교수는 자신의 처지를

다음과 같이 전했다.

“제 의대 동기들 중 많은 숫자가 개업을 해서 미국 기준으로도 많은 돈을 벌고

있지만, 저는 심장수술을 위해 전적으로 학교 일에 매달려야 합니다. 제 소망은 저와

가족이 조금 더 나은 생활을 위해 학교를 그만 두기 전까지 개심술에서 최소한 안정적인

결과를 확립해 두는 것입니다. 제 소망을 실현할 수 있을 때까지 몇 년이 더 걸릴지

모르겠습니다. 상황은 매우 힘들지만, 누군가는 한국에서 이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편지를 발굴한 김원곤 교수는 이 편지에 대해 “같은 흉부외과의 길을 걷고 있는

후학의 입장에서 참으로 가슴이 아련해지는 것을 피할 수가 없다”고 말했다. 

김미영 기자 hahaha@kormed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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